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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 속에서의 위로 (욥 02: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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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속에서의 위로(욥기 2:11-13)

오늘 우리가 생각하게 될 말씀은 욥기의 서문에서 그 마지막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욥이 큰 고통 중에 있다는 소문이 여러 지역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욥이 당한 어려움 자체도 특수하려니와 그는 본래 우스 땅에서 이름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욥이 고난 중에 있게 된 소식이 사방에 퍼지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이 소식이 욥의 친구들에게 들렸습니다. 그래서 욥의 세 친구가 고통 중에 있는 욥을 친절하게 방문했습니다.

욥을 미워하고 싫어하던 사람들은 욥이 재앙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개가를 올렸습니다. 욥기 16장 10절에 보면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벌리며 나를 천대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 했고, 19장 18절에 보면 “어린아이들이라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했습니다.
30장 1절 이하에는 “이제는 나보다 젊은 자들이 나를 기롱하는구나 그들의 아비들은 나의 보기에 나의 양 떼 지키는 개 중에도 둘 만하지 못한 자니라… 이제는 내가 그들의 노래가 되며 그들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그들은 나를 미워하여 멀리하고 내 얼굴에 침 뱉기를 주저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내 줄을 늘어지게 하시고 나를 곤고케 하시매 무리가 내 앞에서 굴레를 벗었음이니라” 하였습니다.

이처럼 욥이 어려움을 당할 때 속마음으로 기뻐하며 손뼉치며 조롱하고 비웃는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지난 시간에도 말씀 드린 대로 다른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속 시원해 하는 것은 올바른 삶의 자세가 아닙니다. 마귀가 그렇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자녀가 환난을 겪을 때 기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저주하고 욕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욥의 세 친구는 욥이 어려운 일을 당한다고 할 때 그를 염려했고, 위로하려고 찾아왔습니다. 잠언 17장 17절에 보면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 했습니다.
이 세 친구는 욥의 가장 절친한 친구들이었을 것이고 욥은 그들로부터 위로받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시대, 그 지역에서 매우 탁월한 지혜와 경건함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구나 욥의 친구들이 지니고 있던 종교적인 견해도 그 당시 일반 사회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견해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 세 친구의 이름은 엘리바스, 빌닷 그리소 소발이었습니다. 우리는 나중에 네 번째 친구 엘리후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도 처음부터 모임에 참석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여기서 욥의 친구로 왔는지, 혹은 그저 방청인으로 왔는지는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아니합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인간들의 삶의 모든 부분에 하나님의 돌보심과 간섭이 있으신 것으로 생각했고, 어떤 어려운 환경에 놓이게 되면 그것을 하나님의 보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욥보다 나이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들은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 찾아 왔으나 욥에게 큰 도움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이 세 사람의 친구는 그들의 대화에서 나타나듯이 매우 지혜롭고 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욥의 세 친구는 그 나라의 위대한 인물로 방백이나 족장들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욥은 만사가 형통할 때 그들과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이 그와 동등한 자라고 하더라도 욥은 그들을 시기하지 않았고, 그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자라고 하더라도 신분의 격차와는 상관없이 친밀한 대화와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사실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회에서는 사람이 서로 만나면 그 사람의 직업이 무엇이고, 무슨 신분이며, 공부를 얼마나 했고, 재산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를 따집니다. 또 그와 사귀면 무슨 이득이 내게 돌아올까 하는 것을 생각해 가면서 교제합니다.
어른들은 고사하고 어린애들이 학교에 가서 그 반의 친구들과 어울리는데도 아버지의 직업을 따지고, 직위를 따지고, 아파트의 평수를 따지며 사귄다고 합니다. 각박한 세상입니다.

그런데 참된 친구는 그것을 초월해야 합니다. 인생의 즐거움은 정중하고 덕망 있는 자들과 사귀고 우정을 나누는 가운데서 맛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친구는 많은 것이 아닙니다. 나와 사귀어 도움이 되고 유익이 있을 때는 사귀지만 그런 것이 없을 때는 멀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리고 친구가 잘 되면 은근히 배가 아파하고 어렵게 되면 은근히 좋아합니다. 사실 이런 사람은 친구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잘 될 때 같이 기뻐하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같이 가슴 아파하는 친구가 많지 못합니다. 그러나 비록 소수라고 해도 이런 친구를 가진 사람은 그 친구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욥의 세 친구는 모두 특별한 언약으로부터 이루어진 가문의 출신 같이 보이며, 그 조상들의 성실하면서도 경건한 교육을 받아 좋은 성과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엘리바스는 에서의 손자인 데만의 후손이며, 빌닷은 아브라함이 그두라의 몸에서 낳은 수아의 후손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소발은 에서의 후손인 스보와 같은 인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약과는 낯선 사람들이었던 그들 가운데서 이처럼 큰 지혜와 경건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후세대에 칸막이 벽이 무너져 하나님의 은총이 이방인들에게도 전파된다는 행복한 전조였습니다. 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거부당했지만 그에게서 나온 후손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물려받았습니다.

보세요. 아마 욥이 재산이 많고 가축업이 잘 되고 훌륭한 자녀들이 울타리가 되고 그의 몸이 건강해서 그 지방 사람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을 때는 욥을 찾아 온 사람도 많았고 존경한다고 경의를 표하는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이 뜻밖에 그 많던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빼앗기고 귀한 자녀를 잃게 되고 그의 건강도 잃게 되어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니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다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형통한 날에는 많은 사람이 친구가 되었으나 어려움을 당하니 다 멀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이 세 친구는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욥을 떠나거나, 버리거나, 배반하지 아니하고 우정을 계속했습니다.

그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그들의 우정을 표시했습니다. 그들은 환난 중에 있는 욥을 친절하게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슬퍼했고 그를 위로했습니다. 그들은 욥이 형통했을 때도, 그를 괴롭히거나 공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욥과의 경건한 대화를 통해서 그들 스스로 심령의 즐거움을 누렸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슬픔을 함께 나누어 가지기 위해서 왔습니다. 기쁨을 함께 나누면 그 기쁨이 배가 되고 슬픔을 함께 나누면 슬픔이 절반으로 줄어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좋은 일이 있을 때 우리가 축하하여 기쁨을 더하게 하고, 슬픈 일이 있을 때 우리가 위로하여 슬픔을 나누는 일을 하게 됩니다.

욥의 세 친구는 그들의 마음이 초상집에 있는 지혜로운 자들이었습니다. 고통 당하는 사람이나 가슴 아파하는 사람, 부모가 안 계시거나 자식이 없어서 외롭게 지내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얼마나 보람되고 요긴한 일인지 모릅니다. 야고보서 1장 27절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했습니다.

더구나 이 귀한 일이 주 안에서 선한 뜻을 가지고 행한다면 반드시 헛되지 아니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마지막 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했습니다.
왜 우리 교회에 계신 분 중에 어려운 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방문하고 위로하고 일을 힘쓰자고 합니까? 어려운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잊을 수 없는 고마움이 되기 때문이며 큰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통 당하는 이들을 돌보는 것은 우리 자신이 은혜를 받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른 사람이 고통 당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우리가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외로운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 이사야에게 명했습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모든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외로운 유배 생활을 경험합니다. 혼자 사는 경우도 있지만 여러 사람과 같이 한 집에 살면서도 여전히 외로울 수가 있습니다. 이 고독은 어떤 특수한 사건의 결과로서 찾아옵니다. 급작스러운 와병, 실직, 배우자의 별세, 친구의 오해, 기댈 곳은 없는데 기대고 싶은 마음이 생김으로 고독을 느낍니다.
고독은 우리 앞에 담처럼 우뚝 솟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위로받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위로를 받는 것도 위로를 하는 것만큼 축복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강한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하지만 때로는 약한 것을 확인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누구나 언젠가는 위로받아야 할 때가 옵니다. 위로받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보살핌이 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생각한 욥의 아내의 말을 기억합니까? “사단이…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7-9).
시련이 닥칠 때 처음 우리가 보이는 반응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거칠고 반항적으로 되기가 쉽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알 수 없어 하며 분노합니다. 이런 때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생각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의로 재난을 만드시거나, 병이 들게 하시거나, 파산하게 하시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서 떠나게 하시거나 그 밖에 해가 되고 아픔이 되는 여러 가지 일이 생기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재난들을 생각할 때 그 모든 책임을 지신 하나님을 우리가 사랑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신다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시는가 하는 것은 아직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가슴 아파하는 사람을 어떻게 위로 할 수 있습니까? 같이 앉아 우는 것을 도와주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스탠리 존스 박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내가 하나만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의 영혼을 발달시킵니다. 힘을 더 키워 주십니다. 우리의 믿음을 더욱 순수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6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아픔, 고통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생을 한숨지으며 살아서는 안됩니다. 한 숨을 노래로 바꿔야 합니다. 슬플 때 울어야 합니다.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길게 우는 것은 위험합니다. 새 인생을 시작할 때가 다가옵니다. 어제의 깊은 사랑을 잊지는 않습니다. 아니 평생 가슴속에 그 기억을 간직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죽음이고, 실망은 실망, 실패는 실패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입니다.
삶을 계속 이어 나가야 할 시간입니다. 잊어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인생 여정에 새로운 경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슬픔에도 위로가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행복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가능한 한 그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인생이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행복은 또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망의 골짜기에서 “왜?”라는 질문을 하지 맙시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도 “왜?”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대답하지 않아도 될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라는 질문 그 자체가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설명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지고 싶은 것입니다. 설사 하나님께서 분명한 대답을 우리에게 들려주신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왜 잃었는가 하는 것을 묻는 대신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가 찾아보기 시작해야 합니다. 아직도 남은 생이 있습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아직도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 있어도 버티어 나간다는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모두 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인생은 계속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겐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습니다. 이사야 61장 3절을 보십시오. “희락의 기름으로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훌륭한 약속입니까? 아니 이 이상으로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재난이 인생의 색깔을 정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색깔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중에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더 오래, 그리고 더 많은 고통을 받은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을 통해서 십계명이 나왔고 위대한 선지자들이 태어났고 예수님이 태어나셨습니다.
이들은 선택받은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께 선택받았다고 해서 고통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고통을 통해서 위대해 질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지는 않지만 난관을 승리로 바꾸실 수는 있습니다. 시편 119편 67-71절에서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했습니다.
어려운 일일수록 우리에게는 힘이 되고 지혜가 됨을 자신에게 상기시켜야 합니다. 고난을 이기고 곤란을 극복할 때 우리는 성장합니다.
우주의 광대 무변함이 우리에게 뚜렷해질 때는 낮이 아니라 밤입니다. 믿음이 가장 커지고 용감해지는 것도, 경이로움이 점점 더해 가는 것도 어두움 속에서입니다. 비극은 물건이 깨진 것이 아니라, 다시 수리할 수 없는 것이 비극입니다. 비극은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고통은 정말 힘들고 참을 수가 없습니다. 얼마전, 친구들과 같이 등산을 갔다가 실족해여 그만 추락해서 세상을 떠나게 된, 22살 외아들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아버지에게 “제가 선생님의 입장이라면 아마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고 말하자 그는 “그 말씀이 제게 제일 위로가 됩니다” 했습니다.
우리는 무쇠나 돌이 아니라, 감정과 약점이 있고 상처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시인해야 합니다. 반면에 힘과 강점도 있습니다. 우리 앞에 닥친 어려움을 견디지 못해 몸부림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참아낼 수 있는 힘도 있습니다. 고난이 닥칠 때 나 혼자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혼자가 아닙니다.

욥에게 세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자진해서 왔습니다. “초상집에는 불청객이라도 찾아가는 것이 좋다”고 칼라일이 말했습니다. 그들은 “상약”(相約)했습니다. 선한 일을 위해 서로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욥을 볼 때 “소리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일 칠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 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말없이 앉아만 있어도 위로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욥은 큰 곤란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이 찾아온 것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 위로하는 생활을 합시다. 그리고 내게 임한 어려움을 통해서 내 심령이 더 깊은 은혜의 자리, 더욱 성장하는 자리에 나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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