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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크신 사랑 (욥 33: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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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욥기 33장도 지난 시간에 이어 욥의 친구 엘리후의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욥의 세 친구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 시간에 생각하게 될 33장은 욥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엘리후는 여기서 욥을 설득하기 위해서 몇 가지 주장을 하는데 이것을 욥이 참고 들어 줄 것을 부탁하는 말일 뿐만 아니라 자기가 하는 말은 욥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욥에게 유익을 줄 말이니만큼 호의를 가지고 받아들여 줄 것을 당부하는 말입니다.

엘리후는 욥의 다른 세 친구처럼 욥을 정죄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욥이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며 나의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무슨 이야기든지 전부를 다 듣지 아니하고는 그 이야기를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엘리후는 욥과 그 세 친구들이 주고받는 말을 잘 듣고 있다가 오랜 침묵 뒤에 신중히 그리고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그의 입을 열었습니다.”

3절은 “내 말이 내 마음의 정직함을 나타내는 것이며 내 신념과 소감의 진정한 소산입니다”하는 뜻입니다. 물론 우리 짐작입니다만, 욥의 세 친구가 그들의 이론을 세우기 위하여, 욥을 악한 사람으로 말하고 욥이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것은 욥이 죄를 지어 그 죄의 대가로 받는 벌이라고 했지만 그들의 양심 밑바닥에서는 욥이 그토록 악한 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속으로는 좋게 생각하면서도 어떤 이권을 위해서 혀로 그 사람을 비난한다는 것은 야비한 것입니다. 엘리후는 정직한 사람으로서 그런 사람들을 경멸했습니다.

더구나 엘리후가 하는 말은 평이하고 쉬운 말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거나 의미가 애매 모호한 것이 없었습니다. “내 입술이 아는 바를 진실히 말하리라.” 욥은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일에 있어서도 가능한 한 쉽게 분명하고 간결하게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들이 말하고 있는 바를 우리 스스로가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낼 것이며 우리가 정직하게 말하며 우리의 뜻을 바로 전달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역자들에게 ‘말씀 선포’에 대한 것을 이야기 할 때마다 이것을 강조합니다. 말씀 선포는 될 수 있는 대로 쉽게, 알아듣기 어렵지 않게 해야 합니다.
지금 영국의 왕실의 설교자로 있으면서 세계 각국에 다니며 성경 강해를 하고 있는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요 성경학자인 존 스토트가 미국에 있는 풀러신학교에 가서 신학생들에게 설교에 대해서 한 주간 동안 특별 집회를 인도하면서, 설교자를 ‘아버지’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가 몇 가지로 말한 것 중 아버지는 아들에게 단순한(simplicity)말을 한다는 것이 있었습니다. 의학 박사인 아버지가 초등학교 3학년 아들에게 말할 때 병원에서 의사들끼리 사용하는 전문 단어를 씁니까? “아, 내가 의학 박사인데 어떻게 유치하게 초등학교 학생들이 쓰는 말을 쓸 수가 있느냐?”고 하는 그런 아버지가 있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알아듣기 쉬운 말로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힘씁니다만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여기 엘리후는 그의 말 중에서 하나님이 주신 이성과 총명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신과 전능자의 기운으로부터 받은 합리적인 생명력을 최대로 이용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점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부여된 능력에 따라 우리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하나는 우연히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고 각자가 나름대로의 사명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는 것이 나의 생명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기대와 소원에 맞게 살아 가는 것인가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는 존재가 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세상에 헛되이 왔다”거나 “나는 하나님의 실패작”이라는 말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6절 말씀을 보세요. “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내 위엄으로는 너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권세로는 너를 누르지 못하느니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흙으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너나 나나 하나님 앞에서는 일반입니다. 세상에서는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공부한 사람과 공부 못한 사람, 돈 많은 사람과 돈 없는 사람, 명예 있는 사람과 명예 없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과 권력 없는 사람, 힘 센 사람과 약한 사람, 흰 사람과 검은 사람 구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일반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흙으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인간을 질그릇에 비유했습니다. 쇠그릇이 아니고 질그릇입니다. 약하고 천한 것을 의미합니다. 질그릇은 한 번 치면 깨어집니다. 사람은 모두가 약합니다. 깨지기를 잘 합니다. 병들어 깨집니다. 시험에 들어 깨집니다. 우리 가운데 나는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경고합니다. “스스로 섰다고 장담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진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소.” 우리가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흙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도 우리와 같은 사람을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가장 큰 영광은 무엇입니까?
질그릇과 같은 우리가 보배(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육신으로 말하면 다른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성(理性)이 있어서 새 것을 만들어 냅니다. 도덕성이 있어서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영혼이 있는 증거입니다.

12절 하반절에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11장 33절 이하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니라.”
이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신비로운 주권에 대해서 말씀한 것입니다. 구원의 섭리에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이 결코 추측도 못할 깊은 면에서 경영하십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근본이요, 방법이요 또한 목적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이 한정된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 개인도 그렇고 한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요셉을 보세요. 그의 일생을 누가 예측했습니까? 하나님이 작은 데서 큰 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때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갈 것을 생각했었을까요? 그가 애굽에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될 것을 생각했었을까요?
우리가 당하는 일을 우리는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부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안타깝고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십니다. 살아서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너무너무 크시고 우수하고 비할 수도 없이 놀랍게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는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2-5).

모든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속에서 지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신비의 골자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이성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성을 최대한 사용하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의무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전지 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과 같은 존재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그대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이유와 방법을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면서도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섭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 크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을 일일이 말씀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13절에 “하나님은 모든 행하시는 것을 스스로 진술치 아니하시나니 네가 하나님과 변쟁함은 어찜이뇨”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하시는 일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어야만 할 의무가 있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왜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고 합니까? 하나님께 불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쟁변하며 하나님을 반박하고 비난하며 하나님을 상대로 고소를 제기합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합니까? 그 크신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쟁변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로마서 9장 20절 이하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 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일에 대하여 그 이유를 우리에게 밝혀야 할 의무를 지니지 있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그가 행하시기로 계획하신 것을 우리에게 고할 의무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일 처리를 꼭 합리화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 인간의 요구나 탐구심을 반드시 충족시켜야 하는 것도 아니십니다.
만일 우리 인간이 그것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의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당신은 무엇을 행하는 것입니까? 왜 그렇게 하십니까?”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14절 말씀을 보십시다. “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신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반목이 생겨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기뻐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표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수가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잊어버리는 법이 없으십니다. 한 번 경고를 발해도 무시되면 또 다른 경고를 내리십니다. 그 이유는 아무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들의 양심을 통하여 어떻게 가르치시며 훈계하시는지를 엘리후가 말해 줍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서 보여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꾸는 모든 꿈이 하나님의 지시는 아니지만 필요할 때는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민수기 12장 6절에 보면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20장 3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해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했을 때 밤에 아비멜렉에게 하나님이 현몽하여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인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면했습니다. 창세기 31장 24절에 보면 하나님이 라반의 꿈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20절에 보면 요셉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왕과 느브갓네살에게 나중에 일어날 일을 말씀하신 것도 이런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대리자인 양심을 일깨워서 그 직분을 수행하고자 하실 때는, 사람이 깊이 잠들었을 때의 꿈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혹은 아주 한적하고 조용한 때를 이용하시기도 하십니다. 엘리야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은 지진 가운데도 불 가운데도 바람 가운데도 계시지 아니하시고 이 모든 것이 다 지나간 후에 아주 세미한 음성으로, 정신을 바싹 차리지 아니하면 들을 수 없을 정도의 음성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15-16절 말씀대로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의 이상 중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십니다. 왜요? 그 이유를 17절에 말씀했어요.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인간의 꾀를 버리게 하시고 교만을 막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죄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교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범죄했습니까? 하나님처럼 된다니까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교만 때문에 범한 죄였습니다. 인간이 왜 바벨탑을 쌓았습니까?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에게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이것이 내가 지은 대바벨론이 아니냐?”고 교만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짐승처럼 살다가 죽었습니다. 헤롯 왕은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가로채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충이 먹어 죽었습니다. 사울 왕도 교만해서 망했고 히스기야 왕도 마음이 교만했다고 말했습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대개가 교만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듭나 새사람이 될 때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을 범죄의 결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의 혼으로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인간이 멸망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그들 자신의 양심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그들이 죄악의 길로 행할 때 그들 마음속에 솟아나는 죄에 대한 가책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생각지 못하고 그것을 자기들의 마음이 우울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그들이 모두 잘못 이해했다고 설명합니다. 그가 내세우는 이유는 하나님이 육체적 고통을 주시기는 하나 그것은 사랑으로 주시는 것이어서 결국은 영혼을 유익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계획에 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엘리후의 이 말씀은 병중에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며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병중에, 병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인류 역사를 통해 보면 극심한 병중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구원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도 그와 같은 체험을 하신 분이 계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서는 고통이 극도에 달한 환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19절 이하를 보세요. “혹시는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 그의 마음은 식물을 싫어하고 그의 혼은 별미를 싫어하며 그의 살은 파리하여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던 뼈가 드러나서 그의 혼이 구덩이에, 그의 생명이 멸하는 자에게 가까워지느니라” 했습니다.
그 고통은 너무 심해서 그는 평안함을 얻을 수 없고, 침대 위에 누워도 안락이 없습니다. 솜털로 된 부드러운 이불이 가시 이불로 변하고 저녁부터 새벽까지 단숨에 편히 자던 잠도 이제는 날이 샐 때까지 고통 속에서 몸을 비틀며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 아픔은 살이 아픈 것이 아니라 뼈를 깎는 아픔이었습니다. 어느 한 부분만이 아픈 것이 아니라 온몸 지체 중에 아프지 않은 데가 한 곳도 없습니다.

그는 껍질과 뼈만 앙상하여 완전히 해골처럼 되었습니다. 그의 갈비뼈를 셀 수 있게 되었습니다. 블랙 모어 경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에는 그처럼 아름답던 풍모에 무엇이든 마음대로 행하며 위풍 당당하던 사람이 야윈 뺨에 해골처럼 패인 눈이 되도록 심하게 변하며 친구들이 놀라는구나. 전에는 도톰한 살 속에 숨겨졌던 뼈들이 살갗 위로 불뚝불뚝 튀어 나왔구나!”
그는 죽은 자라고 포기되었고, 살 가망이 없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의 혼은 구덩이에 가까워졌느니라.” 사망의 줄이 그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 만일 일천 천사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해석자로 함께 있어.” 하나님은 두 번씩 말씀하십니다. 죄인들을 각성시키고 개심할 방법을 시험해 보십니다.
우리 몸의 고통은 영혼을 구원하는 치료 수단 가운데 하나입니다. 육신의 질병은 하나님의 자비스러운 손길에 의해서 유익하게 사용이 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히 12:6)고 성경에 말씀하셨습니다.
욥은 자기의 질병에 대하여 많은 불평을 하였습니다. 자기가 질병으로 인해서 고통 당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은 자기에게 노여워하고 계신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을 내렸었습니다. 그의 친구들 역시 그런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 정당히 행할 것을 보일진대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사 이르시기를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23-24절). 그렇습니다. 이런 어려운 자리에서라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사 은혜 가운데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이 평안을 되찾습니다. 어려울 때 기도를 배우고 그 기도가 열납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위로를 얻습니다. 마음의 복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 세상의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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