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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는 대장부가 되라 (욥 38: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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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우리는 욥이 당한 어려움과 그의 세 친구의 방문 그리고 그들이 욥에게 한 말이 위로가 아니라 오히려 마음에 상처를 주어 욥과 변론을 일으키게 했고, 나중에 엘리후가 나타나서 욥에게 많은 위로와 격려의 말을 했으나 역시 만족할 만한 해답을 주지 못했었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오랜 변론이 있었지만 시원한 해답이 없었습니다.

대개의 토론에서 누가 마지막 결론을 내릴 것인가 하는 것이 쟁점이 됩니다. 이 논쟁에서 욥의 친구들은 순순히 그것을 욥에게 양보했고 그리고 나서 욥은 엘리후에게 사양했습니다.
법정에서는 온갖 논쟁과 변론의 공방이 있은 후에는 재판석의 판사가 최종 판결을 내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기에 등장하셨고 따라서 모든 논쟁에서 마지막 판결의 말씀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세상 법정에서는 마음에 안 드는 판결이 날 때는 다시 상소도 합니다만 하나님의 결론이나 판결에는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욥은 종종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사건을 처리해 주셔야 할 것과 자기가 왕자처럼 하나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것을 담대하게 말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좌에 좌정하실 때 욥은 사실상 자기를 변호하여 할 말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능자와 다투는 일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도 가끔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욥기 11장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기를 원하노라” 했습니다.

이제 오랜 고통과 시련, 회의와 방황 속에 헤매던 욥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욥은 친구 엘리후의 명쾌하고도 친근한 변론으로 인해서 다소 겸비해졌다가 다시 더 겸손해져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제 어느 집사님과 말씀을 나누는 중에 이런 간증을 들었습니다. “제가 군에서 사관학교를 나오고 군복무를 하는 중에 모든 일이 너무 잘 되었었습니다. 진급을 할 때는 제 동기 중에서는 제 1호로 진급이 되어서 언제나 최소 연령자로 진급했고 상관들에게 총애를 받아 제각기 저를 데려 가려고 애를 썼을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도미 유학이란 게 하늘의 별 따기였는데 시험을 치면 1등으로 합격해서 제일 먼저 가고 싶은 때 갔고 이렇게 해서 미국 유학도 군에 있으면서 두 번씩 다녀왔습니다. 제 앞은 탄탄대로였습니다.
월남에 파견된 주월 한국군 총사령관은 그 부대로 저를 데려 가려고 교섭이 왔고 이곳 육군참모 총장은 나를 그 부대에 머물러 있게 하려고 애를 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기치 않은 일이 생겨 쿠데타 음모에 몰려 겪은 1년 반 동안의 고생한 육신적, 정신적, 타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 동안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게 되었고, 그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그 어려움을 당하기 전에는 세상에서 무서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높아 보이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교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만을 꺾기 위해서 저를 고통의 도가니로 몰아 넣으셨습니다. 거기서 저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세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던 모든 것이 얼마나 일방적이었던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이란 그런 게 아닌 것을 알았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고마워요.”

그렇습니다. 겸손해져야, 낮아져야, 부드러워져야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들을 수가 있습니다. 교만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크신 하나님께서 이 이야기 속에서 계획하시는 것은 욥으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며, 욥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취하신 조처에 대해 표현한 그의 과격하고도 점잖지 못한 말에 대해서 회개하도록 하고 또 그것을 취소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1절에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했습니다. 누가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 이름이 신비롭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앞으로도 계실 분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불타는 떨기나무 사이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했습니다.
더구나 그 이름이 은혜롭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시고는 그 약속을 어기지 않으신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말씀하여 가라사대.” 원문 성경의 뜻은 “대답하여 가라사대”입니다. 욥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일종의 응답입니다. 하나님이 조금이라도 사람에게 말씀하실 때는 거기에 자비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인간을 타락한 천사들처럼 대하셔서 영원히 침묵을 지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아뢸 때 하나님께서 잠잠히 계시다면 이것은 가장 힘든 시련이요 고통입니다.

시편 28편 1절 말씀을 한 번 찾아보세요.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하나님은 사울이 교만하여 범죄할 때 사울에게 더 이상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삼상 28:1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응답하신다는 것은 특별하신 자비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이 욥의 말에 응답하고 그 다음에 엘리후가 응답했지만 아무런 결실도 얻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응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했습니다. 다윗도 시편 85편 8절에 “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했습니다.

그런데 바람에 따라 주어진 하나님의 응답은 욥이 기대했던 종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변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욥을 가르치시고 겸손케 하기 위해 응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과 비교할 때 욥이 얼마나 무지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를 밝힘으로써 불평과 의문을 품는 것이 죄악이 된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자연 속에 일어나는 가장 평범한 일까지도 욥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그가 조물주의 일을 판단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자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간의 두뇌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책입니다. 그러므로 고전문학이나 현대문학을 총망라한다고 하더라도 성경을 따를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칼라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욥기는 펜으로 쓰여진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 중에 하나이고, 성경 안에서든 밖에서든 그 어떤 작품도 이것과 동등한 문학적 진가를 지니고 있는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욥입니다. 아니, 모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거나 아니면 최소한 이해하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사울의 동료들은 강한 빛을 보기는 했으나 주님께서 사울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소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음성만 들었습니다. 천둥소리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예수님에게 다가왔을 때 주님은 이해했지만 같이 있던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하는 말씀이 종종 나오는데,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디서 말씀하셨어요? “폭풍 가운데로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폭풍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장소로 사용하시고 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검은 구름이 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폭풍이 이와 같은 목적에 의해 사용되게 하신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도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신 줄 믿습니다. 출애굽기 19장 16절 이하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기슭에 섰더니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했습니다.

모든 자연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고 그의 부르심을 늘 기다리고 있습니다. 폭풍은 심판의 상징이요 전능의 표현입니다. 오순절 때 성령께서는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폭풍소리)를 내며 내려 오셨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모습을 바람과 우박,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와 관련지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심판자께서 오실 때에도 구름과 불과 폭풍우를 동반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폭풍은 말씀하신 분의 위엄과 말씀의 중대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욥을 깨우쳐 주고 겸손하게 만들려는 목적에 도움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폭풍은 하나님의 책망을 동반할 때,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실 때 적절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을 때와 비교가 되고 대조가 된다고 생각됩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아합 왕은 왕후 이세벨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이스라엘에 외국으로부터 바알신과 아세라 신을 수입해 와서 우상을 섬기는 백성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사이처럼 우리나라 같이 신앙의 자유가 보장이 된 나라에서도 대통령이 무슨 종교를 가지느냐 하는 데 따라서 그 영향이 얼마나 큽니까? 한 부대의 지휘관의 종교가 얼마나 그 부대에 영향을 미칩니까? 하물며 절대권을 가진 임금이 미치는 종교적인 영향이야 이루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합 왕이 바알과 아세라신을 섬기게 되니 온 백성이 따르게 되었고, 그 선지자들의 세도는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영적으로 완전히 타락하게 되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아합 왕을 만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왕상 17:1).

그 후 사실 이스라엘 땅에는 비가 한 방울 내리지 않았고 이슬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3년 반 동안이나 그렇게 되니 이스라엘 온 땅은 아예 말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비가 별로 오지 않는 땅에 3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으니 그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합 왕은 이렇게 된 것이 자기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아니하고 엘리야가 저주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이를 갈며 분하게 여기며 엘리야를 찾고 있었습니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너는 아합에게 보이라” 해서 사마리아 동네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오바댜를 만나 아합 왕이 엘리야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듣고 가다가 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엘리야를 만나자 아합이 소리를 지르며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하자, 그때 엘리야가 대답하기를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그런즉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 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인을 갈멜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와 우상 숭배하는 선지자들과 대결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450대1의 대결이었지만 참신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승리하여 우상 숭배자를 한칼에 잘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이세벨이 사람을 보내서 엘리야에게 협박을 가했습니다. “너도 내일 이맘때 네가 죽인 사람들 중에 하나 같이 목이 달아날 줄 알라.” 이 협박을 받은 엘리야는 겁이 나서 도망했습니다. 이것 보세요. 그 무서운 왕 앞에서도 겁내지 않고, 450명의 우상 섬기는 선지자들과도 홀몸으로 대결하던 하나님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더구나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셔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했는데도 약해졌습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광야로 피신했습니다. 죽기를 소원했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엘리야더러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시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시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에서 엘리야에게 새 용기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엘리야야 너만 혼자 남은 것이 아니라 아직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이 이스라엘 가운데 7천인이 남아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사명을 맡겨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낙심된 자에게 새 소망을 주며, 약한 자에게 새 힘을 주며, 의심하는 사람에게 확신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3절 말씀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했습니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으라.” 하나님의 사람이 언제나 강한 것은 아닙니다. 여호수아를 보세요.
이스라엘 열두 지파 대표들이 가나안 땅에 미리 들어가 보고 돌아와서 보고하던 때의 일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열 두 사람 중에 열 사람은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실망을 안겨 주었고 혼란을 가져왔는지 모릅니다. 그런 때 여호수아는 저희 겨레에게 힘을 주고 소망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허락하신 새 땅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모세가 세상을 떠나고 이 민족을 인도하는 중책을 지게 되니 마음에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향해 주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향하여 아니 믿는 우리를 향해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강하고 담대하라. 강하고 담대하라” 하십니다. 어떻게 강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사람은 담대하게 삽니다.
사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민족을 영도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점령해야 하는 큰 책임을 지고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강하고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믿고 사는 사람은 대장부가 됩니다.

여호수아가 아말렉 군대와 싸울 때 모세는 나이가 많아 직접 나가 싸우지는 못하고 산 위에서 여호수아의 군대를 위하여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스라엘 군대가 이기고 피곤해서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우세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함께 해야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숫자적으로 말하면 아말렉에 비해서 열세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아말렉을 이겼습니다.

소년 다윗이 어떻게 블레셋의 백전노장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습니까? 그의 무기 덕분이었습니까? 그의 전술 때문이었습니까? 그의 키 때문이었습니까? 다윗의 말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승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합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시인도 “하나님이 지켜 주시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라”고 했습니다.

전쟁의 승리는 언제나 하나님 편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군대도 하나님 편에 있어야 강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했습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라는 책에는 제정 러시아 군대와 불란서 나폴레옹 군대가 싸울 때 이런 말이 나옵니다. “전쟁에 이기는 것은 훌륭한 무기를 가진 것에 있지 아니합니다. 군인의 마음의 자세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우리를 강하게 하고 담대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고통 속에서 지쳐 있는 욥에게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으라”고 했습니까? 어떤 어려움에 부딪쳐도 강하고 담대하게 대장부처럼 되어야 그것을 극복해 나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욥기 38장에서는 하나님이 이 우주 만물을 어떻게 창조하시고 지금도 주관하고 계신가를 말씀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염려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승리할 것을 당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어려운 일이 부닥친다고 하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고 대장부답게 삽시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맘의 걱정 버리고 담대하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되시기를, 그래서 허락하신 새 땅을 차지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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