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망의 골짜기에 메아리치는 노래 (시 23:1)

첨부 1


인류 역사는 고대 그리스의 호머와 사포로부터, 중세시대의 단테와 보카치오, 근대로 넘어와 밀턴과 괴테, 중국의 이태백과 두보, 그리고 우리의 소월과 서정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위대한 시인들을 배출했고, 그들 덕분에 우리는 주옥같은 시편들을 접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암송되고 사랑을 받은 시는 다윗이 지은 이 시편 23편일 것입니다. 그만큼 이 시가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가져다주었다는 말이겠지요. 슬픔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이 시를 암송하면서 믿음을 회복하고 의심과 두려움을 극복했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이 시를 암송하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마음속에 기쁨이 잔잔히 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는 푸른 풀밭 맑은 시냇가에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

이 시는 하나님을 목자로, 자신을 양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양 이야기를 하면서 뉴질랜드를 빼놓는다면 뉴질랜드가 상당히 섭섭해하겠지요? 가는 곳마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사방 천지에 양만 널려 있는 곳이 뉴질랜드니까요. 차를 타고 길 옆에 펼쳐진 목장을 지나면서 보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양들의 모습이 참 평화스럽게 보입니다. 그 양들은 도대체 걱정 근심이 없을 것 같아요. 먹을 것 얼마든지 있겠다, 사자나 이리 같은 사나운 짐승들이 쫓아올 염려도 없겠다, 도대체 무슨 걱정이 있겠어요? 주인이나 목동이 양들의 복지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뉴질랜드에서 체감하는 목자의 개념은 우리가 이 시를 읽을 때의 목자개념과 아주 다를 것입니다.

우선 팔레스타인의 땅은 뉴질랜드처럼 비옥한 초원이 아니라 척박한 광야입니다. 그래서 양들이 먹을 풀이 많지 않아요. 뉴질랜드의 양들은 아무 데서나 입만 땅에 대면 먹을 풀이 있지만, 팔레스타인의 양들은 온종일 먹을 풀을 찾아서 헤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시를 읽으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양의 모습은 한가롭게 풀을 뜯는 양이 아니라 힘들게 풀을 찾아다녀야 하는 피곤한 양의 모습입니다.

또 광야에는 물이 많지 않습니다. 제가 아프리카에 있으면서 보니까 물은 곧 생명을 의미합니다. 비가 오지 않는 건기에는 온 땅이 메마른 황무지로 변해요. 분위기가 삭막하고 도대체 생명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우기가 되어 비가 오면 대지에 생명이 소생합니다. 온 땅이 초록으로 뒤덮이면서 생명이 되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물들은 물을 찾아 수백km에 이르는 대이동을 연례행사로 치르게 되지요.

그런 척박한 땅에서 양들이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고달픈 삶의 연속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나마 그들의 삶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맹수들의 위협입니다. 언제 이리의 습격을 받을지 항상 불안 속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양들의 처지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목자입니다. 양들보다 아이큐가 높고 지식과 경험이 많은 목자는 양들을 풀과 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고 사나운 짐승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목자가 있으면 양들은 안심하고 걱정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목자가 필요한 이유

오랜 목자생활을 해 보았던 다윗은 자신의 삶이 위험과 고난에 노출되어 있는 양들의 삶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울왕의 시기와 광기 때문에 다윗은 피곤하고 고달픈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치다가 잠적했던 이근안 경감이 11년의 도피행각을 끝내고 얼마 전에 자수를 했습니다. 숨어 지내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자수를 했다는 겁니다. 차라리 붙잡혀 감옥에 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을 한 것이지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창원, 현대판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경찰을 우롱하고 신출귀몰한 도피행각으로 전설 속의 인물이 될 뻔했던 신창원도 붙잡힌 후에 하는 말은 도망 다니는 것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다는 거예요.

제3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붙잡히지 않고 도망 다니는 사람이 대단하게 보이고 쫓는 사람은 우롱을 당하는 것처럼 느낄지 모르지만, 정작 도망 다니는 사람은 순간 순간이 피를 말리는 긴장과 고통의 연속입니다. 다윗의 삶이 바로 그런 것이었단 말입니다. 사울의 창이 다윗의 몸을 꿰뚫고 벽에 박힐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원수 블레셋 사람 백명을 죽이고 오면 자기 딸을 주겠다고 한 제안은 물론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 죽게 하려는 음모였지요. 그래도 다윗은 마치 모든 모험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공주와 결혼하는 동화에 나오는 왕자처럼 블레셋 사람 이백명을 죽이고 돌아와 사울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이래저래 다윗을 죽이는 데 실패한 사울은 본격적으로 다윗 사냥에 나섰습니다. 결국 다윗은 적의 나라로 망명을 해야 했습니다. 마치 삼국지에서 관우가 조조에게 몸을 의탁했던 경우와 흡사하군요.

이처럼 다윗의 삶은 매 순간 순간이 위험과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돌이켜 보니 마치 목자가 양을 보호하고 인도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다니던 길은 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였습니다. 그의 주변에서는 늘 그를 죽이려는 음모가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저쪽에서 사나운 이리가 양들을 노려볼지라도 목자의 막대기가 양들을 지키고 있는 한 그들은 무사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양들의 위로와 평안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다윗의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다윗에게 큰 잔치상을 베풀어주시고 머리에 향유까지 부어 가장 귀한 손님으로 맞아주십니다. 그래서 다윗을 쫓던 원수들이 마치 닭을 쫓다가 지붕만 쳐다보는 개 모양,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바라만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원수들의 운명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제는 자기들이 쫓기는 신세가 되겠지요?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궁극적으로 지치고 상한 자기 백성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로운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위로를 얻고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보호와 인도하심에 우리를 맡길 때 우리는 안전하고 평안할 수 있습니다.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곳을 지난다 할지라도 해로움 당할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결코 자기 양들이 해로움을 당하거나 위험에 처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3.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은 늘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만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풀이 없다고 불평하고 물이 없음을 한탄한다면 그것은 무슨 증거입니까? 목자의 인도를 따르지 않고 있거나 그 목자를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은 목자의 보호를 거부하거나 믿지 못한 결과입니다. 우리가 그 목자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그분의 인도하심이 얼마나 선하고 유익한지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상황 속에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체험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셨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사망의 골짜기를 지난 다음 하나님을 원망하고 돌아서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이 그 사망의 골짜기에서 구해주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때로는 너무 힘들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있고, 사업에 실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할 수도 있고, 이리같은 사람들에게 물어뜯기는 억울한 일도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의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여러분을 잊어버리고 멀리 가 계십니까? 아니면 목자의 지팡이를 들고 여러분을 위해 싸우십니까?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혼이 녹아내리는 듯한 절망과 좌절을 맛보았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는 찬양이 가능한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아무리 좋은 잔칫상을 베풀어주셔도 별 감동이 없을 것인데, 살기등등한 원수들의 눈앞에서, 언제 붙잡혀 죽을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서 베푸신 잔칫상이기 때문에 감사와 찬양이 넘치고 있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뉴질랜드의 양들은 목자가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지를 절대로 모를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곳을 지나고 계십니까? 몇 달째 비가 오지 않아 메마를 대로 메마른 삭막한 황무지입니까? 여러분을 삼키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사나운 이리들에게 에워싸여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시는 바로 여러분을 위한 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목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여러분을 맡기십시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좋으신 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노래처럼 '내가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살겠습니다' 하는 고백이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르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 너무나 좋기 때문입니다. 내가 푸른 초장에 있든지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든지, 나의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