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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사 5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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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상상을 훨씬 초월한 상식에 어긋난 사건을 당했을 때 우리는 말합니다. “도대체 이와 같은 일을 누가 믿겠는가!” 예수님의 탄생과 그 생애에 관한 계시를 받았을 때 이사야도 역시 어안이 벙벙하여 탄식을 했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어 주겠는가!”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의 탄생은 처음부터 너무나 비극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사야는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마른 땅에서 난 연한 순 같고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세상적으로 볼 때 흠모할만한 아름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마른 땅 같은 빈민촌 나사렛의 가난한 집 처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연약한 어린 아기로 태어났기 때문에 융성한 집안이나 고관대작의 집에서 태어난 아기들처럼 많은 사람들의 찬양을 받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슬프도록 보통 아기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싫어버림을 받았다” 정말로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이나 바리새인, 사두개인, 교법사, 사회지도층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의 삶은 풍찬노숙(風餐露宿)을 하고 간난신고(艱難辛苦)를 많이 겪었으며 인간의 질고 때문에 마음이 늘 아팠습니다. 제2위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이처럼 푸대접을 받으실 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 옛날 선지자 이사야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 것처럼 오늘 우리도 이 소식을 전할 때 당치 않는 말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오시기 약 700년 전에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당할 고난을 소상하게 환상으로 보고 오늘날 신문기자가 사건을 보도하듯이 이사야 53장에 그 사건을 잘 묘사 하고 있습니다.

1.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이사야 53장 3절로 4절에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의 3분의 2를 병 고치는데 보내셨습니다. 주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하시고 바로 하신 일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전파 사역과 치료 사역은 절대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로 24절에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이 곧 치료 사역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파하신 하늘나라는 치료의 나라입니다. 오늘날도 복음을 증거할 때 치료를 반드시 전해야 되는 것은 천국의 기초가 치료에 있기 때문입니다. 12제자와 70인의 제자 그리고 후에 모든 믿는 자에게 주님은 병자를 고치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에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고 말했습니다.
나가서 복음 증거할 때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요소 중에 치료는 반드시 함께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죄사함을 받으라는 것과 예수 믿고 병 고침을 받으라는 것은 손의 등과 안쪽과 같습니다.
주님은 마음속에 큰 부담을 가지고 병든 자를 보면 견딜 수 없는 슬픔을 느꼈습니다. 병든 자와 같은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병의 고통에 동참하셨습니다. 어찌하든지 병든 자를 고치려고 애를 쓰신 것입니다. 성경에 ‘민망히 여기다’라는 말의 뜻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민망히 여기사’ 또는 ‘불쌍히 여기사’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 열두번 나오는데 그중에 여덟 번이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했습니다. 다섯 번은 병자와 죽은 자를 보셨을 때 세 번은 굶주려 고통 받거나 목자 없는 양같이 방황하는 백성들을 보셨을 때 느끼신 감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병들어 고생하는 사람을 볼 때 마음에 깊은 슬픔을 느꼈습니다. 주님은 굶주려 고통 받거나 목자 없는 양같이 방황하는 백성들을 보고도 마음에 깊은 슬픔을 느낀 것입니다. 주님은 방관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철학이나 종교를 가르치는 선생이 아닙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그처럼 고통을 당하시고 마음에 번민을 하시고 우리의 병을 결국에는 채찍에 맞으시므로 청산하셨으니 예수님의 그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우리는 병을 이겨야 되고 병을 내어 쫓아야 되고 병 고침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이름으로 병 고침 받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병을 단호하게 물리쳐야 되는 것입니다. 병은 불법입니다. 병은 나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낫게 되어 있습니다. 법적으로는 2000년 전부터 이미 고침을 받았습니다.
순복음가족신문 2004년 5월 8일에 실린 은평대교구 송문근 권사님의 간증을 읽고 크게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권사님은 2003년 5월경 갑자기 눈에 띌 정도로 살이 빠지는 바람에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검사결과 간암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의사는 암이 폐까지 전이 되어 이제 가망이 없으니 집에 가라고 했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항암치료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권사님은 암으로 인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때 가족들이 3일 작정기도회를 가졌고 교구에서 합심하여 21일 동안 다니엘 기도회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권사님은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채찍에 맞아 등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피를 흘리는 모습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주님께서 저렇게 고난당하면서 ‘내 병을 대신 짊어지셨으니 병나는 것은 주의 뜻이 아니다. 이것은 마귀가 가져온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예수 이름으로 거듭거듭 마귀를 쫓았습니다. “너 암의 원수귀신아 물러가라!” 그리고 제게 왔습니다. 제가 간절히 안수하며 기도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집에 돌아가는데 신기하게 권사님의 고통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기침도 그치고 각혈도 그치고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고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해 12월에 병원에 가서 재검사를 받았는데 의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했습니다. “혹시 우리 병원말고 다른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셨나요? 아니면 지금 다른 약 드시는 것이 있습니까?” 그래서 권사님이 아니라고 대답했더니 의사는 촬영한 사진을 보여 주면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사진을 보니 처음 찍은 사진에는 명확하게 암이 간과 폐에 전이되어 있었는데 두 번째 찍은 사진에는 간과 폐에 암의 흔적이 없었습니다. 깨끗이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등이 갈기갈기 찢어진 것은 우리의 모든 변고를 대신 짊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고 기도하면 오늘날도 예수님은 기쁘게 그 손을 내밀어 안수하고 치료해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고난 주간에 이사야가 예언으로 말한 것 처음이 저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질병을 지고 슬픔을 주님께서 대신 당했습니다. 그 대가는 뭡니까? 치료와 건강이 그 대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치료 받아야만 됩니다. 우리는 건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이 당하신 고통에 대한 응답이 되고 보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병에서 고침 받는 것이 주님의 완전한 뜻이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말고 믿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예수님의 양손과 양발에는 대못이 박혔고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워졌습니다. 우리는 손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발로 얼마나 죄를 많이 짓고 생각으로 얼마나 죄를 많이 짓습니까? 허물투성이입니다. 이 세상에 허물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털어서 옷에서 먼지 안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허물진 인생 그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절대로 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일을 하고 착한 일을 하고 고행을 한다 해도 허물없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까? 세상 자체가 죄악의 수렁인데 죄의 허물을 짓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현실의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외적 육체의 찔림은 우리 육체로 지은 허물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했으며 13장 12절에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손과 발에 흘리신 그 피로 우리의 일생에 허물을 다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일생의 허물을 주님이 다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실 때 우리 허물을 영원히 청산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적인 심령의 상함은 우리 범죄 때문인 것입니다. 바깥의 상처는 눈에 보이지만 속 상처는 눈에 안보입니다.
시편 22편 14절에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은 우리가 곁에서 보는 그런 정도가 아닌 것입니다. 인간을 지으신 책임, 인간에 대한 끊지 못할 사랑 때문에 주님이 이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고통을 짊어진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천방지축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그 아들 예수께 덮어 씌워서 대신 심판을 베풀고 그 흘리신 피로 우리를 용서하고 의롭다하고 우리를 다시 구원하셨습니다.
시편 103편 13절에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끊을려고 해도 끊어지지 않는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가 고민하시고 독생자를 보내 주시고 예수님께서 기어코 우리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신 것입니다.
가시고기라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한때 가시고기라는 책이 출간되어서 나왔지 않습니까? 이 가시고기는 산란 때가 되면 수컷이 정성을 다해 수초 속에 자리를 마련하고 암컷은 알만 낳고 난 다음 도망을 치고 돌아오지 않습니다. 수컷이 그 알을 보호하기 위해서 밤낮을 자지 않고 있습니다. 다른 물고기가 와서 알을 먹을까 싶어서 그 알을 지키면서 계속해서 지느러미를 놀려서 신선한 산소가 꽉들어찬 물을 공급시킵니다. 먹지도 아니하고 자지도 아니하고 쉬지도 아니하고 알을 지키고 알에게 신선한 산소를 공급하려고 애를 쓰다가 나중에 알이 부화되어 나오면 수컷은 지쳐서 죽어 버립니다. 그러면 새끼들이 전부 그 아버지된 수컷의 몸에 붙어서 그 살을 뜯어 먹고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시고기입니다. 가시고기의 부성애는 놀랄만합니다. 자기의 목숨을 바쳐서 새끼를 부화시키고 새끼를 자라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주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 이상의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의 고통에 동참하신 것은 하나님의 그 끈질긴 사랑 때문입니다.
가시고기라는 민물고기도 자기의 새끼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위해서 그 아들 예수님의 목숨을 버리게 하신 것입니다.

3.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징계란 잘못에 대한 대가로 고난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회사에서 징계를 받으면 월급이 깎이든지 직급이 낮아지든지 쫓겨나든지 하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징계를 받습니다. 예수님의 33년 동안의 지상 삶이란 인간을 위한 징계의 삶입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좇아 천지를 직접 지으신 이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인간으로 세상에 오시고 인간으로써 이 세상에 33년 동안 사셨다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고통이요, 괴로움이요, 슬픔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가 징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징계하심으로 쫓겨난 인생들을 예수님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만든 세상은 저주받은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저주받은 세상을 다 끌어안고 저주를 청산하시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향하신 예수님의 초라한 모습. 그리고 버림받아 십자가에 매달린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초라하게 십자가를 짊어지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침 뱉음을 받고 로마 군인들의 발길에 차이면서 십자가를 끌고 골고다로 올라갑니다. 우리를 위해서 징계를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 벌 받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마가복음 15장 34절에 “제 구 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고통의 극한 시기에는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버림받았으니까 이제 아버지가 아닙니다. 엄한 심판주입니다. 그는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통곡을 하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에 시편 22편 6절에 그 상황을 설명하기를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라고 통탄한 것입니다.
캔버스대학의 해부학 교수인 하워드 매츠키 교수는 십자가형의 고통을 의학적으로 분석해서 이렇게 발표했습니다.
몸의 체중이 두손에 박힌 못에 매달려지기 때문에 살이 찢어지고 많은 피를 쏟으며 통증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가슴으로부터 팔에 이르는 근육들이 극도로 늘어져 팽창하므로 호흡장애를 일으켜서 숨을 쉴수가 없습니다. 여기 근육이 움직여져야 숨을 쉬는데 매달려 있으니 숨을 쉴 수가 없어 산소가 부족하고 온몸에 경련이 일어납니다. 죄수가 이 증세를 조금이라도 완화시키기 위해 몸을 위로 치켜 올리려고 하면 이 때마다 체중이 발등에 꽂힌 못에 실리므로 그 고통은 더 가중됩니다. 그러니 설상가상입니다. 그대로 매달려 있자니 너무나 고통스럽고 손은 찢어지고 근육이 당겨서 숨을 쉴 수가 없고 숨을 쉬자고 발을 치켜 올리니 못박힌 발의 상처가 말할 수 없이 쓰리고 고통스럽습니다. 주님은 이 고통을 6시간 동안 당하셨습니다.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박혀 10시, 11시, 12시 그리고 12시에 주님이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외치신 후 1시, 2시, 3시까지 매달려 계셨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외칠 때까지 6시간 동안 인간으로서 극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저는 한때 기도하다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힌 모습을 본적이 있습니다. 갑자기 너무나 큰 슬픔이 다가와서 제가 엉엉 울었습니다. 울다가 갑자기 환상 가운데 갈보리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의 형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호령을 하고 말이 달리고 창검이 번쩍이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욕을 하고 고함을 쳤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외롭게 매달려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처절해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얼마나 아프셨나. 못박힌 그 손과 발. 죄없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하늘도 모든 땅도 초목들도 다 울고 해 조차 힘을 잃고 온누리 비치잖네. 아 아 끝없어라 주의 사랑 언제나 아 아 영원토록 구원의 강물 넘치네’ 저는 너무나 너무나 감격했습니다. 이 음악소리가 들리면서 예수님이 못박히는데 나는 일단의 무리곁에 서서 막 울었습니다. 거기에 보니까 예수님을 따라온 여자들이 통곡하고 우는데 나도 그 가운데 섞여서 막 눈물을 흘리고 고함을 치고 울다가 환상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받아 적은 것이 복음성가 151장 ‘얼마나 아프셨나’ 이 찬송인 것입니다.
우리가 받을 징계를 대신 받으시며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신 주님이십니다. 사랑이란 뭡니까? 사랑이란 증명되어야 합니다. 사랑이란 체험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징계를 통하여 인간의 반역을 청산하시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화목과 평화를 가져오신 것이니 예수님은 정말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여 버림을 받아야 마땅하고 천번만번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들을 위해서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대신 징계를 받고 모든 죄악을 청산하고 그 보혈로 카페트를 깔아서 하나님 보좌 앞으로 우리가 다 나가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도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2절에도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께 나가면 아버지는 무조건 우리 죄를 청산하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또 두 손을 펼쳐서 우리를 품어주시고 자녀로 삼아 주시고 아버지의 영인 성령을 부어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는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로운 행동이나 고행으로써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2000년 전 팔레스타인의 한 외진 곳에서 로마 총독 빌라도의 심판을 받고 처형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의 참된 의미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성경은 탄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마땅히 형벌 받아 지옥에서 멸망 당해야할 나의 허물과 죄 때문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영영히 하나님과 천국에서 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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