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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성실한 관계 (호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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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까지 불신앙을 단지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기독교가 전파된 지 얼마 되지 않고 믿는 사람들의 수나 사회적인 지위가 보잘 것 없을 때에는 하나님을 믿기 싫은 사람은 교회를 떠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사회가 거의 대부분 기독교화되어서 믿는 사람들이 많고 교회가 대단히 사회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때에는 교회를 떠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버리는 길을 택합니다. 그것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호세아서입니다.

이 당시에는 교회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회 자체가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난다고 하는 것은 완전히 이스라엘 사회를 떠나고 가나안 땅을 떠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교회를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었고 종교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형식으로는 교회를 떠나지 않았지만 그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고 그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것은 결국 하나님을 떠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교회나 교파가 아주 많지만, 이 당시에는 두 개의 교회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북쪽에 있는 이스라엘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남쪽에 있는 유다 교회입니다. 이스라엘 교회는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이름만 하나님의 교회이지 실제로는 완전히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유다 교회도 어느 정도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 있었습니다. 유다 교회도 점점 이스라엘 교회를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생활에 빠져서 많은 다른 남자들의 아이를 가진 여인이 원래 남편의 아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선언하십니다.

호세아서가 오늘 우리 상황에 아주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이 교회 밖에 있는 불신앙이 아니라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불신앙이 교회 밖의 불신앙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은 이것이 교회 자체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하나님의 진리를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이 신앙을 버리는 것은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들어 있는 불신앙은 교회 전체를 변질시켜버리게 됩니다.

1. 이스라엘의 때아닌 부강

호세아는 자기가 예언한 시대를 서두에 밝히고 있습니다. 1절,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호세아는 이스라엘에서 말씀을 전한 선지자이면서 자신의 활동 시기를 유다 왕의 연표(年表)로 나타내고 있는 데, 이것은 이스라엘 여러 왕들에 대한 심한 거부감을 나타냅니다. 호세아의 신앙은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께서 세워야 하며 이들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백성들을 진리로 이끄는 목자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들은 그야말로 세상적인 왕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목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자신의 활동 연표를 유다 왕의 연표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로보암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 때에 북쪽 이스라엘은 참으로 부강한 나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왕하 14:25이하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도말(塗抹)하여 천하에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왕하 14:25-27) 하맛이라고 하면 북쪽 두로와 시돈 훨씬 위의 지역인데 여기서부터 사해까지 영토를 넓힌 것입니다. 이것은 북쪽만 보면 솔로몬 때의 영토를 회복한 것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늘 나라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매인 자도 없었고 놓인 자도 없었습니다. 이 말은 이들이 모두 노예도 아니고 자유민도 아닌 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늘 노예나 마찬가지 상태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다시 나라를 부강하게 해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솔로몬 이후 잃어버렸던 모든 땅을 다시 되찾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약속을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너무나도 어려웠고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들이 이렇게 장기적으로 어렵고 궁핍한 가운데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잘못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늘 이처럼 침체되어 있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생각을 바꾸셨습니다. ‘그들이 늘 가난해서 나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 같은데 이제 한 번 그들을 축복해주자 그러면 힘을 내어서 열심히 나를 섬기고 신앙 생활을 힘차게 하겠지.’라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 선지자를 통하여 축복을 약속하셨고 그 말씀대로 여로보암왕 때 나라는 정말 아주 때아닌 부자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의를 해야 합니다. 참으로 신앙이 있는 사람에게는 물질적인 부강이 그로 하여금 힘을 내게 하고 침체에서 벗어나게 하지만,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게 만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는 그들에게 주어진 물질적인 축복은 그들로 하여금 더 교만하게 만들었고, 죄짓는데 더 담대하게 만들었고,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갑자기 잘 살게 되자 사람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고 자기 욕십을 따라 달려가며 타락해가는 가운데 이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는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하는 모습을 지켜본 비극의 선지자입니다.

선지자의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청중들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진정한 반응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대신 호세아의 설교는 허공에 떠도는 말씀이 되고 말았고, 이스라엘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호세아의 말씀은 살아서 역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결코 호세아의 설교는 죽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오늘 우리들의 불신앙을 예리하게 드러내고 치료하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역사할 것입니다.

2. 호세아에 대한 명령

2절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비로소’라는 말은 의역된 것입니다. 원래 히브리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호세아로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가난하고 힘들어서 제대로 믿지 못하는 줄 알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때아닌 복을 주셨습니다. 그들의 국력을 키워주셨고 그들로 하여금 아주 부강한 나라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기다리셨습니다. 그들이 강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와서 그 앞에 무릎꿇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하나님, 저희들을 부강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동안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제대로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강하게 되었사오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 그 뜻을 이루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나타난 결과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더 바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하나님께 나아갈 시간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더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떠났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겁이 나서 짓지 못하던 죄도 담대하게 지었습니다.

이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큰 혜택을 주는데 교회를 떠납니까? 그러나 그들의 중심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첫번째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놀랍게도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호세아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호세아로 하여금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음란한 아내’가 무엇을 의미하느냐를 두고 해석이 구구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직업적인 창녀를 두고 말한다고 해석하고, 또 어떤 사람은 단지 음란한 성향이 있는 여자라고 해석합니다. 원래 이스라엘 사회는 직업적인 창녀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간음을 행한 여자는 돌로 쳐죽이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음란한 여자를 구한다고 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의 여자들이 음행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처녀를 구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여기서 ‘음란한 아내’라고 하는 것은 결혼하기 전에도 음란한 생활을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호세아와 결혼한 후에도 그 음란한 생활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 더러운 생활을 해 온 여자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로 하여금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음란한 자식’은 누가 아비인지 모르는 사생아를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하게 하시는 이유는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이 나라’라는 말에 매우 심한 경멸의 어감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 언제나 ‘내 나라, 내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나 모세 당시에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을 때 ‘네 백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이 나라가’라고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심한 거부감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행음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앙적으로 행음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원래 ‘행음한다’는 것은 남편이 있는 여자가 남편을 떠나서 다른 남자와 나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행음한다'는 것은 사상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 다른 사상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상적으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상을 붙들었습니다. 그 사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의 행복을 약속해주는 바알신을 여호와와 함께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평지로 되어 있어서 주된 산업이 농사였습니다. 그런데 농사의 신이 바알이었고 바알을 믿으면 농사가 잘 되고 부자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바알신을 믿는 가나안 족속들은 농사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사냐 신앙이냐 하는 갈림길에서 농사를 택했습니다. 그런데 바알신을 섬기는 제사에는 무차별적인 성행위가 뒤따랐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성 행위가 많으면 많을수록 바울이 힘을 내어서 농사를 잘 짓게 해준다고 바알 제사장들이 떠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음행은 정신적인 음행과 함께 육체적인 음행이 추가된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좋아하든지 아니면 싫어합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는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사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좋아하지 않으면 싫어하는 것입니다. 좋지도 않은 사람을 좋아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싫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에는 반드시 뜨거움이 따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인격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머리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머리로 사랑을 느끼지 않습니다. 어떤 여자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논리적으로 유추해본 결과 사랑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면 그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면 마음이 거기에 다 가 있습니다. 마음이 가 있으면 모든 것이 다 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사 농사를 망치더라도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의지하며 자신들의 신앙을 순수하게 지키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를 잘 지어야 되겠다는 욕심이 생기면서 마치 바람난 여자처럼 들뜨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붙잡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아무리 잡아도 바알의 제사지내는데 달려가서 결국은 그들의 제사에 참가하고 더러운 성행위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종교에 유혹을 느끼고 있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들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섰습니다. 이미 그들의 제사에 참여했고 그들의 신에게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성행위까지 해 버렸습니다. 그들이 관심만 가졌다면 하나님도 이런 식으로 관계를 끊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로 하여금 이미 돌아올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여자와 결혼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호세아의 이 불행한 결혼을 보고서 ‘과연 하나님께서 그의 종을 이렇게 불행하게 하실 수 있으며, 그의 가정을 이렇게 파괴시키실 수 있는가?’하는 의문을 가질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교인들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교인들이 없는 선지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극도로 좋지 못한 상태에 빠져 있는데 어떻게 선지자가 행복할 수 있습니까? 자기 혼자 이상적인 가정을 꾸미고 행복하게 살 수 없습니다. 백성들이 범죄할 때 선지자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무서운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백성들과 싸워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아마 호세아의 실패한 결혼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큰 이야기 거리였을 것입니다. 호세아의 설교를 그렇게 싫어하던 사람들도 그의 결혼에 대해서는 입방아 찧기를 좋아했을 것입니다. 마치 요즘 교인들이 자기들이 잘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으면서 어느 목회자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는 것 같다고 생각되면 밤을 새워 가면서 입방아를 찧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호세아의 비극적인 결혼은 바로 자기 자신들의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가 바른 신앙을 떠났을 때 우리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도 한 여성이고 좋은 남편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고 싶은 계획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어느 날 천사가 나타나서 이 백성들을 위하여 너를 사용하겠다고 했을 때 그는 기꺼이 자신의 행복을 버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바른 신앙을 버리고 자기 욕심을 향하여 달려갈 때 평안하게 자기 행복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자기 개인 행복을 버리고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이것을 자신에게 적용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호세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3절, “이에 저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어떤 사람들은 고멜이 실제적인 인물이 아니고 가상적인 인물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간음하는 자와 결혼한 호세아는 결국 간음한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누구의 아들’ 혹은 ‘누구의 딸’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실제적인 인물을 말합니다. 그리고 호세아의 결혼은 법적인 결혼을 말합니다. 이것은 정당한 신부대금을 주고 아내를 데려오는 것을 말합니다. 고멜은 결혼한 후 여전히 음란한 짓을 계속 해서 자식을 낳았습니다. 물론 이 자식은 호세아의 자식이 아니었습니다.

3. 첫 번째 아이

하나님께서는 고멜이 낳은 첫번째 아이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짓게 하셨습니다. 4절,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이스르엘이라고 하는 것은 지명입니다. 북쪽에 있는 평지의 이름이 이스르엘입니다. 아주 유명한 평지입니다. 그래서 첫 아이 이름만 들으면 아주 좋은 뜻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많은 농산물이 생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이스르엘은 좋은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먼저 타락한 곳이었고 특히 이곳에서는 아주 끔찍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로보암의 조상인 예후가 아합의 가족들을 몰살시킨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세벨도 이곳에서 죽었습니다. 아합 가족의 씨가 완전히 마른 곳이 바로 이 이스르엘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 2세인데 그는 예후의 후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이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하심으로 예후의 집안이 아합의 집안을 이스르엘에서 몰살시켰듯이 그들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2차대전때 미국 사람들에게 가장 잊을 수 없는 곳이 바로 하와이의 진주만이었습니다. 그래서 2차대전때의 구호가 ‘진주만을 기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일본과는 어떤 일이 있어도 타협할 수 없고 반드시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 때 대통령이 자기 아이의 이름을 진주만으로 지었다면 이 아이가 크기 전에 반드시 일본에 복수하겠다는 뜻이 있습니다.

호세아의 큰 아들 이름을 ‘이스르엘’로 지은 것은 이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에 예후 왕가의 왕들이 자기들이 했던 것처럼 다 죽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왕이 다 죽으면 결국 나라는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역사 끝에는 몇번의 구데타가 일어나서 부하가 왕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었다가 그 다음에 다시 부하에게 살해를 당하는 일을 몇번 반복하고 난 후 완전히 앗수르의 손에 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언약이 깨어지면 그들은 그 땅에서 쫓겨나야 마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가나안 땅에서 잘 살 수 있는 것을 생각했는데 그것이 오산이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앙의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늘 평안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절대로 마음의 평안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불신자들만큼도 평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떠나서 절대로 행복하거나 평안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두려워 해야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 안에 성령의 감동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어도 감격이 없고 성령이 주시는 기쁨과 확신이 없으면 그 신앙은 극도로 위험한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적신호입니다.

요즘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한 적이 없다. 혹은 요즘 내가 진심으로 하나님께 뜨겁게 기도해 본 적이 너무나도 오래 된다. 요즘 나의 예배가 완전히 형식적인 것이 되었다고 판단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잃어버린 감동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만신창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남쪽에도 아이가 한 명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때 유다의 왕은 악한 왕 아하스였습니다. 그는 북쪽 이스라엘왕 베가와 수리아왕 르신의 공격으로 늘 불안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하스에게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서 하나님께서 유다를 버리지 않고 지켜 줄테니까 징조를 하나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하스는 자기가 신앙이 좋은 척하면서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징조가 필요없을 정도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마음속에 앗수르의 도움을 받을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구하지도 않은 징조를 친히 주십니다. 그것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처녀는 나중에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예고합니다. 물론 이 처녀가 누구냐 하는 데는 이론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사야의 새 처녀 부인이라고 말하기도 하는가 하면 아하스의 새 부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아하스의 집안에서 한 처녀가 부정한 방법으로 아이를 가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좌우간 유다 왕궁에 한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의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다 백성들이 거듭 하나님을 버리고 범죄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유다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두 아이가 크고 있습니다. 하나의 이름은 ‘이스르엘’이고, 다른 하나의 이름은 ‘임마누엘’ 입니다. 하나는 완전히 망한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그들의 대적을 물리치시겠다는 뜻입니다. 두 아이의 이름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스라엘과 유다의 운명은 갈라집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다. 유다는 아직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많이 변질되고 오염되었지만 말씀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완전히 죽은 교회요 형식만 남은 교회였습니다.

5절을 보십시요.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활을 꺾는다고 하는 것은 완전히 힘을 쓰지 못하도록 패망시키겠다는 뜻입니다. 활은 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힘있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오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도록 하기 위해서인데, 좀 키워놓으면 자기 갈 길로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기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 활을 꺾어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부하도록 하시고 또 여러 가지 축복을 주시는 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는 도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조금 형통하면 완전히 이것이 자기의 공로인 줄 알고 더욱 더 하나님의 손에서 빠져 달아납니다.

4. 호세아의 두 번째 아이

첫째 아이를 낳고서도 고멜의 부정의 행실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아이를 낳았는데 이번에는 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의 이름은 ‘로루하마’라고 짓게 하셨습니다. 6절, “고멜이 또 잉태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가 루하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서 보호가 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지켜 주었듯이 하나님의 은혜가 그 백성들을 늘 지켜 주십니다.

사실 모든 것을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사막과 같습니다.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많은 위험이나 고비들이 우리들이 모르는 사이에 넘어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부분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마음의 분노와 절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시면 우리는 불안에 빠져서 한 순간도 견디지 못합니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지 않는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지켜야 합니다. 마음속의 생각이 가는 대로 계속 가면 어떻게 됩니까? 로루하마가 됩니다.

믿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면 단순히 은혜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짐승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시면서 다른 일반인들이 가지는 상식이나 판단력까지 다 거두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은혜가 있다는 것은 서로 용서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에 은혜가 없으면 그곳은 지옥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거기는 상식도 판단력도 대화도 아무 것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른 뺨을 맞거나 겉옷을 빼앗겨도 대적하지 말고 손해를 감수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약간의 이익을 지키는 것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떠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분노를 오래 품거나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면 수십 배 수백 배 더 비싼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모든 것을 자기 혼자서 지켜야 합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운명을 자기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 이유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아무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긍휼히 여기신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우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불쌍히 여기지 않았고 더 잔인해졌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아이의 이름은 로루하마라고 짓게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자비를 베풀지 않고 지켜주지 않을테니까 네 능력으로 살아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우리가 책임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인도해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으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다른 사람에 대한 은혜의 문을 닿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하나님께서도 나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유다에 대해서는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7절,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유다는 구원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이유는 유다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도 이미 많은 부분에서 이스라엘을 따라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런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구원하시는 일을 완전히 중단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불성실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했고 하나님의 의욕을 꺾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구원의 일을 유다를 통하여 계속 하겠다고 다짐하십니다.

‘저희 하나님 여호와’가 누구입니다. ‘저희 왕 다윗’이 아닙니다. 신적인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입니다. 이분은 활이나 칼이나 말이나 마병으로 구원하시지 않고 출애굽때처럼 전능하신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분입니다. 이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활이나 칼이나 말로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하여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일단 하나님을 믿으면 철저하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을 가지려고 하면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언약이며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으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을 떠나는 것만이 불신앙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더 무서운 불신앙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변질시키기 때문입니다.

결국 구원이 어디 있습니까? 칼이나 창이나 말이나 마병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만이 우리를 지켜 주실 수 있고 우리를 이기게 하십니다. 더욱 더 주님을 의지합시다. 우리 자신에 대한 모든 자랑과 교만을 버리고 모든 구원이 주님께만 있음을 고백드립시다. 주님의 은혜 안에서 생활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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