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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보응 (호 05: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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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젊은이들이 옷을 입고 다니는데 그 상표 이름이 ‘안전지대’(Safety Zone)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서 살고 싶어합니다. 한때 우리 나라의 정세가 불안하고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우리 나라를 떠나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 이유는 미국이 우리 나라보다 훨씬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이 삼성이나 현대 같은 대 기업에 취직이 되면 좋아하는 이유는 그런 기업을 금방 망하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안전한 직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IMF가 커지고 그런 회사들도 구조조정을 하느라고 직원을 무더기로 내어 보내게 되니까 과연 이 세상에 안전한 직장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회의를 가지게 했습니다.

오늘 과연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여러 장소 중에서 기브아나 라마같은 곳이 비교적 안전한 곳이었고 벤냐민도 안전 지대에 속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바로 그런 곳에서 전쟁의 나팔 소리가 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는 절대로 안전지대가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적은 곳으로 가서 산다고 해도 그곳에도 사고는 터지기 마련이며 우리가 이 세상에 몸을 담고 살고 있는 이상 아무리 조심을 많이 하고 안전이나 건강을 최고의 우선 순위로 삼아도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안전한 곳이 딱 한 군데 있습니다. 거기가 어디입니까? 바른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사람들이 그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곳입니다. 말씀이 있느 공동체, 부족하지만 그 말씀대로 사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있는 교회가 바로 이 세상의 안전지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은 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안전지대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하나님의 안전을 세상 사람의 안전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 붙들고 살아가면 부족한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부족한 것이 가장 안전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주시며 그들을 언제나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전을 버리고 스스로 강해지려고 했을 때 이스라엘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지 오늘 본문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안전 지대에서 들려오는 전쟁의 소리.

8절,“너희가 기브아에서 나팔을 불며 라마에서 호각을 불며 벧아웬에서 깨우쳐 소리하기를 베냐민아 네 뒤를 쫓는다 할지어다.”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기브아라든지 벧아웬이라는 곳은 이스라엘 지역 중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안전지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브아와 라마 혹은 벤냐민의 땅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경계 지역에 있는 곳입니다. 주로 전쟁이 터지려면 북쪽이나 남쪽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중간에 있는 이곳들은 피해가 가장 적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호세아가 부르짖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여기에서부터 전쟁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기브아에서 나팔을 불며 라마에서 호각을 불며’

결국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장 안전한 곳이 기브아나 라마라고 생각해서 거기에 땅을 많이 사 놓고 그곳에 별장을 짓고 나름대로 피난 갈 준비를 다 해 놓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혹시 기브아나 라마가 여의치 않으면 벤냐민 사람의 땅으로 도망칠 준비를 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전쟁이 터질 곳은 벤냐민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결코 이 세상에서 안전한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주시려고 작정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뒤에 나오는 9절과 10절이 그 이유를 설명하는 데 9절은 이 안전한 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성격을 말하고 10절은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9절,“견책하는 날에 에브라임이 황무할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지파 중에 필연 있을 일을 보였노라”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쟁이 이스라엘 전체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기브아나 라마까지 다 포함된다는 뜻이지 기브아나 라마에서만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전쟁의 성격이 ‘하나님의 견책’이라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신문에서 ‘문책성 인사’라는 표현을 봅니다. ‘문책’이라는 것은 어떤 장관이나 공무원이 잘못했을 경우에 그냥 넘어가지 않고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사실 문책한다고 하는 것은 그를 그 직책에서 쫓아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나라는 이 세상의 둘 밖에 없는 안전지대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안전지대의 특권을 해제시키는 것이 그 견책이었습니다. 사실 이곳에서 사람들의 피해가 가장 컸던 이유중의 하나는 가장 안전한 곳인 줄 알고 사람들이 몰려 왔기 때문에 더 피해가 큰 것입니다.

등산을 할 때 가장 위험한 것이 벼락을 맞은 나무를 붙잡는 것입니다. 나무가 힘이 되어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잡았기 때문에 추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안전지대’(Safety Zone)로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실제는 아니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이 안전한 곳인 줄 알고 피했던 사람들까지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시 139:7-8,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물론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자기의 성을 쌓고 나름대로 전쟁 준비도 하고 군사들도 훈련시키는 것이 안전 대책입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과 군사 동맹을 맺어서 서로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스스로를 안전하게 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도 완전한 안전 대책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실 때까지만 안전한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안전한 자기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망하려고 하면 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11절, “에브라임은 사람의 명령 좇기를 좋아하므로 학대를 받고 재판의 압제를 당하는도다.”

이 구절은 참으로 번역이 어려운 구절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명령’이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 ‘명령’은 히브리어로 ‘싸우’라는 말인데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영어 성경들은 철자(綴字)는 다르지만 발음이 비슷한 ‘싸우’ 즉 ‘우상’으로 반역했습니다.즉 에브라임이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은 그런 영어 번역을 따르지 않고 원래대로 ‘명령’이라고 번역했는데, 그냥 ‘명령’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명령’과 혼동이 되니까 ‘사람’이라는 말을 넣어서 ‘사람의 명령’이라고 번역했습니다.대단히 뛰어난 의역이라고 생각됩니다. 본문의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드러낸 번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사람의 명령을 따랐습니다.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을 지키는데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세상적인 방법을 택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역사서을 읽어보면 이스라엘 왕들에 대하여 ‘악한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더라’는 말이 계속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여로보암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세상 방식으로 잘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백성들이 안전할 수 있는 곳은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그들이 만든 수 만가지 방법들이 그들을 돕지 못할 것입니다. 가장 안전한 곳으로 피했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그곳이 바로 사자의 입 속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안전한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있느 곳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밥을 먹여줄까?’

그 말은 맞습니다. 말씀이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도 어려움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의 어렵고 아픈 것이 실제로는 다른 곳은 아무 걱정없는 편안한 삶보다 훨씬 더 안전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살아 있는 교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환상입니다. 실제 우리의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 삶 그 자체입니다. 결국 이것은 그 참된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없지만 말씀대로 산 사람의 참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명령을 쫓고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성공은 성공이 아닙니다. 그 거짓된 평화는 곧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견책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현재의 성공이나 안정된 삶을 믿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런 평화와 부요함 가운데서 나팔소리를 들으십시오. 전쟁의 호각소리를 들으십시오.

2. 유다와 이스라엘의 정책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이스라엘에서 가장 싫어하시는 정책을 하나씩 예로 들고 계십니다. 이것은 한 나라는 이 문제만, 또 다른 나라는 저 문제만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둘 다 걸려 있는 것이지만 하나씩 나누어서 말씀하십니다.

유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팽창정책이었습니다. “유다 방백들은 지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 내가 나의 진노를 저희에게 물같이 부으리라.”(10절)

여기서 ‘지계표’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땅의 경계를 구분하는 경계표를 의미합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지적도와 같은 것입니다.

구청의 지적과에 가보면 땅에 모두 선이 그어져 있고 땅 소유의 한계가 다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계표를 옮기는 것은 불법으로 자기 땅의 경계를 넓혀서 다른 사람의 땅을 그만큼 많이 차지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현재 우리와 고대 이스라엘의 땅에 대한 법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땅이 개인 소유로 되어 있어서 얼마든지 사고 팔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이나 유다에 있어서 땅은 매매의 대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땅은 절대로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각 가정에 나누어주신 것이기 때문에 한번 소유를 영원한 소유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나 유다에서 지계표를 옮겨서 땅을 넓히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유다에서 지계표를 옮긴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유다의 가난한 사람들은 흉년이 들면 이웃의 부자들로부터 곡식을 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부자들은 비싼 이자를 먹였고 그것을 갚지 못하면 땅을 포기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에서 법으로 ‘그런 것은 절대로 안된다. 땅의 지계표는 부자든지 가난한 자든지 변경이 불가능하다’고 밀고 나갔으면 가난한 자들이 아무리 빚이 많아도 땅은 빼앗기지 않으니까 다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위정자들이 이 부분을 양보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각자의 합의한 경우에는 땅 소유도 변경될 수 있다’는 식으로 물러선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정책이 부자를 위한 정책으로 바뀐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정권을 잡은 자들이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안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금지한 것이다’라고 밀고 나갔더라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셨을 것이고 유다도 계속 안전지대로 남아 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자를 위한 정책의 변경이 유다의 안전을 위태롭게 만들었고 부자들을 위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부자들 자신이 위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범위 안에서 행복한 것은 절대로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율법의 범위를 넘어서서 잘되려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땅,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가정,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라고 하신 일, 이 모든 것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익이 더 많다고 해서 당장 무엇을 바꾸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나 선물로 생각되는 것들은 다른 사람이 잘 알아주지 않고 힘들다고 해서 쉽게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것은 매우 아름다운 것들이며 이 세상에는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귀한 것을 버리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하여 다른 길로 달려가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극대화시키지 않습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기드온은 큰 용사였습니다.그러나 그는 자식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많은 자식을 두었습니다. 자식이 칠십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자식이 많은 것이 큰 능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식 중에서 아비멜렉이라는 아들이 세겜 사람들과 뜻이 맞아서 칠십명의 아들을 다 죽이고 세겜에서 왕노릇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 가운데서 간신히 도망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요담이었습니다.

요담은 산 위에서 도망치면서, 그리심산 위에서 세겜 사람들을 불러 놓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무들이 자기들의 왕을 뽑기 위하여 감람나무에게 가서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감람나무는 자기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데 어떻게 그것을 버리고 나무들 위에 요동하겠느냐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나무들이 무화과나무를 찾아가서 왕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무화과나무가 자기의 단 것,아름다운 실과를 두고 어떻게 나무들 위에 요동하겠느냐고 대답하면서 거절했습니다. 포도나무에게 부탁해도 대답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시나무에게 가서 부탁했더니 좋아하면서 자기 그늘에 피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가시나무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을 사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요담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존재하는 것은 남을 편하게 하고 남에게 기쁨을 주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지 자기의 야망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것으로 남을 기쁘게 하고 남을 복 주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집사면 집사로 그리고 찬양대원이면 찬양대원으로, 학교 교사면 교사로 충분합니다. 감히 다른 나무들 위에서 요동하면서 인기를 끌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귀중한 것을 잘 지키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애써 더 크게 되려고 하거나 애써 더 높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굳이 그렇게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시키시면 대단히 부담스러워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순종합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거저 남 위에 올라가지 않아서 안달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얼굴 색이 변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 한 명 한 명이 얼마나 소중한 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돕고 섬길 수 있는 것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지요. 더 높아져야 할 이유가 없고 인정받기 위하여 아첨을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버리고 가난한 하나님의 백성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고 자기 욕심을 쫓는 유다를 물붓듯이 지노를 퍼붓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가난한 하나님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자신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마지막 때 세상 사람들을 양과 염소로 나누어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구원을 얻을 양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이 굶었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 찾아가고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언제 우리가 그렇게 했느냐고 물으니까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염소로 분류된 사람들에게 내가 굶었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었을 때 찾아오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언제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니까 지극히 작은 자중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성도중에 지극히 작은 자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지도자들이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을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통치를 했더라면 지속적으로 그들을 지켜주시고 돌보아 주셨을 것인데 부자 위주로 정책이 선회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13절,“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저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여기서 ‘에브라임이 자기 병을 깨닫고 유다가 자기 상처를 깨달았다’라는 말은 그들이 근본적으로 자기의 병의 원인을 알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실적인 여러 어려움에 대하여 깨닫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조공을 내야 하는데 낼만한 돈이 없거나 흉년이 들었는데 곡식을 구할 수 없다는 것등입니다.

별 문제가 없는 줄 알았는데 비로소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불거지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무력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 이들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앗수르라는 강대국을 의지했습니다. 여기서 ‘야렙왕’은 ‘야르’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싸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야렙왕’ 이라는 것이 진짜 이름이 아니고 별명이었습니다. ‘싸움 왕’, ‘깡패 왕’ 그런 뜻입니다. 가장 정확하게 번역하면 ‘보스’라는 말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정의롭지는 못한 데 힘은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전쟁을 잘 하고 힘있는 앗수르 왕의 도움을 의지하여 이 모든 문제를 풀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상처를 깨달을 때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야지요. 왜냐하면 그처럼 아프게 때리신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야렙왕은 그들을 돕거나 고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스라엘로부터 무엇인가 뜯어내기 위하여 도와주겠다고 하는 것이지 실제로 남을 도와줄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팔레스타인을 공격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데 이스라엘이 도움을 청하니까 얼씨구나 하면서 전쟁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잠자는 사자를 깨운 것입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과 같습니다. 절대로 앗수르는 건드려서는 안됩니다. 길에서 만나더라도 모르는 체하고 지나가야 상책인데 순진하게도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사기꾼을 찾아가니까 너무나도 좋아하면서 이 문제에 개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유지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 세상 나라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세상 나라에 먹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모험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의 힘을 의지하는 것은 스스로 망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물론 믿지 않는 세력과 나쁘게 지낼 필요는 없습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우리를 돕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치료자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처에는 영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과 불신앙, 바로 이 부분이 치료되지 않은 채 어려움만 없어졌다고 해서 그 상처가 치료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상처에는 세상의 재산이나 의학적인 방법만으로는 치료될 수 없는 영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려가지 어려움을 통하여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십니다.

3. 하나님의 반응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믿음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면서 살 때 어떤 식으로 반응하십니까? 우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눈에 드러나지 않게 약하게 만드십니다.

12절,“그러므로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

‘좀’이나 ‘썩이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은근히 파고 들어가서 썩게 만드는 것입니다. ‘썩이는 것’은 곰팡이같은 것을 말할 것입니다. 아니면 녹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눈에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모르는 동안에 놀랍게 힘이 빠져나갑니다. 하루 이틀은 별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좀이 먹고 녹이 슬었습니다. 결국 그 전체가 못쓰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을 때 자꾸 힘이 빠집니다.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다. 그리고 점점 능력이 없어집니다. 무슨 능력이 없어집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없어집니다. 죄를 거절할 수 있는 힘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은 자기 영혼이 좀먹었고 곰팡이가 생겼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 생각에는 옛날처럼 힘있게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사람 자체가 이미 쓸모없이 되고 말았습니다.

삼손은 자기 힘만 믿고 경건에 소홀히 했습니다. 세상적인 쾌락에 자꾸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에게서 능력은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는데 그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들릴라의 품에서 머리털이 밀리고 눈알이 뽑혔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늦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속지 아니하십니다. 말씀에 불순종하는 생활을 계속하면 어느 한 순간에 크게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모든 것이 다 늦은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감정이나 몸이 마음먹은 대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이것은 큰 오해입니다. 절대로 우리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동과 감정은 훈련되어져야 하고 길들여져야 합니다. 훈련에 의하여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길들여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평소에 자꾸 화를 내는 쪽으로 훈련된 사람은 자꾸 화를 냅니다. 화를 내면 안되는 데도 화가 나고 결국 그 화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잃고 맙니다. 자꾸 음란한 쪽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면 안되는 데 자꾸 몸과 마음이 그쪽으로 갑니다. 통제가 되지 않고 그 욕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정서가 너무 불안정해서 아무 것도 되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경건한 훈련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평소에도 자꾸 염려하는 사람은 늘 염려합니다. 아무리 자기 자신을 설득하려고 해도 안됩니다. 염려하느라고 설교도 들리지 않습니다. 이미 그 영혼이 좀 먹고 썩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는 참으로 우리의 감정과 생각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생각해서는 안될 것을 생각하지 않는 훈련, 감정을 통제하고 바른 감정을 표현하는 훈련, 그리고 해야 할 것은 움직이는 훈련, 이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 해야 하고 아무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되지 않는 교인은 좀먹은 교인 또는 녹슨 신자라고 불러야 합니다. 알기는 다 아는데 움직이지도 않고 감정도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결국 고물이라는 뜻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불순종하는 자에게 어떻게 하십니까? 14절,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나 곧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결국 일격에 쓰러지게 하십니다. 아마 이 당시에 가장 큰 불행이라면 노약자나 어린이들이 사자에게 물려 가는 일일 것입니다. 사자가 물고 가면 건져낼 길이 없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형편이 사자에게 물려 가는 전쟁포로의 신세가 되고 말 것이며 아무도 그들을 도울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불순종하는 백성들은 서서히 그 힘을 잃습니다.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기쁨과 은혜를 다 빼앗깁니다.그리고 사탄의 일격에 쓰러지고 맙니다. 이때에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립니다.그동안 쌓아왔던 좋은 명성,좋은 친구관계,좋은 업적,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맙니다.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그를 도울 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만 의지하여 그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지켜 주십니다.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국제정세가 불안정하고 이 세상이 험란하다고 해도 우리들은 절대적으로 보호됩니다. 왜냐하면 전쟁왕보다 더 크신 분이 지켜 주기 때문입니다.

가장 안전한 길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당장은 어려워 보이지만 끝까지 참아보십시요.이 말씀의 신실함을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확인해 보십시요.

그리고 말씀없이 형통한 것을 절대로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그들은 이미 좀먹고 녹슬었기 때문입니다. 경건의 능력이 없는 교인,선을 보고도 행할 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이 절제되지 않는 성도는 녹슨 교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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