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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교회의 경건 (슥 07: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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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의 경건(슥 7:4-14)

우리가 잘 알고 또 늘 느끼듯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시대적으로 많이 변합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똑같은 언어라 할지라도 시대에 따라서 그 의미가 변하게 되는 것은 어느 언어에서나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그것은 우리말과 한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벌써 3년 전 얘기입니다. 제가 일본에서 목회하다가 한국에 다시 왔을 때, 긴 시간을 일본에서 생활한 것도 아닌데 이 언어 때문에 당황한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다시 한국에 왔을 때 옛날 청년부 때 지도했던 한 자매가 저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너 참 예뻐졌구나!” 그랬더니 그 청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근이지요!” “뭐! 당근! 당근이 뭐야?” “당근도 모르세요? 말밥이요?” “??!!...” 한 남자 청년은 제가 온 건을 반갑게 맞아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반가워요, 언제 한 번 제가 쏠께요?” “뭐!??!!!, 넌 또 뭘 쏘냐?....” 쏜다는 말이 밥을 사겠다는 말로 변했다는 것은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뒤에 일어났습니다. 김동호 목사님과 함께 어느 교인의 발인예배를 드리는데 김목사님께서 고후15:55-56의 말씀을 봉독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니라> 갑자기 우리의 변한 언어의 뜻을 생각하고는 혼자 많이 속으로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사망이 오늘 저녁 한 턱 내려나?.....”

이렇듯이 우리가 쓰는 언어는 그 처음의 본질과는 사뭇 다르게 쓰이고 있는 것이 많은데, 문제는 그것이 성경 속의 단어에서도 간간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저런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때, 그 본래의 의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와서는 사뭇 달라진 것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중 그 뜻이 많이 달라진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경건’입니다. 여러분은 ‘경건’, 혹은 ‘경건하다’ 라는 말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대체적으로 우리가 ‘경건’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단순히 떠올리는 것들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금식기도, 새벽기도, 절제되고 엄숙한 예배생활과 언어생활, 주일성수, 금연, 금주..... 등입니다. 즉 절도 있고 절제된 말과 행동, 그리고 엄숙한 그 생각들.... 다시 말해 ‘경건’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우리는 외형적인 틀로써의 이해를 먼저 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 기독교의 ‘영성’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본시 ‘경건’이란 말의 뜻은 외형적인 것과는 정 반대의 말입니다. 그것은 신학사전만 보더라도 금방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학사전 즉, 한국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그리스도교 대사전에 의하면, 이 단어를 이렇게 표기하고 있습니다. “경건이란, 성도가 가져야 할 한 가지 덕목으로 외형적이기보다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내적인 태도를 말한다.”

뭔가 중간에 잘못되었습니다. 경건은 본래 외형적인 것이 아닌데, 우리는 이 경건을 오히려 외형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어의 의미변화입니다. 본래의 의미와는 달리 그 폭이 좁아져서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생활을 나타내는 종교적인 단어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경건’이라는 말이 왜 이렇게 그 의미가 바뀌었는가? 여기에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① 첫째, 경건이 외형적 금욕으로 간 이유는 초창기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미국의 선교 사들의 영향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하는 경건이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경건으로 그렇게 그 의미가 바뀌게 된 데에는, 미국의 청교도 정신이 몸에 배어 있던 미국 선교사의 영향이 컸던 것이 사실입니다. 19세기, 미국 부흥운동에 이어서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한국이 미국 선교사들에게서 복음을 받으면서 경건의 의미는 변질되었습니다. 외형적인 금욕을 중시하는 청교도적 정신을 갖고 있는 선교사들이 성경을 가르치면서부터 경건의 의미는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가르치며 자신들이 추구하는 금욕과 성경이 말하는 경건을 구분 짓지 않았던 것이고, 그래서 자연히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경건이 외적인 금욕과 결부되어 이해돼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복음의 유입과 동시에 경건과 절제운동이 시작 된 아주 독특한 교회사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은 아직 우리 한국교회의 지도자와 기성세대의 뇌리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둘째로, 한국 기독교 초기에 성경을 번역한 학자들이 성경을 잘못 번역한데서 온 오류이기도 합니다.
초창기에 우리말로 성경을 번역하던 사람들은 한학자(漢學者)들이었습니다. 이 한학자들은 본시 모두 유학자(儒學者)들입니다. 원래의 성경원문에는 이 경건이란 말을 ‘유세베이아’ 라는 단어로 쓰는데, 이 단어를 중용(中庸)이나 대학(大學)에 나오는 아주 어려운 단어인 경건(敬虔), 즉 소위 유교적인 단어로 번역을 한데서 문제가 꼬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경건이라는 단어의 뜻은 다분히 유교적인 것이고, 그래서 우리말 사전을 찾아보면 <공경하는 마음으로 깊이 삼가고 조심함> 이라고 나와 있는데, 우리가 경건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교적 사고에서 기인한 <경건>의 뜻입니다. 시끄러워서는 아니 되고, 불규칙적이어서도 안 되며 항상 조심스러워야 되고 엄숙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유지시키기 위해 엄청난 금욕을 해야 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유교적 경건의 의미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기독교의 경건으로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지금이야 많이 이해가 바뀌었지만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예배당에서 드럼을 치는 것과 일랙트릭 기타를 연주하며 시끄럽게 찬양을 하면 웬만한 어른들은 경건치 못하다고 생각했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시끄럽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기존의 틀을 깼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교회에서 연애를 하는 것, 욕을 먹는 일인데 왜 그랬습니까? 삼가며 조심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절제와 금욕등으로 그 경건성이 확립되었던 것입니다. 먹는 것을 절제하는 것을 금식이라 말하고 삶의 세상적 욕구를 절제하는 것을 금욕이라 부릅니다. 말을 절제하고 행동을 절제하는 것을 신앙인의 더 없는 덕목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이 한학(漢學)에서 나오는 유교적 단어인 ‘경건’을 성경에 넣어 번역함으로 본래의 의미가 축소 혹은 변질된 결과입니다.

③ 셋째로는, 이 땅에 복음이 유입될 당시 조선의 정치 경제적 상황이 매우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처음부터 금연과 금주운동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의 상황이 너무 특별해서 매우 독특하게 한국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즉, 절제운동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적어도 한국교회에 있어서는 기독교의 본질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1907년 국체보상운동을 시작하면서 기독교인들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대한 1,300만원의 국채를 갚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의 제재를 받는다는 인식을 모두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 아래 한반도의 2천만 동포가 약3월간 금연을 한다면 1,300만원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계산은 이렇습니다. 개인당 매 월 20전씩 3개월만 저축하면 1,200만원을 모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교회가 이 금연운동을 추진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금연운동과 관련하여 1911년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라는 잡지에는 담배의 해되는 증거가 무엇이뇨? 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오게 됩니다. 그 기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1) 흡연이 신체에 해됨이니 지권련(담배)은 사람의 몸에 활동력을 감하며 미성년자의 신체로 하여금 발양치 못하게 하고
2) 흡연이 뇌력을 약하게 함이요
3) 흡연이 도덕에 해됨이니 담배가 먹는 자로 하여금 목이 마르고 갈증이 나게 만드는 고로 술 마실 생각을 가지게 하기 쉬우니 이로 인하여 우 리 영혼의 거룩한 집이 더럽혀지는 것이요
4) 흡연이 경제에 해됨이니 금 같은 시간을 허비하여 금전을 내버리며 정 결한 방안과 아름다운 의복을 그을려서 못쓰게 만드느니라. 또한 이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라는 잡지는 담배뿐 아니라 술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개화를 크게 해하는 물건은 술 인고로 옳게 생각하는 사람마다 이것을 없이하기 힘쓸지니, 술은 바른 생애로 수고하여 모은 재물을 빼앗으며 걸인과 죄인을 만들고 집을 망하게 하며
협잡과 뇌물과 사정을 성행케 하며 국가의 재산을 남용하여 경제상으로나 도덕상으로 보면 술은 없애야 할 물건이니라

이렇게 교회 내의 금주 운동이 확산되자 1931년 《신정찬송가》가 발행될 때 임배세 선생 작곡의 금주가가 정식 찬송가 곡으로 채택되었는데, 그 가사 내용은 이렇습니다.
1) 금수강산 내동포여 술을입에 대지마라
건강지력 손상하니 천치될까 늘두렵다
2) 패가망신 될독주는 빚도내서 마시면서
자녀교육 위하여는 일전한푼 안쓰려내
3) 전국술값 다합하여 곳곳마다 학교세워
자녀수양 늘시키면 동서문명 잘빛내리
4) 천부주신 네재능과 부모님께 받은귀체
술의독기 받지말고 국가위해 일할찌라
후렴) 아-마시지말라 그 술, 아-보지도말라 그 술
조선사회 복받기는 금주함에 있느니라

우리가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한국교회의 주초문제는 바로 술과 담배에 관한 문제가 아닌, 어려운 나라, 즉 국가라고 하는 공동체를 구하기 위한 취지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공동체가 어려울 때 실의에 빠지거나 모르는 척 해서는 아니 되고 기독교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민족을 살릴 것을 호소한 것이고, 그 일을 누구보다도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신학적인 견지에서도 한국교회가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서 실천한 금주와 금연운동의 보급은 성경의 바른 해석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다” 라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필요하다면 우리는 술과 담배뿐 아니라 먹고 입는 것, 아니 그 이상이라도 참고 견뎌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시작한 그 금연과 금주 운동이 이상하게도 그 본질은 싹 사라지고, 이제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경건성’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아직도 많은 기성세대들이 개신교의 경건성을 말할 때,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주저하지 않고 그 경건의 덕목으로 상위권에 두는 것이 바로 이 주초문제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인들이 음주와 흡연을 하는 것을 생명을 걸고 막고 있으며, 평신도들도 나름대로 음주와 흡연에 대해 교회와 연결지어서는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듯 주초문제는 한국교회의 경건 문제에 있어서 그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그 경건이란 말의 의미가 변질되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참된 경건의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경건의 참 뜻을 알기 위해 역사와 전통과 문화가 아닌,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 66권 중에 경건을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책은 바로 스가랴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경건한 생활을 해야 하는지 스가랴서 전체를 통해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 이 본문말씀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인지 그 ‘경건’을 말해주고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을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 위해 먼저 경건치 못한 것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거짓된 경건을 말할 때 ‘금식’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슥7: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70년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이스라엘 백성이 70년동안 해마다 5월과 7월에 금식을 해 왔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의 모습은 결코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금식 자체가 경건치 못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을 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경건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아무리 엄숙하고 절제된 예배를 70년 동안 드렸다 해도, 또 금식과 금욕으로 절제된 생활을 70년 동안 했다 할지라도, 또 평생 집사로 권사로 장로로 목사로 교회밖에 모르는 생활을 해왔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이 그 안에 없다면 다 무효라는 것입니다. 경건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경건의 뜻을 바로 9-10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슥7:9-10)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남을 해하려 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재판관들은 진실한 재판을 하고,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 즉, 약한 자를 압제하지 말고, 남을 해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을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제일 먼저 가져야 할 경건의 덕목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더욱 이 스가랴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덕목은 진실하라는 것입니다.

(슥8:16-17)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오늘날의 말로 바꾸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인간관계에 있어서 진실을 말하며 너희 가정과 직장에서 진실하고 거짓을 행치 말 것이며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남을 해하는 일을 해서는 아니 될 것이라. 너희는 자기 자신을 위해 남을 비방하거나 거짓을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이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요? 아닙니다. 스가랴서를 이같이 오늘날의 말로 해석한 것은 제가 아니라 바로 신약성경입니다. 스가랴의 말씀은 신약에 와서 야고보가 다음과 같이 해석해주고 있습니다.

(약1:26-27)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은 무엇입니까? 주초의 문제입니까? 절제되고 엄숙한 예배의 문제입니까? 거룩한 표정과 세련된 고급스러운 말과 위엄 있는 걸음걸이입니까? 일년 내내 아침 금식을 하면 되겠습니까? 새벽기도를 하루도 빠짐없이 나오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진실입니다. 그리고 경건은 사람들을 향한 진실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기독교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경건이 없다는 것입니다. 경건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으니 하나님의 원하시는 경건을 행치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눈에 보이는 외형적 경건을 너무나도 좇아 왔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밥 굶어 가며 기도하는 데는 명수이고, 밤을 지새워 기도하는 데는 선수들입니다. 연초가 되면 영성집회를 하는 기도원은 만원이고, 일년 열두 달 새벽마다 기도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세계 교회를 놀라게 해 왔으며, 구름 떼 같이 들어오고 나가는 수많은 교인들의 모습을 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인이 가는 곳은 어디나 교회가 생기게 됩니다. 오래 전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웅장한 폭포가 있는 나이아가라에 가서 두 가지에 놀라고 왔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그 창조의 웅장함에 놀랐고, 또 하나는 그 폭포 옆에 나이아가라 한인교회가 있다는 것에 참 놀랐습니다. 정말이지 한국교회의 위력을 새삼 실감한 것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성장과 위력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래서 무엇이 변했습니까?

뚜껑을 열어 내면을 들여다봅시다. 중국사람 가는 곳에 중국집 생겨나듯이, 세계 어딜 가나 한국사람 가는 곳에는 한인교회가 세워지지만 또 한편으로는 세계 어디서나 한국 사람이 가는 곳에 한국 사람들이 욕을 많이 먹고 있는 것이 사실 아닙니까? 이 번 호주에 가서도 느낀 것이 참 많았습니다. 시드니에만 한인교회가 200개가 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교회가 세워지는데 한국사람들의 위상은 날로 낮아지고만 있습니다.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신뢰를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교인은 많아지는데 우리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는커녕, 길가에 버려져 밟히는 지경에 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장로라, 안수집사라 하며 같이 사업하자고 다가오면, 여러분 그 사람을 무조건 믿겠습니까? 저는 믿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니 이제는 믿지 않습니다. 부끄럽지만 목사인 제가 교회의 중직자를 믿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교인이 목사를 믿지 못하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몇몇 기독교인들의 좋지 않은 현상을 놓고 제가 한국교회 전체를 매도하는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이런 진실치 못한 일들과 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지 않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것도 예수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진실이 사라졌습니다. 온갖 거짓이 난무합니다. 비방과 욕설과 시기와 질투가 사회 곳곳에서 신앙인들의 입과 손과 마음을 통해 전달이 되며, 교회 내에서도 똑같은 행위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정말 바울의 한탄대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진실해야 합니다. 그것이 경건입니다. 적어도 교인라면, 적어도 직분자라면, 말이 진실해야 합니다. 행동이 진실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아내 앞에서, 남편 앞에서, 자녀들 앞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일터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이렇게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여러분, 스가랴의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여호와께 기억된 자》입니다. 즉 스가랴의 말씀대로 경건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스가랴서의 주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고 사람들 앞에서 거짓되지 않을 때, 그리고 항상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보살필 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꼭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바른 경건으로 하나님의 인정받는 신앙인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대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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