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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기 극복의 비결 (욘 03: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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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 우리는 살면서 종종 위기를 만난다. 위기라는 말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 운 문제를 만났다는 말이다. 굳이 정의를 내리지 않아도 쉽게 납득되는 용어다.

2. 위기를 만나는 원인은 여러가지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어떤 동기로 위기를 만 났든간에 위기를 잘 극복하면 본인에게 득이 된다는 사실이다.

3. 니느웨백성들의 형편을 살펴 보자. 그들은 지금까지 한번도 어려움이 뭔지, 위기 가 뭔지를 모르고 살아온 자 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틀림없는 위기가 닥쳤다. 이제 4 0일 후면 성이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농담으로 쉽게 처리할 성격은 아니 었다. 이미 요나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요나의 일 거수 일투족은 이미 니느웨성 전체의 화제거리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문을 통하여 요나를 이미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요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4. 우리는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열심히 기도 한다. 새벽기도도 하고 철야도 하고 금 식도 한다. 어떤 때는 정말 믿기지 않을 만큼 쉽게 해결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때 는 이상할 만큼, 정말이지 하나님의 존재가 의심스러울 만큼 문제가 안 풀릴 때도 있다.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이 안풀렸을 때의 심정이 어떤가? 한 마디로 속이 상 한다. 오늘 우리가 함께 상고할 본문은 이러한 우리의 궁금증을 해소해 준다. 마음을 집중하고 자세히 살펴 보자.

5. 본문을 중심으로 '위기 극복의 비결'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기다리자. . 위기를 만나거든 자신을 살펴 보라(vv7-8).

A. 니느웨왕은 조서를 내렸다.

1. 조서의 내용이 문제다. 성경의 여러 부분이 이방왕의 조서를 소개하고 있다. 모르드개를 해치기 위해 내렸던 아하수에로왕의 조서, 다니엘시대 느브갓네살왕 의 조서등 여러종류의 조서가 있는데 한가지 공통점은 성도들을 박해하기 위한 내 용 이었다. 그러나 니느웨왕의 조서는 전혀 성격이 달랐다.

2. 금식을 명했다. 물까지도 금했다. 완전한 단식을 명했다. 심지어는 짐승까지도 이 명령에 포함 시켰다. 아직 까지 한번도 굶어보지 않은 이들로서는 대단한 의지의 결단이었다. 도저히 상상도 못할 일이다. 짐승들 역시 굶을 필요가 이었다. 그들의 주 인과 더불어 운명을 마쳐야할 처지 였으니 말이다.

3. 굵은 삼베를 걸치라고 하였다. 단순히 옷을 바꿔 입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 는다. 본래 그들의 몸에는 언제나 사치스러운 옷이 걸쳐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잔치 를 즐겼고 분위기를 돋구기 위해 언제나 요사스러운 의복을 걸치고 있었다. 당대 최 신의 팻숀만을 추구하던 이들이 가장 낡고 고통의 상징인 베옷을 입는다는 것은 대 단한 의미를 부여할 일이요 충격적인 사건이다. 이것은 놀라운 변화다.

4. 단순히 굶고 베옷이나 걸치는 쇼가 아니었다.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이다. 솔 직히 하나님이 누군지도 잘 모른다. 단순히 요나의 소문을 통하여 알고 있는 정도였 을 것이다. 바알에게 기도하라면 몰라도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 한다는 것은 기적의 현존이었다.

5. 악을 버릴 것을 명했다. 참된 변화는 악을 버리는 것이다. 이사야는 형식적으 로 금식하며 싸우는 종교주의자들을 책망 했다(이사야58).

B. 우리도 위기를 만날 때 자신을 살펴야 한다.

1. 니느웨백성이 위기를 만난 것은 분명히 그들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 였다. 자 업자득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체념하지 않았다. 절대로 체념하지 말자. 포기하지 말자 낙심하지 말자.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있어야 한다.

2.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끝까지 시도하라. 현재의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우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자. 그동안 하나님과의 교제에 이상은 없었는가? 단순히 나의 고난이 내 잘못이라고만 단정할 수는 없다. 때 때로 의인에게도 고난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해야만 한 다. 매일의 생활 속에서 경건의 시간을 가졌는가?

3. 지금 나의 행동은 말씀에 비추어 어떤 상태인가? 윤리적으로 문제는 없는가? 세상연락을 취하지는 않았는가? 주님과 세상중에서 하나를 택한다면 무엇을 택하겠 는가? 만일 육신의 정욕으로 옷입혀져 있다면 마땅히 벗어던져야 한다. 그리고 불편 하드라도 '베옷'을 걸쳐야 한다. 베옷은 구시대의 옷이다. 그래서 멋이 없다. 폼이 안 안난다. 베옷은 세상 안목에 대한 철저한 거부반응을 뜻한다. 베옷은 창피하다. 괜히 자존심이 상한다. 하지만 '자아'를 버려야 한다. 자존심을 버리자. 그럴 때 주님을 만 날 수 있다. 모시메리가 아닌 굵은 베옷을 입으라. [삶의 위기는 새로운 챤스다. 그러므로 삶의 위기를 만나거든 '자신을 돌아보자'. 그러나 성도에게는 삶의 위기란 있을 수 없다. 왜일까? ] . 위기는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는 절호의 챤스다(9-10).

A. 니느웨왕은 자신들의 공로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했다.

1. 니느웨왕은 회개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했음에도'혹시 누가알겠느냐'는 자 세를 취했다.

2. 왕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조처를 취했다. 8절에서 그는 각기 악한 길에서 떠나라고 하였고,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을 명했다. 이것은 9절의 '하나 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그들을 멸망치 않게 하실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3. 니느웨왕의 '혹시'라는 기대와 믿음은 1:6에서 언급된 이방인 선장의 '혹시' 라는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B. 은혜는 댓가가 아니다.

1.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다. 내가 할 회개를 했으니 다음은 하나님께서 내 게 베푸실 차례라는 자세는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는 행위다. 결코 구원은 주고 받 는 공정거래가 아니다. 용서의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뿐이다. 은혜의 근거 역시 예수의 십자가 뿐이다. 내가 십자가를 믿는 믿음 까지도, 회개도 모두가 하나님이 내려주신 은혜라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내가 금식 을 했고 베옷을 입었고 혹은 재에 앉았다고 해서 당연히 받아야 하는 권리처럼 주 장 해서는 안된다.

2. 우리는 때때로 특별 기도회니, 금식기도니, 철야기도니 하면서 법석을 떤다. 매 우 좋은 일이다. 이 일은 아무나 하는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과의 무슨 무역조건으로 제시하려 들려는 태도다. '내가 00일 금식했으니까, 내가00일 새벽기도 했으니까, 00일 철야 했 으니까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은혜를 주실 것이라는 태도를 같는다. 과연 옳은 신앙 일까? 만일 그러한 행위 때문에 복 받는 다면 그것은 '공로'이지 절대로'은혜'가 아 니다.

3.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온갖 좋은 것들은 그의 주권적인 결정에 따라 값 없이 받는 은혜의 선물들이다. 우리 에게는 하나님께 보상을 청구 하거나 대가를 요 구할 근거나 권리가 없다. 우리들이 받는 은혜는 모두가 주님의 십자가 공로에 근거 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선물일 뿐이다.

4. '혹시'라는 마음 자세는 참된 회개와 겸비의 표현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에 대한 솔직한 의존이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대한 소망' 이다. 만일 우리들이 조금이라도 무엇을 잘한 것이 있다면 우리 속에 '소원을 두고 행하 게 하시려는'(빌2:13)하나님의 은혜다. 이것은 우리들의 마땅한 의무에 지나지 않는 다(눅7:10). 그러기에 우리들은 행위를 하나님의 은혜를 청구하는 보상의 근거로 사 용 할 수 없다(눅17:9).

5.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있는 자이다. 가난한 심령을 가진 자야말로 재 위에 앉 은 사람이다. 그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결코 교만한 사람이 아니 다. 우리들도 니느웨 백성들처럼 일체의 자랑과 자만의 모습을 버리자. 먹기 위해 사 는 인생이 되지 말자. 육체를 위해 사는 자가 되지 말자. 6. 니느웨의 구원은 하나님의 용서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게 된 배경 이 중요하다. 니느웨 백성들이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때문이었다. 물론 선 한 행위가 구원의 바탕은 아니다. 그러나 선행은 참된 회개와 믿음의 증거라는 사실 이다(약2:24-26).

결 론

1. 혹시 자신의 실수로 인한 삶의 위기를 만날지라도 절망하지 말자. 소망을 갖자.

2.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바랄 형편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너무나 사 치스러운 소망이었다.

3. 하지만 이들의 요나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알았다. 우리도 하나님을 알 자. 여호와를 힘써 알자.

4. '내가 이러 이러하게 했기 때문에'라고 말하지 말자. '혹시나'하는 그 분의 자비 에 의지했더니 이렇게 되었다고 고백하자. 그리고 참된 회개의 열매를 맺자. 배고픔 은 힘들고 고통스럽다. 욕심을 금하자. 베옷은 껄끄럽고 창피하다. 불편하다. 어쩌면 믿음생활이란 금식처럼, 베옷 입은 것처럼 고통스러울 때도 있다. 이것을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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