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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넷째 짐승의 진상 (단 07: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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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짐승의 진상 (단 7:15-28)

다니엘은 이 무시무시하고 압도적인 꿈을 꾸면서 꿈속에서도 무척이나 놀라고 번민했습니다. 그래서 그 인자 같은 분을 모시고 있는 천사 하나에게 다가가서 모든 일의 진상이 어떤 것인지 물었습니다. 가브리엘로 추정되는 이 천사가 그 일을 대충 해석해 줍니다. 네 큰 짐승은 세상에 일어날 네 왕이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게 될 것인데 그 나라는 다른 세상 나라들과 달리 영원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의 이 설명에 다니엘은 만족하지 않습니다. 넷째 짐승의 진상을 자세히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짐승은 다른 짐승들과 너무 달랐고 또 흉포했기 때문입니다. 그 짐승이 끼치게 될 해악이 어지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넷째 짐승이 다른 짐승들보다 강하다는 것 자체는 큰 관심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등장하는 지배권력들은 성격과 규모에 있어서 다양할 수가 있고, 그래서 매우 특출하고 거대한 세력도 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강력한 세력이 어떤 특별한 목적성을 띠게 될 때는 문제가 됩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 무한대에 가까운 권력을 사용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넷째 짐승의 진상을 알고 싶어 했던 것은 그것이 크고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거대한 힘을 매우 위험하고 악한 방향으로 사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여기 매우 날카로운 칼이 하나 있다고 칩시다. 날이 아주 날카로워서 닿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베어버립니다. 그러나 날카롭다는 사실 자체는 하나의 중립적인 가치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칼이 매우 폭력적으로 사용된다면 모든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할 수 있고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왜 그 넷째 짐승에게 그렇게 큰 힘이 부여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 큰 힘을 매우 악하게 사용해야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또 알고도 싶었습니다. 사실 문제가 되는 것은 본래의 그 짐승이 아니라 그 짐승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작은 뿔입니다. 원래 그 짐승은 열 개의 뿔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중에 새로운 뿔이 나왔고 그 뿔이 나오자 다른 세 개의 뿔들이 빠졌습니다. 일반적으로 뿔은 권력자를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거대한 왕국이나 왕조에 열 명의 왕이 출현했는데, 나중에 나온 권력자가 다른 세 왕, 또는 세 왕국을 완전히 궤멸시키고 권력을 잡게 된다고 해석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여기서부터 이상한 것은 이 뿔에게는 눈도 있고 큰 말하는 입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뿔이 성도들과 싸워서 이깁니다. 뿔은 머리에 있기 때문에 굳이 눈이 있을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눈이 있다는 것은 스스로 보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뿔처럼 그저 힘만 있는 권력이 아니라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움직이는 세력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출현했던 왕국이나 나라들은 그 자체로 이러한 의도를 가진 것들이 많지 않습니다. 단지 세력다툼이나 시대의 변화와 요구, 그리고 우연, 이러한 요소들이 복합되어 지배계급과 패권자들이 출몰하게 되지요.

의도적인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존재했던 지배세력의 예를 든다면 프랑스 혁명정부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이 혁명정부의 의도는 기존에 존재했던 일체의 권위들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천년이 넘도록 서구사회를 지배해 온 기독교적 질서와 중세의 암흑기적 무지로부터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독립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혁명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개혁 프로그램을 가동했습니다. 예를 들면 혁명 캘린더의 시행인데, 유대적 또는 기독교적 전통으로부터 기인한 7일 1주일을 폐지하고 새롭게 10일을 1주일로 제정해서 한 달에 일요일이 세 번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 혁명정부는 이러한 극단적인 사회변혁 프로그램을 가동하기 위해서 공포정치를 시행해야 했고, 또 내부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권위의 파괴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가져오는 대신 새로운 권위를 위한 진공상태를 초래해서 결국 나폴레옹 황제라는 절대군주의 등장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인류역사에 있어서 프랑스혁명의 의의가 작은 것이 아니지만, 혁명정부 자체는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이 마지막에 나온 뿔이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러한 의도적인 방향성을 가진 권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방향성을 가진 것이었느냐? 그 뿔이 또 입을 가졌다고 했지요? 뿔은 역시 입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얼굴에 본래의 입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뿔이 독자적인 입을 가졌다는 것은 독특한 주장과 의견을 가졌다는 뜻이겠지요? 그 입으로 어떤 말을 했는가 하면 큰 말을 했어요. 목소리가 크다는 것이 아니라 매우 큰 주장, 아무나 할 수 없는 주장을 하는 말입니다. 아주 거만하고 아주 뻔뻔스럽게 큰소리를 치는 입입니다. 그렇다면 그 내용이 무엇이겠어요?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고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대항하고 그분을 모독하는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뿔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성도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복종하고 그 권위에 순복하는 성도들, 즉 이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가진 뿔에게 복종하지 않는 성도들은 핍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과의 싸움에서 이 악한 뿔이 이겼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에 대한 끔찍한 박해를 의미하겠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큰 힘을 가졌고 또 매우 난폭하고 무자비한 짐승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로부터 이러한 설명을 들은 다니엘은 기가 막혔습니다. 심중에 번민하고 낯빛이 변했다고 했어요.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이 흉악한 짐승이 성도들을 쇠 이빨, 놋 발톱으로 먹고 부서뜨리고 짓밟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가 당하게 될 고난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가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라면 단단히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대충 믿고 적당히 신앙생활하는 것으로는 이러한 핍박과 고난을 견딜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넷째 짐승과 거기서 마지막으로 나온 뿔은 일반적으로 적그리스도로 해석됩니다. 적그리스도란 궁극적인 그리스도의 왕국이 성립되기 직전에 나타나 극단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될 존재를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 적그리스도의 활동하는 모습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 13:6-8).

다니엘이 본 짐승과 하는 일이 똑같지요? 즉 다니엘이 꿈에서 본 것과 요한이 이상으로 본 것은 동일한 내용인 것입니다.

어쨌든 여기 나오는 넷째 짐승과 그 뿔, 즉 적그리스도가 역사상 누구였는지를 밝히려는 시도가 많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네 짐승은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제국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시리아의 안티오커스가 유대인에 대한 극단적인 반감을 가지고 박해했다는 역사상의 사실로 이 뿔이 안티오커스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성도를 유대인으로 국한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다니엘의 관점에서 보면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예언은 유대인만을 대상으로 한 예언의 범주를 크게 넘어섭니다. 즉 그리스도의 왕국을 기준으로 하면 여기 나오는 성도를 유대인으로 한정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 함축적인 의미의 다중성입니다. 즉 예언은 한 가지 의미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합니다. 예를 들면 한 가지의 예언이라도 근시적(近視的)인 성취와 원시적(遠視的인) 성취가 모두 있을 수 있습니다. 다니엘의 예언에서 성도는 근시적으로 보면 유대인일 수 있지만, 원시적으로 보면 그리스도인을 의미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언이 이렇게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게 되는 이유는 예언자 자신도 그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은 먼 훗날의 일이기 때문에 예언자는 단지 어렴풋이 먼 산봉우리를 바라보는 정도의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먼 곳에서는 하나의 산봉우리처럼 보이던 것도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두 개나 세 개의 봉우리가 겹쳐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본다면 이 뿔은 유대인들을 박해한 안티오커스라기보다 기독교를 극심하게 박해했던 로마제국과 네로와 같은 몇몇 황제들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적그리스도를 밝혀내려는 시도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역사상에 출현했던 반기독교적인 독재자들을 지목하게 되었습니다. 로마 교황을 지목한 사람도 있고, 히틀러야말로 적그리스도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나 유럽통합을 적그리스도라고 해석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시대마다 적그리스도가 등장하는 것일까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최후의 승리 직전에 나타나 활동하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원수라는 점에서 하나뿐인 적그리스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적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유일하게 사용하고 있는 요한은 그의 서신서에서 복수 개념의 적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18절에서 그는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또 요한이서 17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를 가리켜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당시 맹위를 떨쳤던 영지주의자들을 지목한 것인데, 당시 요한으로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왜곡하고 파괴시키는 이 집단이야말로 기독교에 가장 큰 위협이었고, 그래서 그들을 적그리스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세의 징조들을 말씀하시면서, 마지막 때에 나타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참칭하는 자들을 복수형태로 언급하셨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고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때에 최후의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게 될 것이지만, 그 이전이라도 역사상 그리스도에게 대항하고 성도들을 무자비하게 핍박하는 권력이나 개인을 적그리스도라고 지칭해도 크게 빗나가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겠군요.

말하자면 우리 그리스도인들, 즉 성도들은 끊임없이 출현하는 적그리스도들의 공격과 미혹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협하고 폭력으로 믿음을 빼앗으려는 술책이나 거짓으로 우리의 영적 판단력을 흐리게 해서 진리에서 떠나게 하려는 일들은 모두 이 적그리스도가 성도와 싸우는 전투의 현장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가 왜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불만도 많은데, 적그리스도와 성도의 싸움이라는 시각으로 보면 얼마든지 이해가 될 수 있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는 실수하거나 잘못해서 불이익을 당하고 고통당하는 일을 가지고 성도의 고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주식투자를 했다가 전 재산을 날린 것이 적그리스도의 공격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거야 우리의 탐욕과 무지가 빚은 자업자득이지요. 그러나 그러한 일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무너지게 하고 더 나아가 믿음이 흔들리게 된다면, 그것은 적그리스도의 준동에 의한 싸움에 이미 들어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세상에 살게 하신 이래 무수하게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활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사자굴에 던져지고, 불에 태워 죽임을 당하고, 칼과 총에 목숨을 잃어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어떠한 모습과 형태로 적그리스도의 공격이 다가오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다른 형태로 영적 싸움이 일어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겨야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긴다는 것은 적그리스도를 완전히 물리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니엘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 적그리스도가 성도와 싸워 이긴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고통과 슬픔을 당하고 괴로움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굴복하고 믿음을 저버린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승리인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너무나 평안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까? 적그리스도가 물러갔거나 혹은 휴전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적그리스도는 바로 그러한 평안함을 미끼로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태하고 무의미한 형식만 남은 그리스도인이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이 오늘날의 실정입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왜냐하면 이 적그리스도는 한시도 성도들을 가만두지 않고 괴롭게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꼭 마지막 환란 때가 아니라도 성도는 언제나 적그리스도와의 싸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무 겁내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선은 이 적그리스도가 싸움에서 이기고 성도들이 고난을 당할 수 있지만, 최후의 승리는 성도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고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과 소망으로 적그리스도와의 싸움에서 담대하게 싸워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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