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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드로의 눈물 (막 14: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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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는 병든 자화상 중에는 열등감과 우월감이 있습니다. 이 열등감과 우월감은 전혀 다른 영역의 자화상 같아도 알고 보면 동전의 양면처럼 이웃 사촌입니다. 우월감이란 열등감의 다른 모습입니다. 늘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도 문제지만 '나는 너희와는 달라'라는 우월의식도 사실은 병든 자아의 모습입니다.

주의 제자 베드로는 이 우월감에 늘 가득차 있는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주님이 무슨 질문을 해도 제일 먼저 대답을 해야 직성이 풀리고, 어디를 가도 자신이 꼭 끼어야 성이 차는 특징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우월감은 비교의식에서 나오는 자아의 모습인데, 열등감으로 갈 수도 있고 우월감으로 갈 수 있지만 어떤 경우든 사람을 참으로 피곤하게 하고 고단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나는 행복하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이들 중에는 이 비교의식에서 얻은 결론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에 혹 '나는 행복하다'고 느끼는 분들 조차도 비교의식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그 행복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감정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가정이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여보, 우리 번듯한 아파트 하나 장만합시다.' 그래서 온 집안이 합심하여 10년쯤 뒤에는 우리들의 집을 갖는다는 희망 아래 땀흘려 일했습니다. 집을 장만할 돈을 벌려니까 공휴일에도 남들 같이 자녀들과 함께 가족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참아야 했고, 남들이 외식하면서 삶의 즐거움을 맛볼 때에도 그들은 참아야 했습니다.

마치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남들보다 더 일찍 일어나 일을 해야 했고, 더 늦게까지 가게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돈 버는 시간이 아까워서 잠자는 시간도 줄이고, 가족들과의 시간들도 다 생략했지만 그래도 마음은 이 다음에 좋은 집 하나 장만한다는 부픈 생각 때문에 모두가 견디는 것으로 이해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모자라는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 고민하다가 주일에 눈을 돌렸습니다. ' 그래 주일도 우리의 미래를 위해 쓰자' 결국 그들은 주일의 시간도 자신들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야 저녁 예배시간 부터 손을 댓지만,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고 나중에는 낮 예배 시간도 건드리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10년이 가까와지자 그리던 집을 사게 되었지만, 함께 기뻐해야 할 자녀들은 이미 그들의 곁을 떠난지 오래되었고, 새 집에서 행복을 꿈꾸리라고 생각했던 부부도 갈라설 수 밖에 없을 만큼 심각한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함께 멋있는 생을 살아보자고 자녀와의 시간, 부부와의 관계도 포기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뜨리면서 얻으려고 했던 행복은 그들에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나 따스함이 깃든 가족과의 생활은 이미 만신창이가 된지 오래 되었기에 그들은 회복할 수 없는 좌절감에 몸부림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 요즘 심방할 때마다 자주 고백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나이가 이제 50이 가까워지다 보니까 철이 좀 드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의 삶인지, 무엇이 온 가족이 동의하고 만족해 하는 행복인가를 조금씩 알아가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전에는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온 몸을 불사르며 성취감에 만족해 왔지만, 사실 주님께서 인정하는 삶의 승리와 가족들과 함께 느낄 수 있는 행복과 기쁨은 그런 것과는 좀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입니다.


유월절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지셔서 광야로 인도하시면서 먹이고 입히셨던 그 은혜를 기억하며 가족과 함께 감사로 절기를 보내는 것이 보통인데, 오늘 주님께서는 아주 심각한 말씀을 하고 계셨습니다. '받아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니라' 떡을 떼어 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받아마시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잔을 돌리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미 가롯 유다는 주님을 팔기 위해 그 자리를 떠나갔고, 11명의 제자들만 남았는데 만찬을 마치신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다 나 버리리라.'

그때 베드로가 29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언듯 들으면 참으로 의리있고 용기있는 말 같지만, 이 베드로의 대답에는 많은 문제가 있어요. 차라리 '주님, 제가 부족한 거 아시지만 제가 주님을 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믿어 주십시요' 라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주님 !저 야고보는 버려도 나는 안 버립니다. 저 요한은 버려도 나는 안 떠날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왜 다른 사람을 딛고서 자기를 세워야 되느냐 그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대화법 중에 공격적이고 폐쇄적인 대화법이 바로 이런 류의 표현입니다. 그냥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면 좋은데 굳이 다른 사람을 비교하여야 직성이 풀리는 것 말입니다. 비교의식에서 나오는 우월감은 열등의식의 다른 모습입니다. '나는 달라. 나는 너희들과는 좀 달라.....'

주님께서 그러한 베드로의 말을 듣고서 '고마워'라고 하시지 않고 오히려 한술 더 뜨셨습니다. '무슨 소리야? 너 오늘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 터인데....' 차라리 그 얘기를 안 했다면 이렇게 기가막힌 말씀은 듣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혹을 떼려다가 붙인 격이지요. 사실 주님은 베드로의 연약한 모습을 너무나 잘알고 계셨습니다. '주님. 제가 좀 앞섰네요. 제가 다른 제자들에게 상처를 주면서 까지 나서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물러섰으면 좋았을 것을 31절에서 '베드로는 더욱 힘있게 말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이젠 목숨까지 걸고 있습니다.

대화를 하다보면 지나치게 강조법을 쓰는 사람들은 신뢰성이 결여된 많습니다. 오늘밤 나를 3번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지적해 주시니까 베드로는 더 강한 의지를 나타냅니다. '죽을지언정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적인 뒷받침이 없는 공약은 그야말로 허공에 뜬 외침일 뿐입니다. 버려야 할 자존심을 위하여 베드로는 목숨까지 걸고 있는 것입니다.

66절 이하에 가 보면, 주님께서 로마의 군병들에게 붙잡히신 후, 대제사장의 뜰에 끌려와 재판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만 도망쳤다가 궁금해서 멀찍이 떨어져 구경하고 있는 베드로가 가관입니다. 소극적이고 소심한 모습의 베드로, 주님을 위해 목숨을 걸겠다고 하던 그의 말과는 전혀 분위기가 맞지 않는 베드로의 현 주소입니다.

수요일 저녁 예배시 안내를 해보면 교회를 오시는 분들을 입구에서 만나게 되는데, 그 분들의 발걸음을 보면 대체로 그 분들의 영적 건강 상태를 알 수 있어요. '오늘은 정말 기도합주회 참석해서 하나님 앞에 구할 바를 구해야지...' 그런 기도의 열정을 가지고 당당하게 걸어오시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오늘도 빠지면 목사님이 걱정하시겠지...' 하는 의무감으로 오시는 분들도 있지요. 한 직업에서 10년이면 전문가라고 그러는데 저는 벌써 27년이잖아요. 오시는 걸음걸이만 보아도 다 보여요. '이분은 지금 뭔가 많이 힘드시구나....'

여러분, 특별히 조금 이 역곡3동이 아닌 조금 멀리서 오시는 분들은 우리 안내위원들은 조금 사랑을 표현할 필요가 있어요. 저 인천 연수동에서 오시는 구집사님은 우리 안내위원들이 '오셨어요' 이렇게 지나가는 것보다는 '집사님, 먼 곳에서 버스 2번 타시고, 전철 타시고, 어떻게 오셨어요' 그러고 손 한번 잡아주면 마음에 감동이 되잖아요. 사람은 자기를 알아주는 것 보다 고마운 일이 없어요. 안내위원들은 그런 것을 좀 잘해야 돼요. 상대방의 삶을 좀 알아야 안내가 되는 거예요. 꿔다 놓은 보리자루 처럼 그냥 서있으면 안되는 거예요. 알아주라고 그 시간에 안내를 서는 거예요. '아유 권사님, 일산에서 이렇게 오셨어' 안권사님 손 한번 꼭 잡아주면 거기서 따뜻함에 고마움을 느껴요. '그래. 나 다음 주일날도 또 온다' 참 중요한 겁니다. 작은 것이지만 그 말 한마디 속에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그 말이 나로 하여금 엔돌핀이 돌게 하고 열정이 식지 않게 말이예요. '내가 또 와야지' 그런 의욕을 심어주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사람과 더불어서 화평하라고 하시고 특별히 곳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주의 평화를 선언하라고 그랬잖아요.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힘을 얻는다면 얼마나 좋아요.

베드로는 이런 부분에서 좀 부족함이 있었어요. 주님이 재판을 받으러 저기 계시고 온갖 모욕을 다 당하고 계신데 베드로는 멀찍이서 구경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종 하나가 지나가다가 자기를 보더니 '어, 이 사람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 아니야?'라고 물었어요. 지금 이 종은 확신을 가지고 물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 같다'라는 추측이지요. 그런데 놀란 가슴, 베드로는 너무나도 강조를 했어요. '무슨 소리야? 나는 그 사람 몰라' 조금 있다가 또 한번 얘기합니다. '분명히 이 사람은 갈릴리 사람이야.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 분명한 것 같은데?' '아니야. 나는 그 사람을 몰라' 베드로 옆에 있던 사람들이 한참 있다가 베드로를 쳐다보면서 또 한번 물어봅니다. 그때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서 부인의 강도가 점점 강해져요. '난 저 사람 몰라. 난 그 사람 이름 들어보지도 못했어.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웬일입니까? 베드로는 주님과 자기가 상관이 없는 관계라는 것을 이렇게 까지 얘기했어요.

여러분, 우리에게 최고의 축복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 임마누엘인 줄 믿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최고의 축복이요, 기쁨이요, 은혜인데 이게 웬일이예요. 당신과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말을 지금 저주하면서 하고 있네요.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언제 우리가 그 자리에서 그 말할 지 몰라요. 평소에는 임마누엘,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 그것이 복이고 축복이라고 고백하고 좋아했는데 언제 우리가 당신과 내가 상관이 없는 존재라고 말할 지 몰라요. 왜? 내 육신의 안전을 위해서, 내 이익을 챙기려다 보니까 예수님과 관계가 없다고 해야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때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말이예요.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럴 가능성을 너무나도 많이 가지고 있어요. 주님은 그것을 이미 알고 계신 것이지요.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거야. 내가 너를 잘 아는데 너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어' 그러면서도 주님은 그를 제자라고 품에 안고 다니셨거든요.

여러분,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 귀한 직분을 받으실 때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장로로 부르시고, 권사로 부르시고, 집사로 부르셨을 때, 교사로 부르시고 성가대로 부르셨을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그렇지. 나는 이 직책을 맡기에 넉넉한 사람이야' 그런 생각이 드시나요? '이 사람 충분히 주님 앞에서 엉뚱한 소리하고, 엉뚱한 일할 사람이지만 내가 한번 믿어본다' 믿어주세요. 사람이 제일 감격될 때가 언제냐 하면 부족한 데도 믿어주고 세워주실 때 제일 감격되잖아요? 주님께서 베드로를 그렇게 세워주셨어요. 그런데 베드로는 그 주님의 세우심과 사랑에 그는 정말 실망스러운 모습을 가졌습니다.

사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베드로가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에 두려워 떨다가 '에이, 이제는 다 끝났지. 야 우리 고향으로 가자' 베드로가 선동해서 '나는 고기 잡으러 가겠노라' 그랬더니 같은 그 갈릴리 마을 친구들이 '나도 가노라' 그러고 쫓아왔어요. 그래서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에서 다시 옛날처럼 고기잡는 어부로 돌아갔어요.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자기를 기다리고 있어야 되는데, 말씀을 의지하고 기다리고 있어야 되는데 부활하시고 나니까 이 친구들은 다 사라져 버렸어요. 수소문해보니까 고기 잡으러 옛날 고향으로 돌아갔답니다. 기가막힌 일이잖아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주님께서 그 먼 곳 갈릴리까지 찾아가셨어요. 가보니까 고기잡고 있어요.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어, 주님이 웬일이시니...' 이젠 반가워도 반갑다고 말도 못하겠어요. 너무 미안하고, 너무 챙피하고, 너무 부끄러워서...

사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좀 연약해지고 낙심하면 우리가 다시 주님 앞에 오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심방이 필요하고 권면이 필요해요. 그런 분들은 찾아가야 돼요. 가서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손잡고 그리고 나와야 해요. '알아서 나오겠지' 하루, 이틀을 미루다가 그들은 결국 세상으로 깊이 빠져가는 거예요. 여러분들의 삶속에 특별히 권면의 사명을 가지신 권사님들은 늘 여러분들 주변에 내 손길이 필요하고, 내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찾아다녀야 돼요. 그게 권사의 사명입니다.

주님이 그 권사의 일을 하시잖아요. 갈릴리까지 찾아오셨어요. 그리고 베드로에게 말씀합니다. '너 나 사랑하니? 너 아직도 날 사랑하고 있니?' '그럼이요'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여라' 또 사명을 주셔요. '너 집사 좀 해라. 너 권사 좀 해라. 너 장로 좀 해라. 너 목사 좀 해라' 또 사명을 주셔요. 그리고 주님이 또 물어봅니다. '네가 다른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있느냐?' '그럼요. 주님 알고 계시잖아요' '내 양을 쳐라' 주님이 세 번을 물으셨어요.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세 번을 물으시니까 베드로가 긴장을 했어요. '이거 보통 일이 아니다'

베드로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집니다. '주님, 아시잖아요. 제가 얼마나 연약한 자인 줄 주님 아시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주님은 떠나지 않는다고 그랬다가 제일 먼저 떠난 것이 저이구요, 목숨 걸고 주님 지킨다고 큰 소리쳤지만 로마 군병 앞에 도망친 것이 저라는 것을 주님, 아시잖아요. 내가 어떤 인간인지 주님이 아시는데 주님, 왜 이러십니까? 그런데도 내게 사명을 또 맡기시다니요?' 베드로의 눈에서 피눈물이 쏟아집니다. '알아. 내가 너 알지. 내가 너를 너무 잘 알아. 하지만 내가 너에게 또 사명을 맡긴다. 내 어린양들을, 내 양들을 좀 먹이고 쳐라' 저를 비롯해서 여러분들은 할 만해서 사명주신 것이 아니예요. 변덕 많고, 주님보다 내 육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고, 그러는 거 알면서도 주님은 또 우리에게 사명을 주셔요. 그리고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챙피해서, 자존심 상해서, 부끄러워서 머뭇거릴 때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같이 일하자. 한번 더 일해보자'라고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럼으로 베드로는 실패의 원인도 많이 있었어요. 우월감, 그건 또 다른 열등감이라고 그랬지요. 비교의식 속에서 늘 그는 살았습니다. 소심한 마음으로 그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는 주님을 부정하고 저주라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런 실패의 원인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일어설 수 있었어요. 다시 말하면 베드로가 승리하고 회복할 수 있는 원인도 있었어요.

오늘 말씀 72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여러분, 우는데 생각하고 우는 사람 있나요? 베드로가 우는데 생각하고 울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헬라어의 원어를 보면 '에피발론 에클라이엔'이라는 말은 '부딪치며 통곡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그냥 눈물 조금 흘린 것이 아니라 머리를 벽에 부딪치면서 온몸을 부딪치면서 손을 가슴을 치면서 머리를 쥐어뜯어면서, 욥 같은 경우에는 재를 티끌을 뒤집어쓰면서 옷을 찢으면서 몸부림치면서 통곡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베드로의 회복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는 주님의 말씀의 기억인 줄로 믿습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있으면 때때로 우리가 베드로처럼 그렇게 잘못되고 잘못된 길을 가다가도 말씀이 기억나서 그로 하여금 다시금 일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주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베드로는 새로운 회복의 단계에 들어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이 기억나고 말씀에 깨달음이 오니까 어떤 결과가 오나요? 회개가 따라오지요.

여러분, 은혜받는 사람의 필수적인 통과의례는 회개라고 하는 거예요. 회개라고 하는 것이 없이는 우리는 은혜의 자리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애통하며 회개하면, 애통하지 않으면, 회개하지 않으면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해요. 여러분, 성도들 중에서도 이 말씀은 들었으나 애통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얼굴 보면 맨송맨송해요. 저는 그게 다 보이거든요. '저분은 너무 맨송맨송 해' 언제까지 여러분 맨송맨송 하시렵니까? 생각하며 울어야지요. 몸부림치며 통곡을 해야지요. '내가 이 정도 밖에 안되는데 주님은 그런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이렇게 주님은 내게 또 은혜를 주시다니...'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지요.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주님께서 이미 이렇게 연약한 베드로, 사탄 마귀에게 끌려 다니고 유혹 당할 베드로를 알고 계셔서 이렇게 예언하신 적이 있습니다. '시몬아, 사탄이 너를 밀 까부르듯이 그렇게 하여도 네가 실족치 않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노라' 주님이 그 연약한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 중보의 기도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서있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까지도 들으시고 아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오늘도 중보하십니다. 우리를 향해서 주님은 눈물로 기도하십니다. '연약한 것 알지만 믿음으로 서라. 세상 도전이 강하지만 사탄 마귀에게 승리하리라. 내가 귀신을 쫓아내고 사탄 마귀를 이길 수 있는 권세를 내가 너희들에게 주지 않았느냐? 그 권세를 써라. 그 능력을 발휘해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오늘 이 놀라운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베드로는 결국 다시금 일어서서 이제는 입으로가 아니라 몸으로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다해서 충성한 주의 제자가 된 줄로 믿습니다. 비로소 베드로가 베드로답게 된 거예요. 주님의 은혜요, 주님의 사랑인 줄 믿습니다. 이 사랑, 이 은혜에 붙잡혀서 여러분들 눈물이 헛되지 않고, 주님 앞에 열납되는 성도의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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