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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빌라도의 선택 (막 1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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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삶입니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 모두 평생의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직업을 선택하는 일도 그렇고, 배우자도 선택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나아가 신앙을 선택하고, 교회를 선택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크게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부름에 대한 응답이지만 우리의 결단도 필요하기 때문에 선택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프로이드는 '어릴 때의 경험이 그 사람의 직업을 결정하는 큰 요인이 된다'고 말합니다. 신앙적인 안목을 가진 종교 심리학자들도 어릴 때 누구에게 양육되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의 질이 결정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교회학교 교사 40여명과 함께 설악산을 다녀왔습니다. 전체 교사가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모처럼 느낄 수 있었던 은혜롭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교사들에게 이런 당부를 드렸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한 어린이의 일생을 좌우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사명의 자리가 너무도 중요하기에 이 자리에 있기가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교사 한사람의 잘못된 방향 감각과 가르침이 한 사람의 평생을 후회하며 살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바른 길로 인도하여 진리와 생명의 길을 가게 한다면 그 보람은 말로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일 것입니다. 교사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가르치는 것 이상이지요. 어릴 때 누구에 의하여 양육받았느냐 하는 것은 삶의 태도나 직업의 선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지금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직업은 어떻게 선택이 되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가끔씩 성도들과 직업에 대하여 '어떻게 이 직업을 갖게 되었습니까?'라고 물으면 '할게 없어서 이거 하고 있어요.'라고 대답하는 분들을 만나게 되면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아마도 그런 말씀을 하는 본인도 속상할 것입니다. 적어도 내가 하는 일에 대하여 자신감과 자부심이 없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요? '존 칼뱅'의 논리를 따른다면 'vocation' 즉 나의 직업이 하나님께서 주신 천직이라는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향하여 이 정도는 다짐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건 평생에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저는 이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이런 자부심을 가지고 일을 한다면 어떤 종류의 일이든 관계없어요. 그런 인식에서 보면 직업은 정말로 귀천이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자부심이 없이 '할게 없어서 이거 하고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평안의 성도들은 어떤 동기에서 직업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바라기는 또 다시 '할게 없어서 이거 하고 있습니다'라는 대답은 정말로 안 나왔으면 하는 바램 간절합니다. 이 일은 크든지 작든지 정말로 내가 해야 할 일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며 그러기에 나는 이 일에 내 인생을 걸었어요' 라고 말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선택하는 일 중에 직업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배우자입니다. 한 결혼 리서치 그룹이 도시에 사는 젊은 커플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현재의 배우자를 만족하십니가?' 다시 말하면 '또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지금의 배우자를 선택하겠습니까?'라는 물음이었는데 90%가 넘는 이들이 '아니오'라고 대답을 하여 충격을 주었습니다. 흔히 결혼 후 5년 정도까지를 '신혼기'라고 말합니다만, 대부분 신혼기에 있는 사람들의 의식이 이러하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자신의 배우자에 대하여 뚜렷한 자부심이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지난 13일은 저희 부부가 결혼한 지 22주년이 되는 뜻깊은 날이었습니다. 그 날이 주일이어서 별다른 행사를 하지 못하고 마음만 전하였습니다만, 따뜻한 사랑의 고백은 빼놓을 수 없었답니다. 우리 집사람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제일 듣기 좋아하는 말이 뭐냐하면 '갈수록 신혼 같다....'는 말입니다. 22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랑도 신혼 같고, 열정도 신혼같고, 관심과 배려도 신혼 같다는 말이지요. 쉽지않은 일이지만 인생에서 부부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면 반드시 실천해야할 목표요 사명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배우자라는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기대함으로서 적지않은 실망과 혼란을 겪습니다. '저 사람은 적어도 내가 이루지 못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을거야....'라며 대리만족의 기대를 한다던가, '저 사람을 인하여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라는 기대감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행복에서 한걸음 더 멀어지곤 하지요. 나의 부족한 부분들을 배우자를 통하여 채우고자 하는 그 욕심 때문에 늘 요구하게 되고, 상대방은 그것을 채워주는 것이 행복을 이루는 것이라는 착오속에 늘 고단한 삶을 살게 되지요. 배우자를 자기의 소유로 만들어 가다 보니까 상대방은 자유롭지 못하고 늘 구속되어 있는 상태가 되는 거예요.

율법에 찌든 백성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은 그런 점에서 시원한 냉수 한그릇과 같은 즐거움을 선사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그들이 노동때문에 피곤한 몸을 풀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지키면 지킬수록 늪과 같아서 감당하기가 어렵지요.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삶의 문제의 핵심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렇습니다. 예수 안에 사는 사람은 진정으로 자유를 느끼는 삶인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이 예수 안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곧 이 세상 속에서 맛볼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의 삶입니다. 배우자 역시 사랑하고 신뢰한다면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어야 돼요.

그런데 정 반대로 하지요. 시간이 갈수록, 결혼 생활이 배우자를 얽어매니까 피곤하지요. 여러분, 집에 전화 자주 하지 마세요. 하루에 한번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 놈의 휴대폰 때문에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가지요. 사실 저도 집에 있을때면 쉴새없이 전화가 옵니다마는 심지어는 화장실에 가 있으면 더 자주 오는것 같이 느껴집니다. 중간에 나와서 받을 수도 없고... 몇 번씩 울리다가 끊기는데... '나 화장실에 있었어요' 라고 할 수도 없고... 어느 때는 집사람이 휴대폰으로 오는 전화는 화장실로 찾아와 '여보, 전화받아요' 그럴때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우리의 선택은 신앙적인 것입니다. 저는 성도들에게 이런 말씀을 종종 해왔습니다. '교회 선택은 직업이나 배우자 선택보다 더 중요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저의 말을 잘 이해를 못해요. '교회 선택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교회라고 말할 때에는 굉장히 넓은 의미예요. 내 인생을 걸어도 좋을 만한 그런 공동체, 나의 모든 삶을 오픈하고 싶은 가족같은 공동체, 고난과 환희를 기꺼이 나눌 수 있는 공동체라는 의미이지요.

그러므로 교회에 등록한다고 하는 것은 내 삶을 다 내놓는 행위이기에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놓을 뿐만 아니라 목사에게도 내놓고 성도들에게도 내놓는 것이지요. 오픈하지 않고 함께 하기란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모릅니다. 어느 선까지 자기를 감추고 살아야 되는지 수위 조절하기가 피곤하지요. 하지만 정말 자유로운 성도들은 모든 것이 다 오픈되어 있어요. 자신의 부족한 부분까지도 오픈되어 있기에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해지고 서로간에 친밀감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좋은 면만 보나요? 그건 연애할 때 얘기지요. 결혼하고 나면 평소에 보지못했던 부족한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고 감추인것 없이 다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까지도 사랑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면서 부부는 백년해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선택할 때는 적어도 그런 비중을 두고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교회 선택은 정말 중요합니다. 목사와 만나서 여러분이 행복해 질 수도 있고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목회자와 성도가 잘 안 맞아서 어려움을 당하는 분도 참 많은줄로 압니다. 또한 성도와 성도와의 만남도 중요합니다.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지만 자기와 전혀 다른 성향의 사람을 만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선교회는 평생을 함께 간다고 하니까, 어떤 성도는 선교회를 바꿔달라고 요청하는 분도 있고, 제 나이가 원래는 2살이 더 많은데 주민등록에는 적게 되어 있다면서 애교를 떠는 분도 있지요. 그 분의 마음의 고민을 제가 잘 알지요. 오죽하면 그러겠습니가? '저 사람 다른 교회로 안가나...' 아니면 자기가 다른 교회로 옮겨 갈 수 밖에 없는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를 등록한다고 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기에 무엇보다도 기도하며 신중히 결정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너는 내 백성이라. 너는 성민이라. 내가 너를 복중에서부터 불렀노라'고 말씀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계신 것도 모르고 우리가 세상에서 방황하며 제 멋대로 살다가 어느날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여전히 나를 부르고 계시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이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지요. '주님, 나를 받아주옵소서... 나는 주의 백성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과의 언약이 평생을 가야 하는데 그것이 왔다 갔다 하지요. 때로는 인간적인 유익 때문에, 때로는 욕심과 명예 때문에 말입니다.

15절에서, 빌라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판결을 내린 이유는 군중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몰려드는 군중이 많았지만 그 군중들에게 주님은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군중은 흐르는 물과 같고, 떠다니는 구름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군중이라는 집단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 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그 많은 군중들이 '또 오늘은 무슨 기사와 표적을 보여 주실까?'라고 관심을 가졌지만, 오히려 주님은 그들을 뒤로하시고 제자들을 데리고 산으로 가셨습니다. 당신께서 기도해야 할 때, 당신의 제자들의 위한 양육의 시간이 필요할 때 주님은 단호히 군중을 떠나셨어요.

주님께서는 빌라도에게 의해 십자가에 달리시는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빌라도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요구합니다. '당신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는다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 빌라도에게 있어서 이것보다 더 큰 부담은 없었을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무엇보다도 여론을 무서워하지요. 그래서 마음에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12월이면 대통령 선거가 있는데 후보자들을 벌써부터 오버페이스를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후보는 신실한 크리스챤이라더라.' 그러면 성도들은 솔직히 마음이 가는 것이 사실이예요. '이왕이면 지역이나 정당의 연줄을 떠나서 믿음의 형제에게 한번 이 나라를 맡겨보자' 하지만 그 분들도 가는 곳마다 표심을 모으기 위해 절에 가서 앉아 있는 모습이 뉴스에 비춰질때다 별로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니엘을 생각합니다. 그는 뜻을 정하여 느부갓넷살 왕의 신상 앞에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번만 하면 된다는 왕의 요청에 그의 친구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까지도 함께 거절했습니다. 자신의 출세에 결정적으로 영향이 미치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그들을 보고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정말로 그들은 사자 굴로, 뜨거운 풀무불로 던져졌지만 신싱ㄹ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지셔서 오히려 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최고의 재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축복이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이어야 함을 잘 보여주는 간증입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서 정치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빌라도가 군중들에게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군중은 이렇게 소리치며 대답합니다.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만약 당신이 예수를 놓아주면 가이사 황제의 충신이 아닙니다' 군중들이 빌라도를 정치적으로 협박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고민하던 빌라도는 결국 군중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만족을 주기 위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니라' 그러나 그에게도 마음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그렇게 판결한 다음 물을 떠오라고 시킨 뒤에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씻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요청한 것은 너희이니 이 사람의 피에 대한 값은 너희가 치루라' 아마도 빌라도는 그렇게해서라도 마음에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을 것입니다.

빌라도 이후로 세상에는 재미있는 유행어가 생겼습니다. ' 나 손 씻었어...' 옳지 못한 일을 하다가 그 부분에서 떠나는 사람들은 꼭 그렇게 얘기합니다. 하지만 빌라도가 손을 씻은 것 처럼 군중들이 보라고 손을 씻는 위선적인 행동이라면 100번을 씻어도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그는 자기의 행동에 대한 책임조차 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자기가 선택하고 결정한 일에 대하여 책임질만한 그런 수준의 사람이 못되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변함없이 예배를 시작하면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신앙고백 하면서 여러분은 뭐라고 했습니까? '군중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사....' 그렇게 고백했습니까?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실 빌라도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도 만났고,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들도 만났습니다. 자기의 고민을 나누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러한 모습은 책임회피를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한 것이지요.

대통령이 어떤 일을 결정해 놓고 통과의례를 치루는 모습들을 자주 봅니다. 전직 대통령들을 초청해 놓고 만찬을 하며 주요한 국정을 논의한다고 합니다만, 그 분들 밥 먹이고 용돈 챙겨 드리는 일 외에 별다른 효과가 없는 듯 보이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회 각계 각층 인사를 초청하여 청와대에서 밥 먹이고 선물주고 보내는 일도 마찬가지 입니다.

성도 여러분, 빌라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10절을 한번 보실까요?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로라' 예수님은 죄가 없는 신실하신 분이며,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 시기로 인하여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빌라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눈앞에 이익이 더 급했습니다. 총독의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정의로운 판단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결국 그는 진리이신 예수, 우리의 구세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잠깐의 유익 때문에 주님의 이름을 팔아버리지는 않았습니까? 눈 앞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과의 언약을 저버리지는 않았습니까?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바로 그 믿음을 육신의 정욕을 위해 바꿔버리는 어리석음을 범치는 않았느냐 그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나 같은 죄인, 정말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리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의 피흘림은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까? '너는 내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어도 좋을 만큼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야.......내가 너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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