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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서 제자 삼으라 (막 16: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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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 교계에서 여성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조이스 마이어'는 그의 저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에서 '오늘날 믿음을 가진 자들 중에서 구원의 기쁨을 상실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자문하면서 그것은 바로 그 기쁨의 근거를 잘못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70명의 제자들이 둘씩 짝을 지어 전도하러 나갈 때, 주님은 그들에게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와 병자를 치유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힘입어 세상을 향해 나아갔고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명하니 귀신이 쫓겨가더이다'라며 승리의 체험을 만끽하며 크게 기뻐하였지만, 주님께서는 오히려 '너희가 귀신이 쫓겨간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충고하셨습니다. 곧 기쁨의 근거를 보다 분명히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3장 18절에서,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선언함으로서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의 동기가 하나님이어야 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기쁨의 근거를 잘못 설정함으로 인해 믿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기쁨과 평안을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기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 바로 그 믿음 때문에 기뻐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믿음과 의심이라는 요소는 정말 한 자리에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에 의심이라고 하는 이물질이 개입되면 삶이 복잡해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를 가졌던 아담과 하와에게 사탄이 의심을 불어넣었을 때 신뢰가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의심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주는 것인 줄 믿습니다.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두려움과 염려가 사단이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평안을 주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 땅에서의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인데 이 사실은 얼마 후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이 핍박을 받아 순교가 임박했을 때 확증해 주었습니다. 행 7:55에 보면,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 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주께서 부활 승천하시기 직전에 귀한 사명을 받았습니다. 20절입니다. '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하시니라' 이 말씀 속에는 세 가지의 과정이 점진적으로 전개되어 있습니다. 먼저 나아가는 삶의 시작입니다. 믿음의 생활을 하면서 진전이 없는 생활이라면 곤란합니다. 그것은 마치 한 달란트를 가진 자가 그것마저 잃어버릴까 두려워 땅에 파묻고서 주인이 계산하자고 할때까지 기다리다가 한 달란트를 손상시키지 않고 온전하게 보관하였노라고 가져온 경우와 같습니다. 하지만 이 종은 칭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큰 책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실수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실수할 수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 자세로, 성도의 입장에서는 실수를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의 일을 하면서 '실수하면 어떻게 할까?' 염려할 필요가 없어요. 문제는 실수할까봐 두려워하는 두려움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실수하였다고 해서 그것으로 책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실수할까봐 두려워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하는 악하고 무익한 종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사업하는 분들은 사실은 그 자본금도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에 늘 노출되어져 있습니다.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지향적인 용기를 가지고 앞을 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에 그들은 문을 박차고 이제는 나아가는 적극적인 성도의 삶, 제자의 삶을 살게 된 줄로 믿습니다. 나아가야 합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면 축도합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새로운 결단과 용기를 가진 저 백성들이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에 하나님 저들과 함께 하옵소서.

사실 세상을 나아간다고 하는 건 두려운 일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면 흔히 하는 말이 사회에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그 나아갈 사회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지요. 모든 학교에서 배운 대로 질서정연하고 그리고 정의롭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사회가 아니지요. 그래서 처음 사회에 나가면 혼란을 겪습니다. 분노하기도 합니다. 많은 고통도 받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내어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마치 이리떼가 우글거리는 것과 같아요.

'피터 와그너' 박사는 말합니다. 이 시대는 특별히 21세기는 영적 전쟁이 극심할 세계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육신의 정욕과 세상적인 모든 인간의 모습들이 하나님의 사람들과 정면으로 충돌할 어느 세기보다 가능성이 많은 세기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나아가면 도처에 사단의 세력들이 눈을 부릅뜨고 우리를 대적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여러분들이 세상을 향해서 나아간다고 하는 것은 사실 두려운 일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바라보실 때에 부활의 주님을 그들이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나아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나아가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지난 한해동안 여러분의 입술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우리가 증거하는 이 예수가 당신의 구주이심을 믿으라고 여러분의 입을 열은 기회가 몇 번이나 되시나요? 365일 가깝게 오는 동안 그렇게 입을 열지 못했던 여러분들, 주님을 만나지 못했던 제자들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져야지요. 주님을 만난 이후에,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에는 달라져야지요.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본문 말씀을 보면 두루 전파하는 사역을 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무엇을 해보려고 하는 연약하고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이제는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는 것입니다. 전해도 두루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라고 했습니다. 사실 사도행전 13장 이전만 해도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는 그저 자신들만의 부흥과 성장으로 만족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 능력있었습니다. 그 교회를 섬기는 사도들은 주님과 함께 했던,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던 그러한 사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원 사도라고 말합니다. 은혜가 넘쳤고, 기적이 일어났고, 날마다 그 수가 더했습니다. 더 바랄 것이 있나요?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에는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만, 예루살렘에서만 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으로 주님은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입니다.

오늘날 사마리아는 어디입니까?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여전히 핍박과 환란이 있는 곳입니다. 중국이 그러한 곳이고 북한이 그러한 곳입니다. 중동이 그러한 지역입니다. 사마리아로 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사마리아는 유대와 상종도 하지 않던 곳입니다. 내가 주님을 믿기 전에는 당신과 상종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그들과 상종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고 나서는 그들이 상종할 이유가 있는 그런 이웃이 된 것입니다. 북한을 왜 도와야 하는지, 왜 중국 선교를 해야 하는지, 왜 동남아의 가난한 나라들을 우리가 선교해야 하는지, 저 모슬렘의 중동권을 왜 우리가 위험을 무릅쓰고 평신도 선교사들이 전문 사역자로 들어가야 하는지, 이유가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사마리아까지 가기를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땅끝까지 주님은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당시에 땅끝은 로마를 말합니다. 지금의 땅끝은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어요. 우리가 가기 어렵고 갈 수 없는 곳들, 그런 곳들을 주님은 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선교사님들이 먼저 앞장서서 십자가의 군사로 그 앞길을 향해 나아갑니다. 선교사를 보낸다고 하는 것은 곧 우리가 전파하는 일에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책임을 갖는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교라고 하는 것은 이제 선택 과목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전공이요, 필수 과목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IMF가 오기 전에 우리 한국 교회는 선교의 거품 현상이 일었습니다. 너도 나도 선교에 대해서 바람이 불었습니다. 교회 주보에 선교사라는 이름이 최소한 파송은 못해도 단 몇 푼이라도 보내면서 협력 선교사 이름을 올려놓아야 체면이 서는 줄 알았습니다. 동남아시아에 몇 백만원 들여서 조그마한 교회, 엉터리라고 하나 지어야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IMF라고 하는 경제적인 환란이 오고 나니까 제일 먼저 거둬치운 것이 선교였어요. 선교비 보내는 것을 중단하고, 선교사 보낸 것을 파송을 취소하고 귀국시키고, 국내외의 선교의 부분이 제일 먼저 상처를 입었습니다.

사실 선교사에게 선교비를 보내다가 '우리가 어려우니까 못 보내겠습니다'라고 통보하는 것은 선교사에게 사망 선고를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요. 그렇게 한국 교회는 선교의 거품 현상이 IMF라고 하는 경제 환란을 통해서 한번 거둬졌어요. 그리고도 선교가 선택 과목이 아니라 필수 과목이요, 전공 과목이라고 여겨지는 교회들만 선교가 계속되게 되었습니다. 선교는 희생입니다. 선교는 눈물입니다. 선교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선교는 곧 하나님의 일인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 제자들은 주께서 함께 역사하시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사실 제자들이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고 해서 그들이 이전과 달라진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말씀에 은혜를 받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고 달라진 것이 뭐가 있어요? 여러분들의 얼굴이 달라집니까? 여러분들이 외형이 달라집니까? 뭐가 달라집니까?

여러분 결혼을 하고 나면, 그리고 신혼여행 갔다오면 제일 먼저 느끼는 것이 세상이 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전 세상이 다 내 것 같아요. 그러나 사실은 내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이지 세상은 여전히 그 자리입니다. 뭐가 달라진 거예요? 내가 달라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늘 어려운 환경, 여러 가지 환경적인 어려움을 이야기할 때마다 늘 세상적인 부분들을 이야기합니다. '이 놈의 세상이 바뀌어야지. 이 놈의 제도가 바뀌어야지' 사업이 안되면 늘 그럽니다. 경제적인 여러 가지 시스템이 바뀌어야 돼요. '이 땅에 어떤 법률이 바뀌어야 이 세상이 잘 될거야' 아니면 얼마 후에 있을 대통령 선거처럼 '사람이 바뀌어야 돼. 대통령이 바뀌어야 돼' 자리만 바뀌면 됩니까? 그렇게 수없이 바뀌어왔습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16대이지요? 그 말은 16번 대통령 자리가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연임을 한 것까지 포함을 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뭐가 달라졌나요? 구조가 문제가 아니고, 시스템이 문제가 아니고, 법이 조항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람, 사람이 달라져야 할 줄 믿습니다. 사람이 달라지면 안에서 숨어 벌벌 떨던 사람들이 문을 박차고 나아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한 마디 못하던 벙어리 성도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당신의 인생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기쁨과 구원의 기쁨은 없노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거예요. 그들은 이제 홀로 살아가는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 주께서 함께 하시는, 주님이 동행하시는 그러한 당당한 주의 백성들이 된 줄로 믿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이 시대에 여러분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이제는 우리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지만 두렵지 않고 외롭지 않아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은 매주일 세상을 향해 나아가서 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고 돌아오시면서 여러분 손에는 여호와 닛시의 승리의 깃발이 늘 높이 들려져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때때로 실패하고 돌아오실지라도 또다시 주의 말씀과 주의 은혜에 힘입어서 세상을 향하여 다시금 나아갈 때는 용기 백배하여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당회가 있는 날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주의 일꾼들을 새롭게 임명하고 새로운 자리에서 주님의 일에 충성을 새롭게 하는 날입니다. 여러분들은 기대하지요. '내가 어느 자리에, 내가 어느 부서에 일을 하게 될까?' 아직까지 아무도 모릅니다. 내가 어느 부서의, 어느 일을 하게 될 지 모를 것입니다. 내가 속장이 되었는지, 내가 강사가 되었는지, 내가 교육부인지, 선교부인지 잘 모르실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 연약하고 소극적인 그러한 삶의 모습을 가졌다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가졌을 거예요. '좀 좋은 자리 가면 좋은데...' 좋은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갈채가 있고, 박수가 있는 자리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 얼굴을 내밀기 좋은 자리일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힘이 좀 덜 들고, 경제적으로 씀씀이가 필요하지 않는 자리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좋은 자리인가요?

우리는 찬송가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이렇게 불러야 할 것입니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 골라서 가오리다' 뭘 골라요? 여러분이 하기 좋은 일을 골라서 다닙니까? 여러분의 기분에 맞고 정성에 맞는 일을 골라 다닙니까? 그러나 주님은 진정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디든지 가오리다' 오히려 주님, 어려운 자리, 힘든 자리, 경제적으로 많이 물질이 필요하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자리에 저를 사용해 주세요. 진정으로 새롭게 예수 안에서 거듭난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모습은 정말 달라질 줄 믿습니다. 이 달라진 모습으로, 달라진 사명감으로 새해를 힘차게 달려나가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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