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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녀 됨의 축복 (요 0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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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 3주 동안 미국의 시애틀, LA, 얼바인 등지를 돌면서 헌당 예배와 큐티 집회 등을 인도하며 바쁜 일정을 보냈습니다. 미국의 한 호텔에 머물면서 말씀을 준비하던 중에 너무 은혜가 충만해 1시쯤에 기록을 마친 후 1시간 동안 손을 들고 선포했습니다.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있었던 그 특별한 은혜를 “복음의 능력과 축복”이라는 시리즈로 7주간에 걸쳐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일곱 가지 복음의 능력(권세)과 축복들이란 첫째는 자녀 됨의 권세와 축복, 둘째는 죄 사함의 권세와 축복, 셋째는 자유함의 권세와 축복, 넷째는 치유됨의 권세와 축복, 다섯째는 믿음의 권세와 축복(기적의 권세와 축복), 여섯째는 성령 세례의 권세와 축복 마지막으로 의롭다하심의 권세와 축복입니다.

영적 권세와 축복은 과거형
일곱 가지 복음의 권세와 축복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은혜는 과거형이라는 것입니다. 영적 권세와 축복은 장차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교회에 다녀도 영적 빈곤과 삶의 무기력함을 느끼는 이유는 복음의 권세와 축복을 장차 올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결정적인 실수입니다.
부모는 사랑해서 자녀를 임신하는 게 아니라, 임신하는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자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과 동시에 무한한 사랑을 베푸십니다. 따라서 진정한 영적 권세와 축복은 과거형인 것입니다.

이미 주어진 권세와 축복을 믿고 선포
두 번째로 일곱 가지 권세와 축복에 대해 이미 이뤄진 것으로 믿고 선포하면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곱 가지 능력과 축복들에 한결같이 ‘네가 믿으면’이라는 전제가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질병을 치유하셨는데, 그것을 우리가 믿지 않기 때문에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4절에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초등학생부터 어른들까지 누구나 소지하고 있는 것이 휴대전화기입니다. 사람들은 휴대전화기를 꺼내 자신이 원하는 숫자를 누르기만 하면 상대방과 언제든지 통화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미 주어진 일곱 가지 능력과 축복들을 원하는 대로 사용하기만 하면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복음의 권세와 축복을 믿고 선포한다면 곧 우리의 것이 되고 맙니다.
그날 밤에 저는 이미 주어진 일곱 가지 권세와 축복을 깊이 묵상하던 중에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것은 확실히 믿고 있는데, 어떤 것은 제대로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사함을 얻고 천국으로 가는 축복은 말만 해도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든 질고를 치유하신 축복은 잘 믿어지지 않더라고요. 왜냐하면 저에게 암이 여섯 번이나 재발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고혈압이 있고 당뇨가 있으며 신장이 좋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미 주어진 권세와 축복을 선포하는 데 주저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축복을 누리지만 고난을 받거나 사업이 안 되거나 현실이 고통스럽거나 아무리 기도해도 병이 낫지 않을 때는 포기해 버립니다. 저는 이 사실을 발견하고 굉장히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인간의 죄와 질고를 모두 해결하셨다고 수없이 말을 하면서도 실제로 그 사실을 선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사실을 깨닫고 너무 감격한 나머지 새벽 1시 30분까지 손을 들고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회복이 일어나고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있었습니다. 요즘 저는 하루에 100번에서 1,000번까지 ‘네 병은 치유되었다’라고 선포합니다. 현실적으로 아직 치유되지 않았지만, 이런 비밀을 발견하고 그날 밤에 역사가 이뤄진 것입니다.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인간은 오랫동안 고난을 당하고 질병을 앓게 되면 그 현상에 짓눌리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생각을 버리고 성경의 원리를 믿으며 계속 선포해 나간다면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과 역사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은혜라는 자물쇠에 믿음이라는 열쇠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열쇠를 사용하지 않으면 자물쇠는 항상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은혜의 자물쇠에 믿음의 열쇠를 꽂아 돌리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항상 사용할 수 있는 일곱 가지 복음의 능력과 축복에서 첫 번째는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에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한 단어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에서 ‘주다’는 동사가 과거형임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다’라는 동사가 영어로 현재형인 ‘give’도 아니고 미래형인 ‘will give’도 아닙니다. 분명히 과거형인 ‘gave’입니다. 여기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된 은혜의 자물쇠에 믿음의 열쇠를 꽂아 돌려서 그 뚜껑을 열어봐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 됨의 능력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다면 복음의 권세와 축복에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자문해 보았습니다. ‘네가 진정 믿느냐’라고요. 한 시간 정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에게 문제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여섯 번이나 암이 재발했다는 상처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암이 재발하면 수술을 받아야 하고 독한 약을 먹어야 한다는 공식으로 생각은 노회(老獪)돼 있고 어느덧 질병의 노예가 돼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박차고 일어나 이미 주어진 복음의 권세와 축복을 선포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 됨의 전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다는 것이고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논리적이거나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에 동의하는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믿음이란 논리나 과학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시며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치유나 부활은 논리나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으로 그 믿음을 선물로 받아들일 때 가능합니다.
믿음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가장 믿지 못한 사람이 바로 마르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시자,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 다시 살 줄을 안다고 대답했습니다. 자신의 경험, 생각, 상식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자제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고기잡이로 돌아갔습니다.
믿음의 세계는 불합리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을 뚫는 또 따른 차원의 세계입니다. 믿음의 세계에 대해 감정적이고 아무 논리도 없으며 주먹구구식으로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자, 니고데모는 이해하지 못하고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귀신 들린 아이를 데리고 온 아버지가 예수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이의 병을 고쳐주시기 전에 아버지의 말부터 고쳐주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는 곧 “내가 믿나이다”라고 말을 바꿨습니다. 그런데 말은 바꿨지만 실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 9:24)라고 말했을 때, 믿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믿음의 실체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도 예수님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인간적인 생각, 지식, 의심의 벽을 허물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대로 영접하는 것이 복음의 권세와 축복을 받는 제일 신호탄입니다. 그럼, 믿음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지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즉 말씀은 예수님이십니다. 2, 3절 말씀을 봅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은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물위를 걷으시고 문둥병자를 고치시며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그리 대단한 것이 못됩니다. 4, 5절 말씀을 읽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빛은 인간들을 둘러싸고 있는 질병, 죽음, 마귀의 세력들을 깨뜨리시고 안으로 들어오셔서 밝게 비추십니다. 6절에서 8절까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빛이 아니고 빛에 대해 증거하러 온 사람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초점은 모두 예수님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9절에서 11절까지 말씀을 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적으로 비참한 세상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 빛이 세상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 빛에 대해 알지 못하고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참 빛을 잡아다가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 빛이신 예수님을 알고 그분 안으로 들어가면 천지 창조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고 생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의 권세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모든 권세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놀라운 권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괜히 쑥스러워집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자꾸 거부하게 됩니다. ‘나’ 같은 사람이 무슨 능력이 있겠느냐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놀라운 권세를 가진 사실을 믿음으로 자주 선포해야 합니다. 천지의 모든 권세를 받았음을 믿고 크고 강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처음에 잘 안 되겠지만 믿음을 갖고 자주 반복하면 다음부터 자연스럽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천국으로 간다는 사실이 자연스럽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상속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나쁜 짓을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자꾸 선포하면 그것이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친밀히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무 기뻐하셔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보호, 인도, 공급, 양육 등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개념입니다.

자녀 됨에 대한 마귀의 유혹을 경계
그런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자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 말씀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됨의 축복을 받았는데, 어느 날 마귀가 와서 이런 사실을 헷갈리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원래 인간은 마귀에게서 났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마귀와 너무 오래 함께 살았기 때문에 성격마저 마귀의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의 성격을 가리켜 문화라는 이름으로 ‘개성’이라고 말합니다. 그게 귀신의 성격인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아버지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끈질긴 유혹에 넘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마귀가 사용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자녀로 하여금 육신의 아버지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로 하여금 육신의 자녀에게 부정(父情)에 대해 경험된 게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녀에 대한 잘못된 양자 개념의 주입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라는 소리를 한 번쯤은 들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양자 콤플렉스를 갖게 됩니다. 마귀는 자녀들에게 친부모가 아니라고 속삭여 줍니다. 그러면 잘못된 양자 개념이 심화돼 갑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 됨의 권세와 축복마저 의심하게 만들고 고착화시킵니다.

하나님 앞에 당당한 자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시며 복을 주시고 미래를 보장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확산시켜 나가야 합니다. 따라서 현실에서 아무리 힘든 일을 만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 됨의 축복으로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4절에서 17절까지 말씀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 로마서 9장 4절 말씀에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예배, 약속, 치유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됨을 항상 선포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자녀 됨의 권세와 축복의 실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권세와 복을 주시고 보호해 주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비굴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지만, 하나님 아버지 앞에 떳떳이 나아가 필요를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워온 자녀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인해 새로움을 입은 당당한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자녀 됨의 축복을 충분히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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