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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례요한의 증거 (요 0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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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11절에서 세례 요한에 대해 ‘여인이 낳은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임을 언급하셨습니다. 이 시간에는 그러한 세례 요한에 대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닦고 그분을 우리에게 소개하기 위해 온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들이 예수님을 잘 보고 만날 수 있도록 높은 산은 낮추고 낮은 골짜기는 높이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사야는 그에 대해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소리의 특징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소리는 메시지를 전한 후 사라집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의 삶 전체를 통해 ‘나는 중요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기 의견이 반영되지 않거나 자기 생각이 무시당하면 화를 냅니다.
세례요한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예수님을 좋아했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다가오자, 요한은 어머니 엘리사벳의 뱃속에서 기뻐 뛰놀 정도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임을 밝혔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예수였습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결코 평안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머리속은 예수로만 가득차 있었습니다. 20장 31절을 보십시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모든 사람이 알고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1장에서부터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을 설명합니다. 말씀, 빛, 생명이신 예수님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지와 사명
그 후에 세례 요한을 언급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직접 예수님을 볼 수 있도록 장애물들을 치웠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역할이 필요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내가 사람들 눈에 장애물이 되어 전도를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교인이나 교회 때문에 예수를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을 막는 장애물이 되지 마십시오. 장애물을 치우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요한에 대한 소개를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임무를 띠고 보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존귀한 사람임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선한 뜻을 두시고 삶을 인도하십니다. 삶의 현장에서 자부심과 사명을 갖고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일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이 말을 더 깊히 묵상해 보면 내 능력이나 탁월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여인이 낳은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자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탁월한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가난하고 무식하고 건강이 좋지 않으며 나이가 많을 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사명과 메시지를 받은 사람은 참으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시기와 질투와 모함을 받아서 일찍 죽었지만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부유하게 오래 살아도 인생 목적과 의미가 없이 사는 사람은 허무하고 불행하기 때문입니다.

시작은 있지만 목적이 없는 삶이 방황입니다. 지성적으로 방황하는 사람들, 권력을 지닌 채 방황하는 사람들, 모든 것을 소유했으면서도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삶의 목적이 희미한 소유는 방황을 낳기 때문입니다. 삶의 목적이 없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고 누릴 지라도 초조한 삶, 끙끙거리며 잠 못 이루는 삶을 삽니다.
행복은 소유가 많은 사람의 몫이 아닙니다. 목적이 분명한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삽니다. 오래 사는 사람이 아닌 자기의 사명대로 사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6절에서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그가 신이 아닌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특별한 대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의 설교가 불처럼 강렬해서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질 만큼 존경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의 본질적인 유혹은 신이 되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높은 자리에 오르면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합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합니다. 오만한 자세로 인권을 유린하고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가난한 자, 억울한 자를 생각치 않습니다. 자기 입장만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자기의 종으로 삼으려 합니다. 이처럼 자기가 모든 사람 꼭대기에 군림하려는 것이 신이 되려는 유혹입니다.
결혼의 의미를 망각하고 부인을 종처럼 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직원들 위에 군림하며 왕처럼 행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는 특별하다는 이런 모습들 또한 신이 되려는 유혹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낮은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어떤 위치에 있든지 남을 지배하지 마십시오. 인권을 유린하지 마십시오. 어떤 높은 자리에 있을 지라도 항상 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에게는 두 가지 사명이 있었습니다. 첫째, 빛의 증거자입니다. 빛이 아닌 그 빛의 증거자로서의 사명입니다. 둘째,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예수를 믿게 하는 전도의 사명입니다.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보여주는 사명입니다.

그늘을 걷어내는 빛이신 예수님
자신의 사명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왜 사십니까? 결혼해서 아이를 낳기 위해 사십니까? 아이 키우기 위해 사십니까? 물론 그런 것들도 작은 목적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목적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을 위해 살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기억하십시오.
여기서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세상에 왔습니다. 이것이 내 삶의 목적이 되면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 있을 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과 상관이 없으면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곳에 물질과 시간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왔지만 유감스럽게도 세상은 어둠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은 이런 짙은 어둠 속에 빛을 증거하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빛을 막는 어떤 장애물도 용납하지 않고 치워버리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습니다. 온 힘을 다해 장애물을 걷어내야 빛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내 역할입니다.

여러분이 직업의 의미, 삶의 의미를 분명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 때문에 예수를 믿고 구원받고 세례받고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막연하게 전도하는 것 아닙니다. 나 때문에 곁에 있는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예수를 믿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나를 통해 동료가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사장이 되면 신우회를 만듭니다. 그러나 직원들을 착취해서 개척교회하지 마십시오. 직원들에게 잘해 주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법으로 돈을 많이 벌어서 하는 선교헌금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십시오. 내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게 해 주십시오. 직원들의 입에서 ‘우리 사장님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겠다’는 말이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진짜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이 바뀌면 예수님을 믿을 것입니다.
우리가 말만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동네 주변을 청소 하면 사람들이 감동을 할 것입니다. 억울한 일 당하고 손해 보고 희생하고 양보하면 사람들이 감동을 받습니다. 이것이 전도법입니다. 자기 주장 다 하고 자기 것 모두 챙기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등을 돌릴 뿐입니다.
우리 교회 전도법은 간단합니다. 주차문제 없어야 됩니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것입니다. 결국,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하자는 것이 요한의 주장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세례 요한의 위대성이 여기 있습니다. 그는 빛이 아님을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선언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빛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빛에 대해 증거하려 온 사람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광야의 외침 ‘오직 예수’
그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 자신은 주님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나아가서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설명합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묵시적 동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묵시적 동의를 하는 것을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로 생각합니다. 묵시적 동의는 모든 분야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로 착각하지 말 것을 얘기합니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혼돈하지 않도록 분명히 말합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혼돈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가 누구인지를 물었습니다. 요한은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여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지나가면 없어지는 소리였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한 후 조용히 사라지는 소리였습니다. 우리는 뭔가 흔적을 남기고 싶어합니다. 지나가는 소리로만 남지 않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뿌리내리기 원합니다. 존경받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26, 27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영적 태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예수였습니다. 예수님 때문이라면 수치를 당하고 어려움을 겪는 것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한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는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임을 즉각 알아봤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기막힌 이해를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2절과 7절을 보십시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요한이 본 메시야는 고난을 겪는 사람이었습니다. 메시야는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알려진 화려하고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요한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계시록에서도 이러한 예수님에 대해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라고 표현합니다. 어린양 예수님은 침묵하고 한 번도 변명하지 않고 수 많은 고초를 겪으시며 내 죄를 모두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 참모습에 대한 영적통찰
그분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자기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죄인처럼 불쌍하고 처절하게 죽으셨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더불어 요한은 이 어린양 예수님을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으로 설명합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와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볼 수 있습니다. 물위를 걷고 귀신을 쫓아 내고 문둥병자를 고치신 현상적인 사건을 통해 보는 예수가 아닙니다.
모든 인본주의자들은 예수의 인간적인 측면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소외된 사람들 편에 서서 이들의 인권을 보호해 준 사람으로만 이해를 합니다. 반면 세례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달랐습니다. 요한이 본 예수님은 성령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었습니다.
많은 무신론자, 회의론자, 휴머니스트들이 갖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너무나 천박하고 인간적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단지 위대한 인간으로 보았습니다. 르낭의 예수전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보면 너무나 그럴 듯하게 예수님을 설명하지만 예수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서의 예수, 성령을 부어주시는 예수,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백지 같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한 것은 그분에 대한 지식이 너무나 인간적이며 자기 기준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적인 통찰력이 없으면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주시는 은혜와 생명과 구원과 축복과 영적인 기쁨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믿으십시오. 그분을 깊히 묵상해 보십시오. 주님은 살아계시기에 묵상할 수록 여러분에게 분명히 나타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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