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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듭남의 축복 (요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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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세 부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자기가 살고 있는 삶의 의미를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인생의 목적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무지하게 동물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부류는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실제로는 잘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니고데모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알기 때문에 어떤 고통과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행복하고 의미있게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을 가리켜 ‘무신론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삶의 목적을 잃고 살아갑니다. 무신론자의 최대 고민은 죽음에 대한 불안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영원을 거부했기 때문에 자신이 죽은 후에 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부류의 특징은 어떤 형태의 종교를 가지고는 있고 자기 자신은 삶의 의미와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것이기에 불안해 하고 갈등합니다.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적당히 살아갑니다.
이 세 번째 종류의 사람이 오늘 성경에 나타난 ‘니고데모’라는 사람입니다. 1절에서 니고데모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에 대한 첫 번째 설명은 ‘바리새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바리새인이라는 뜻은 ‘분리주의자’입니다. ‘나는 너와 다르다’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고 살기 때문에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확실히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아주 엄격하게 도덕적으로 살려고 애썼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당시에는 이들이 6천 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가장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세력이었고, 이들 중에서 대 율법학자나 경건한 지도자가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니고데모가 바로 그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두 번째, ‘유대인의 관원’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이들은 산헤드린 공회 의원을 의미합니다. 7천 명 중에서 70명만 뽑히는 사람입니다. 산헤드린 공회 의원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모든 분야에서 법을 집행할 수 있고, 경찰권과 권력을 가진 단체입니다. 그들은 사형 외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1절은 니고데모가 유대인이면서도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또 10절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네가 이스라엘 선생으로서 이것도 모르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선생’이라는 칭호를 받는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요한복음 19장 39절에서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라는 말과 함께 등장합니다. 이 니고데모는 예전에 예수님을 찾아갔던 니고데모가 아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재정적으로 부유한 사람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 19:39-40)”며 그가 예수님의 시신을 처리해 처리해주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정리해 보면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라는 종교적 그룹과 유대인의 관원이라는 권력그룹에 속해 있고 지성인이었으며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배고픈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억울한 사정이 있거나 옷을 못 입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아부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는 한 밤중에 찾아올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검증이 되지 않은 예수에게 찾아와 상담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인 이 사람이 왜 예수를 찾아 왔을까요?

니고데모를 혼란케 한 ‘예수’
우리는 이 두 가지 질문을 연결해 보면 다음과 같은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졌으나 뭔가 불안해합니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살아왔지만 내면의 불안함이 있어 밤중에라도 예수라는 청년을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라는 청년이 병자를 낫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강력한 지적인 호기심이 발동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니고데모가 믿어왔던 엄격한 율법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본문을 보면 니고데모가 말은 하지 않지만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라는 청년을 비판할 수도 지지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단순히 어떤 사실을 믿는 행위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의심과 혼란과 극도의 호기심에서 출발합니다. 처음부터 믿어지지 않습니다. 거부하고 불안해하고 혼돈 속에 있다가 빛을 보는 것입니다. 그 빛을 보고 내 마음 속에 흔들릴 수 없는 분명한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가 호기심과 여러 영적갈등을 느끼며 밤중에 예수를 찾아갔지만 19장에 가서야 믿음이 생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많은 과정과 시간을 거쳐서 하나씩 내 안에 빛과 진리를 깨달으면서 만들어지고 성숙해집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 첫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 하신다면 당신이 행하는 이 기적과 표적은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좀더 알아보고 싶고 혼돈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합니다.

니고데모의 이 말속에는 우리가 이해할 만한 말이 많습니다. 그는 ‘내가’라는 말 대신 ‘우리가’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는 인생의 주체를 자기 스스로 책임지는 존재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집단 속에 자신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유교문화와 군대문화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원래 남자는 그런거야’라고 왜곡된 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소리지르며 권위적으로 삽니다.
신앙에 있어서는 ‘우리’보다 ‘내’가 중요합니다. 삶에 있어서는 ‘우리’로 살 수 있지만 죽음 앞에서는 ‘우리’가 죽지 않고 ‘내’가 죽습니다. 부인과 아무리 오래 같이 살았어도 죽을 때에도 같이 죽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니고데모는 ‘우리’라는 집단 속에서 자신을 정당화하며 살았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니고데모의 말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선생인줄 ‘아나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 인식의 사람입니다. 아는 것은 힘이 아닙니다. 많이 알면 괴롭기만 합니다. 믿음이 힘입니다. 아는 단계를 넘어 믿음의 단계로 갑니다.
니고데모는 모든 정보의 확인, 인식의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마 예수는 우리와 다른 특별한 존재일 것이다” 혹은 “아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일지도 모르겠다”라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구원과 믿음은 아닙니다. 성경을 읽는다거나 교회에 나온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통해 예수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생긴 것은 아닙니다. 니고데모가 바로 이와 같은 상태였습니다.

또 한 가지 니고데모의 말속에는 예수가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모는 부인할 수도 긍정할수도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구도자라고 합니다. 반대는 하지 않지만 긍정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좋은 감정만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예배에 온 사람 중에도 이와 같은 사람이 있을 줄 압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호기심과 내적인 불안을 가진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단순하면서도 직선적으로 대답하십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아주 엄청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라며 하시는 말씀은 중요한 말씀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열쇠는 ‘거듭남’입니다. 우리의 가치관과 종교 문제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거듭남을 받았는가’입니다. 예수님은 질문하십니다. ‘거듭났습니까?’
우리가 익숙한 것은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익숙하기 때문에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하면 불안합니다. 그곳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삶에 대한 말을 하면 괜찮지만 죽음에 대한 말을 하면 불안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인간의 불안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후에 대한 것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음을 환영하지 않는 이유는 저 세상에 대한 불안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지 않으려 하고 죽음이 오면 눈물 흘리며 괴로워합니다. 병이 들면 불안해 하는 것도 죽음에 대해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일 죽음 이후에 아무 것도 없다면 사람이 동물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인간은 식물과 동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천국도 없고 영원도 없이 현실만 있다면 도덕적으로 살 이유가 없습니다. 영원을 부인하고 저 세상을 부인하면 좋지만 불안해집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언어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영생’이라는 것이 없다면 ‘영생’이 없다는 말입니다. ‘지옥’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은 ‘지옥’이 있다는 말입니다. 지옥이 없다면 그 단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없다면 ‘사랑’이라는 말을 쓰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고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사랑’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물이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우리는 식물과 다릅니다. 우리는 고민하고 불안해하고 몸부림치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영원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았을 때 인간은 괴로워합니다. 영원히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이 영원으로 가는 문을 깨닫지 못할 때 방황하는 것입니다. 현실의 삶에서 만족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천국에 가든, 지옥에 가든 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아들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실존하는 ‘천국’
고아가 된 아이나 입양된 아이에게 원래 부모가 없었던 것이 아니듯 천국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삶이 고독하고 추하고 허무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삶이 이 곳이 아니라 저 곳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모에게서의 탄생이 진정한 탄생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거듭남’이라고 말합니다. 니고데모가 이 말을 듣고 알아들었을까요? 4절을 보십시오.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니고데모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에게는 인간적인 지식은 있었지만 영적인 통찰력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제2의 탄생을 아십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세계에 문을 열고 들어가 보셨습니까? 하나님이 이 새해 아침에 질문하십니다.
여러분이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는가, 혹은 집사나 장로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제2의 탄생을 알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중요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수도 만질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제1의 탄생이 동물적인 것이라면 제 2의 탄생은 영적인 것입니다. 거듭난 자만이 진정한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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