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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과 기적 (요 04:4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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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인이고 종교적으로 성숙한 니고데모가 밤에 찾아왔을 때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신분이 천하고 종교적으로 미숙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네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종교적으로 미숙한 수가성의 여인은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 기뻐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동네로 뛰어 들어가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며 환희와 감격에 찬 목소리로 외칩니다.

고향에서 핍박 받는 선지자
이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사역을 마치고 갈릴리로 가십니다. 사마리아에서 갈릴리로 가려면 나사렛 지경을 통과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성장하신 나사렛에 가시지 않고 곧바로 갈릴리로 가셨다는 사실입니다. 43-45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왜 예수님께서 나사렛을 지나치고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그것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얘기가 누가복음 4장 24절에도 나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향에서 가족들이나 친족들에게 냉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위에서 한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형제도 재산 싸움을 벌이고 사업 경쟁을 하면서 모함하고 고발하여 재판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
그런 일은 성경에도 많이 등장합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깊은 우물에 들어갔다가 대상에게 팔려 갑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왕을 찾아 기름 부으려 할 때 다윗은 아버지와 형들에 의해 철저하게 배제되고 무시당합니다.

구약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고향 아나돗에서 존경받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쫓기고 핍박당하고 마침내 죽음을 맞이합니다. 신약의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족들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고난을 받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다른 곳에선 환영받지만, 고향에서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런 곳에서는 기적도 많이 베풀지 않으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칭찬이나 격려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섭섭한 마음은 있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사람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사람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아시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 줄 것인가를 전혀 기대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자신을 향한 비난, 조소, 시기 같은 것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핍박과 무시가 있었지만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오히려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고 존경했습니다. 아마 선입관이 없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이 성장하신 30년 동안의 생활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선입관은 좋은 면도 있는 반면,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여 한 사람의 미래를 막기도 하는 좋지 않은 것입니다. ‘쟤, 어렸을 때부터 내가 잘 알아!’ 과거의 사람만 생각하고 미리 판단해 버리기 때문에 그 사람은 크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
우리는 현재를 보지 못하고 항상 과거를 돌아보는 게 문제입니다. 자신이 판단해서 “나, 그거 못해!”라고 말합니다. 과거의 실패로 인해 어떤 일을 할 것을 요청하면 못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발목이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는 새로운 것으로 가득하며 항상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의 변화할 미래를 보고 만남을 가진다면 굉장히 신선해 집니다. 비록 그 사람이 수가성의 여인처럼 살았다 해도 예수님을 만난 후로 위대한 전도자로 탈바꿈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서로 미래를 보고 만나고 축복해 준다면 그 만남은 훨씬 새로워지고 감동이 있을 것입니다. 선입감을 버리십시오. 기존 생각, 과거의 경험, 상처를 무시하십시오. 믿어 주고 격려해 주면 사람은 꽃이 피는 법입니다.
또 한 가지,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고 존경했던 까닭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활동을 목격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기적을 베푸시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말이나 글로 이해한 게 아니라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말이나 글로 아는 것보다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 확실하고 능력이 있습니다.
46, 47절 말씀에 가버나움에 살고 있는 왕의 신하 얘기가 나옵니다. 이 사람에게 병든 아들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예수님을 만나러 가버나움에서 갈릴리 가나까지 찾아옵니다.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 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우리는 주변에서 자신의 힘으로도, 현대 의학으로도 어쩔 수 없는 병 때문에 평생 고생하다 죽어 가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병치레를 많이 했기 때문에 병든 사람을 보면 동지 같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병든 사람을 잘 이해하도록 병치레를 많이 하게 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는 자신이 아픈 것보다 사랑하는 자식들이 아파하면 더 힘들어합니다. 죽어 가는 자식을 보는 부모의 심정은 “차라리 내가 대신 죽고 싶다”라고 말합니다. 제가 아는 어느 분은 근육 마비로 죽어 가는 아들을 두고 있습니다. “목사님, 아들이 스무 살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애하고 나하고 자살할 수는 없고, 죽어 가는 아들을 볼 수가 없어 교통사고나 났으면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신은 잘 믿지 않지만, 현대의학으로도 어쩔 수 없으니까 3년여 동안 병 잘 고친다는 사람은 다 찾아다녔답니다. 돈도 많이 썼습니다. 가짜인 줄 알면서도 산기도에 가서 안수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그게 부모의 심정입니다.

아버지의 마음
왕의 신하가 아들이 아팠을 때 똑같은 심정을 가졌습니다. 가버나움에 사는 신하가 갈릴리 가나에 와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십시오. 저가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요청을 듣고 48절에서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이 아버지에게서 두 가지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왜 가버나움에 살고 있는 아버지가 아들의 병으로 인해 예수님을 찾아왔는가?
하나,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가 눈 먼 자의 눈을 뜨게 하고, 귀머거리의 귀도 열리게 하고, 문둥병도 고치고, 앉은뱅이도 일어나게 한다”는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둘, 아버지는 “혹시 내 아들의 병도 고쳐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합니다.
셋, 아버지는 마음이 조급한 나머지 “예수라는 분을 꼭 만나야겠다”는 마음에 하룻길을 걸어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가버나움에서 갈릴리까지 거리는 약 이십 마일입니다. 그 먼 길을 걸어오며 한 걸음씩 뗄 때마다 “아들이 죽지는 않았을까!”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죽어 가는 아들을 두고 먼 길을 떠나는 아버지의 심정은 굉장히 복잡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나. 미친 짓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님께 “내 아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내 아들을 도와주십시오”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구원은 요청하는 것입니다. 주여! 저를 살려 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보다 더 위대한 기도는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는 일은 요청입니다. 요청은 겸손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요청하지 않습니다.

네 믿음 대로 되리라
예수님께서 아들의 병을 고쳐 주기 전에 먼저 아버지에게 믿음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말씀보다 표적과 이사와 그리고 기적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말씀을 하면 별로 마음에 두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적을 보이고 표적을 나타내며 이사를 일으키면 ‘와! 진짜네’하면서 말씀을 듣습니다.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49절 말씀을 보십시오.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 오소서

이 말은 마르다와 마리아가 그들의 오라비가 죽어갈 때 한 얘기와 비슷합니다. “예수님이 여기 계셨다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버나움에 오셔서 아들의 병을 고쳐 달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심정이 이런 것입니다. 건방져 보이는 아버지의 요청은 비판하기보다는 굉장히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집에까지 와 달라는 요청을 받고 예수님께서 50절에서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이 말씀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말씀을 듣는 순간 신하의 마음에 혁명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집에까지 오실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에 믿음이 생겨 예수님이 오시지 않아도 그 말씀이 곧 능력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아버지의 마음에 “아멘”하는 평안이 찾아 왔을 겁니다. 그리고 더 이상 말도 질문도 없이 그 자리를 떠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51, 52절 말씀입니다.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냥 집으로 돌아갑니다. 중간에서 자신의 종을 만났습니다. 종의 표정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주인님, 아들의 열이 떨어졌습니다.” 아버지는 열이 내렸다는 말에 그냥 흘려버립니다. 언제 떨어졌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에게 들은 말이 있어 그 때를 맞춰 보려는 겁니다. “어제 칠 시에 떨어졌습니다.” 주인이 계산해 보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바로 그 시간입니다. 53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왕의 신하와 온 집이 다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두 번째 표적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말씀과 믿음의 관계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확신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의심하는 도마에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동료들의 말도 믿지 못했습니다. “직접 예수를 목격하고 두 손과 옆구리를 만지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만져 봐라”고 하십니다. 만져 보고 난 후 도마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네가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더 복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실체
믿음이란 보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기적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살려주었기 때문에 믿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기도했는데 죽을 수도 있습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믿음입니다. 반드시 살려주는 것만 믿음이 아니란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인생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전개되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게 믿음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하인을 낫게 하신 얘기가 나옵니다. 먼저 백부장이 “내 하인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말을 듣고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하십니다. 이 때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오심을 내가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다만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습니다. 나도 윗사람인데 내 종더러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만 하십시오.” 그 때 예수님께서 놀라십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내가 보지 못했구나.” 위대한 믿음입니다. 위대한 믿음은 보지 않고도 믿는 것입니다.

작은 믿음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걷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였습니다. 그런데 의심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물에 빠졌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하고 책망하셨습니다. 물위를 걷고 있어도 빠지는 경우가 있고, 보지 않고 믿는 경우도 있습니다. 믿음의 실체는 기적도 표적도 아닌 말씀입니다.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과 기적
둘째, 믿음과 기적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능력을 행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불쌍한 사람에게 병을 고쳐 주신 적은 없습니다. “그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라는 구절에 주목해야 합니다. 전혀 믿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때는 병을 고쳐 주기 전에 믿음을 만들어 주십니다. “할 수만 있거든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십시오.” 예수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그 믿음 가지고는 네 아들의 병을 고치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아버지는 즉시”내가 믿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할 수 만 있거든”에서 “내가 믿나이다”로 금세 바꿉니다. 예수님께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1장 22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아원에서 자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학교에 가려면 큰 산을 넘어야 합니다. 산만 없으면 학교에 가는 게 쉬운데…. 목사님이 오셔서 이 말씀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어린 아이가 그대로 믿었습니다. “하나님, 저 산을 없애 주세요.” 기도하고 아침에 보니 그대로 있었습니다. 또 기도해도 그대로 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트랙터들이 나타나 산을 갈기 시작했습니다. 공사가 시작돼 산을 깎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도시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산을 밀어버렸습니다. 아이의 기도에 응답하신 겁니다. 우리는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헛기도로 시간만 낭비하는 꼴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는다고 하면서 확신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었는데 눈 뜨고 나서 다시 의심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십시오. ‘믿은 대로 되리라.’ 보지 않고 듣지 못해도, 기적이 없고 원하는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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