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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천명을 먹이신 예수님 (요 0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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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리하면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에서 고위 관료이고 지성인이었던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에 대한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4장에서 예수님은 이름도 없고 교육도 받지 못했으며, 남편을 다섯이나 두고 부끄러운 삶을 살던 한 여인에게 다가가 “내가 네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주고 싶다”며 구원의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5장에서는 38년 동안 병석에서 절망하고 있던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며 치유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6장 말씀에서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배불리 먹이고 열두 광주리를 남게 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6장 말씀을 유심히 살펴보면 재미있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3, 4장 말씀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영혼에 대해 갖는 관심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그 영혼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5장 말씀은 38년 동안 병으로 고생한 사람을 고치신 사건이고, 6장 말씀은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이야기입니다.
3-6장 말씀을 전체적으로 조감해 보면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알고 채우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영적 필요뿐만 아니라 육체적 필요도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정신적 질환, 육체적 질환, 영적 질환 등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헤어나올 수 없는 인생의 덫에 걸려서 방황하고 괴로워할 때,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고치시며 회복시키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좀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1, 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구름 떼처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따라다녔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원을 받기 위한 것도 아니고, 고상하고 영적인 진리를 배우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이유는 주님께서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는 충격적인 사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 고치는 기적을 다시 보려는 흥미 때문에 몰려든 무리들이었습니다. 비교적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모인다고 해서 전부 좋은 모임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기가 있다고 모두 진리는 아닙니다. 누가, 왜 모였느냐가 중요합니다.

육체의 필요를 채우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느라 지치고 끼니마저 굶고 있는 무리들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이리저리 목적도 없이 움직였습니다. 나중에 이 군중은 예수님을 죽이는 데 결정적인 한 몫을 했습니다. 군중이라는 게 허깨비와 같은 존재입니다. 여론이라는 것은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는 겁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이 방황하는 이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3, 4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갈릴리 해변에서 조금 높은 언덕에 오르면 많은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평지가 나옵니다. 마가복음 6장 35절, 마태복음 14장 13절에 보면 “때가 해질 저녁 무렵에 예수님이 빈들에 가셨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허기에 지쳐 있는 무리들을 보시고 먹을 것을 줘야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저는 항상 이 말씀에서 큰 은혜를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적인 것을 주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이고 병든 사람을 치유하시며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히는 일은 중요합니다. 이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를 믿든 믿지 않든 다른 종교를 갖든 갖지 않든 상관하지 않고, 우선 병든 사람들을 고치고 외롭고 소외된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일을 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필요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배가 고플 테니 한 끼 밥이라도 먹여야지’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주변에 배고픈 사람이 있으면 먹이고 헐벗은 사람이 보이면 옷을 주고 병든 사람을 위로하여 개인적으로 축복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예수님의 관심은 ‘이 사람들을 어떻게 먹일까’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 빌립에게 ‘이 사람들이 배가 고파서 지쳐 있지 않느냐? 이 사람들을 다 먹이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라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빌립식 믿음, 안드레식 믿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많은 사람들을 다 먹이지?”하는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 예수님은 배고픈 사람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둘, 이 말씀에는 다른 숨은 뜻이 있습니다. 해질 무렵인데 5천 명이 먹을 수 있는 분량의 떡을 준비할 가게가 있을 리 없습니다. 갑자기 어디서 그 많은 분량의 떡을 준비하겠습니까? 그리고 떡을 살 돈을 어디서 구합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디서 떡을 사오지?”하고 물으십니다. 이 말씀은 떡을 사오라는 게 아니라, 빌립을 시험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종종 이런 시험이 있기도 합니다. 때로 안 되는 줄 뻔히 아시고도 “어떻게 하지?”하고 물으십니다. 6, 7절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빌립의 대답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며 이성적입니다. 쉽게 말해 빌립은 ‘이것은 도저히 안 되는 일’이라며 단정짓고 말했습니다. 일리는 있지만 해답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가 불쑥 나타납니다. 8,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여기서 세 가지 사실을 살필 수 있습니다. 첫째, 안드레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안드레는 ‘어떤 아이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 알렸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의 가난, 부정부패 등 모든 문제를 우리에게 해결하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해결할 능력이나 지혜,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안드레의 방법을 보십시오. 예수님께 있는 그대로 알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셋째, 안드레도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하며 속으로 웃었습니다.

여기서 ‘빌립식 믿음’과 ‘안드레식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성의 신앙과 믿음의 신앙입니다. 두 가지 신앙에서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빌립은 누구든지 공감할 수 있는 합리적인 대답을 했지만 해답이 아니었습니다. 안드레는 이성적인 대답이 아니었지만, 주님이 원하시면 어떤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고 가능한 최선의 것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시간, 환경,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 하는 게 주님의 뜻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최선의 것’을 사용하셔서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빌립과 안드레는 어떤 차이를 보입니까? 빌립은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방식의 믿음을 가졌고, 안드레는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방식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안 되는 일이지만,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결정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의 의도를 읽고 눈치챘습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의도와 말씀이 있어야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의도한다고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믿음은 주님의 결정에 대한 응답이다
예수님은 허기진 무리를 먹일 것을 결정하셨고, 안드레는 그 의도를 읽었습니다. 예수님은 안드레가 내놓은 최선의 것을 매개체로 해서 기적을 만드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임을 믿으니까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십시오”라고 말한다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조심할 게 있습니다. 무조건 ‘믿습니다’하며 금식한다고 만사형통이 아닙니다.

주님의 결정에 우리가 믿음으로 화합해야 합니다. 주님의 의도는 묻지도 않고 “주님, 이 사람을 살리실 줄 믿습니다”라고 한다고 살아나지 않습니다. 안수하고 금식한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의 생각, 희망, 기대일 뿐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희망과 기대를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주님의 결정에 대한 나의 응답일 뿐입니다. 주님의 의도, 마음을 읽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보시고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죽어 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제가 이 백성을 구원하고 싶습니다.’하고 주님의 마음에 동의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선교는 절대 내가 원한다고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서 만드는 게 아니라, 주님의 의도와 계획에 응답하는 게 선교입니다. 내가 가서 교회를 세우는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미 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면서 ‘네가 할 수 있느냐’라며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계획을 세우셨다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나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지만 주님의 계획에 동참하겠습니다”라고 하면 주님께서 5천 명을 먹이십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어떤 일을 할 때 목사가 좋은 아이디어가 많아서 하는 게 아닙니다. 가만히 주님이 원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주님이 움직이시는 쪽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마가복음 6장을 보면 재미있는 사실이 더 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은 “오십 명, 백 명씩 무리를 지어 사람을 앉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실 때, 그 방법은 굉장히 조직적이고 합리적인 것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믿음으로 일을 실행할 때는 합리적이고 조직적으로 추진해야 합니다. 주먹구구식으로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떼를 지어 사람들을 앉히신 후에 예수님은 “물고기와 보리떡을 가져 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축복하십니다. 기적은 예수님의 축복 속에서 이뤄집니다. 내가 원한다고 기적이 일어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축복에 동참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제가 하나님의 의도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믿음입니다. 그저 필요, 상상, 기대감으로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 무리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는 더 이상 말씀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5천 명이 배불리 먹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진행됐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구약에 등장하는 기름병처럼 계속 공급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경제 원칙 ‘부스러기는 모으라’
인간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일어나는 기적과 부흥에 대해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수학 공식이나 인간의 개념에 맞지 않아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12, 13절 말씀입니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여기서 5천 명을 먹이신 사건만큼 위대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5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후 예수님께서 “남은 것을 버리지 말고 다 모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경제 원칙입니다. 남은 것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가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먹고 남은 음식을 버리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굶는 사람들을 모두 먹일 수 있습니다. 미국, 유럽, 일본 사람들이 버리는 먹거리를 모으면 세계의 기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인간 죄악의 문제는 ‘포식’하는 데 있습니다. 포식한 후 버리고 낭비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일으켜 5천 명을 먹이는 일에 아끼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남은 ‘부스러기’는 아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경제 원칙이고 정신입니다. 무엇이든 다른 사람에게 조건 없이 베푸십시오. 헌금을 하고 학교를 지으며 병원을 세우십시오. 성의껏 아프간도 도우십시오. 그러나 남은 조각, 부스러기는 버리지 말고 모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써야 할 곳에 쓰지 않고 엉뚱한 곳에 씁니다. 필요한 곳에 쓰지 않는 ‘깍쟁이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고액 사치품을 구입하는 데는 돈을 물쓰듯하고, 생필품 구입에는 깍쟁이 노릇 하는 것을 봅니다. 콩나물 장수한테는 마구 깎으면서, 백화점에서는 정찰제 대로 몽땅 주고 삽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작 퍼주어야 할 곳에는 인색한 게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정신은 ‘퍼줄 때는 듬뿍 주되 부스러기는 아껴라’는 것입니다.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참 선지자이고 메시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 세상을 향해 감동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제일 괴로운 것은 가까이 있는 신동아아파트 주민들이 우리를 보고 감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5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 먹고 남은 것을 열두 광주리에 거두시는 예수님, 그분을 찬양합시다.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하나님은 기적이 아까워 베풀지 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물질이 없어서 주지 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풍성한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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