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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신 예수님 (요 11: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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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세 번 정도 운다고 합니다. 누구나 처음 태어날 때 웁니다. 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을 낳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웁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이라면 하나님을 만났을 때 웁니다.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짧은 말씀에는 기가 막힌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웃으셨다’라는 기록은 없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셨을 것입니다. 사람이 크게 웃기는 쉽지만, 잔잔한 미소를 짓기는 쉽지 않습니다. 잘못 미소를 지으면 마치 비웃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따뜻하고 온화한 사랑의 미소를 지으셨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의 웃음도 미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셨습니다. 다시 11장 35절 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 말씀은 우리말로 세 단어로 번역돼 있습니다. 그러나 영문에는 두 단어(Jesus wept)로 구성돼 있습니다. 성경 말씀 중에 가장 짧은 문장이지만 가장 깊이 있는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우셨을까요?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의 눈물이 중요할까요? 하나님의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셨다’는 것은 아주 특이한 일입니다. 왜 무소불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우셨을까요?
첫째,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눈물은 고통스러워 흘리는 것과 사랑해서 흘리는 것이 있습니다. 자녀가 잘못되면 부모는 피눈물을 흘립니다. 그것은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셋째, 예수님에게 감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울 줄도, 웃을 줄도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감정이 없는 사람은 현상만 있을 뿐입니다. 사람에게 감정이 있다는 사실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감정이 없는 돌멩이가 아닙니다. 거룩한 진리와 공의만 내세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시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참된 구원에는 구원하시는 분의 눈물이 있고, 구원받는 자의 눈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 눈물을 흘리시고, 구원받는 우리도 눈물을 흘립니다.

눈물의 의미
예수님의 눈물에 대해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주제는 ‘예수님의 눈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입니다. 집에 있는 벌레가 죽었을 때 통곡하며 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벌레처럼 하찮은 존재는 눈물을 흘릴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깨어진 항아리, 버려진 옷과 구두, 폐기된 자동차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쓰레기를 보고 우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부모, 형제, 친구를 잃었을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그들은 귀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아끼고 애착을 느끼는 물건이 깨어지거나 없어졌을 때 속상해 합니다. 그것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눈물과 가치는 상관 관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눈물은 드라마를 보고 흐르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고통으로 인해 불쌍히 여기는 감정으로 흐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보시고 우신 이유는 나사로가 눈물을 흘릴 만한 가치가 있는 특별하고 보배로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통계를 보면 자살하는 사람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람보다 더 많다고 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자살할까요? 자신이 특별한 존재요, 의미 있는 존재요,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있어야 하는 가치 있는 존재라고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주검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셨다는 의미입니다. 능력자의 눈물이요, 절대 구원자의 눈물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의미 있는 귀한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실 만큼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동물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인간에 대한 가장 큰 모욕은 동물에 비유하는 일입니다. 소띠, 말띠, 개띠 등 띠로 사람을 표현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동물의 형상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유전인자를 가진 사람입니다. 사람이 소중한 까닭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종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귀의 종노릇하며 사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인간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영적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실 정도로 귀한 존재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무덤으로 가다
본문의 36, 3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예수님께서 우시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은 두 가지로 말했습니다. 하나는 나사로를 ‘정말 사랑했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독하게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아프면 예수님도 아파하시고, 우리가 병들면 예수님도 밤잠을 못 주무십니다. 유대인들은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라며 감탄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분이라 나사로의 죽음도 막을 수 있었을 텐데’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질문도, 의문도 계속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생각을 아시고 3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 두 번째 통분히 여기셨습니다. ‘통분’은 곧 ‘분통’입니다. 여기서 분통은 거룩한 분노의 감정입니다. 33절에 예수님께서 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며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38절에 죽음 앞에서 분노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를 죽음으로 몰고 간 질병, 고통, 저주 등에 대해 예수님께서 정면으로 분통을 터뜨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사람들에게 분통을 터뜨립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아니라 죄, 죽음, 사탄에게 분통을 터뜨려야 합니다. 우리는 죄의 본질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사회 부조리만 볼 게 아니라, 부조리 안에 있는 구조적인 죄악의 본질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죄악의 본질에 대해 분노하고 대면하는 영적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그렇지 못하고 현상만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분통을 터뜨렸다’는 것은 질병, 죽음에 대한 분노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각종 질병, 죽음에 대해 통분히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에 분노하시고 무덤과 대결하셨습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예수님께서 무덤 앞에 도착하시니 무겁고 큰 돌이 무덤의 문을 막고 있었습니다. 39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 말씀에 재미있는 사실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죽음과 직면하러 가셨는데, 장애물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장애물을 직접 치우시지 않고 사람들에게 ‘돌을 옮겨 놓아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나사로를 살리라고 명령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에 놓여 있는 무거운 돌을 제거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도록 우리 앞에 있는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마르다의 말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시자, 순간 마르다는 걱정이 생겼습니다. ‘저 안의 시체가 3일 지나서 냄새가 날 텐데 예수님께서 왜 저러시나’하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편안할 때 예수님을 생각하지만, 급해지면 잊어버립니다. 그녀는 인간적인 믿음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로 부활의 믿음, 생명의 믿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바뀐 것은 아닙니다. 성령을 받고 ‘할렐루야’를 외치며 철야기도, 금식기도를 한다고 완전히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겉으로 조금 변했을지 몰라도, 안으로 들어가면 아직도 찌꺼기가 남아 있습니다. 옛날의 인간적 분노, 생각 등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겉으로 평안해 보이지만 내부에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믿음의 불순물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마르다를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한 후에 태도나 말하는 것이 달라졌지만, 무덤 앞에서 순간적으로 옛날로 돌아갑니다. 돌을 옮기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항거할 수는 없지만, 아직도 그녀의 마음속에는 인간적인 염려와 미련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마르다의 행위를 통해 귀한 영적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4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예수님께서 11장 4절에서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우리가 가끔 인간적인 믿음으로 돌아가는 것은 순간적으로 영적 공식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 공식이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말을 합니다. 보고 믿겠다는 것은 인간적인 믿음이고 거듭나지 않은 믿음이며 마르다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된다’입니다. 우리는 자라온 환경, 교육, 경험 등에 의해 봐야만 믿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단번에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돌을 옮기다-기적의 시작
이런 면에서 믿음은 이성이 아니라 은혜의 산물입니다. 믿음은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가지려고 애쓴다고 믿음이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에 믿음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따지며 노력하고 모든 것을 동원한다고 해서 믿음이 생겨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믿음은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이 없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믿음을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믿음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은 겸손하고 은혜로우며, 서로 덕을 끼치고 축복을 나눕니다. 교회에서 봉사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적인 믿음으로 하는 봉사는 시끄럽습니다. 그 사람들의 특징은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열심에는 인간의 의지, 비교, 경쟁, 시기심 등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결과는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항상 피곤할 뿐입니다. 겸손히 간구한 은혜의 믿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적과 축복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은혜의 믿음이길 축원합니다.

마르다는 인간적인 믿음으로 갔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돌아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금방 제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얼른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무덤의 돌문을 옮깁니다. 41절 말씀입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믿음이란 자기 수정이고 결단이며 행동입니다. 사람들이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자, 41절 후반에서 예수님께서 중보기도하십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적이 있기 전에 중보기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기적이 있기 전에 믿음의 기도가 있고 감사 기도가 있습니다. 42절 말씀을 읽습니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어서 43, 44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세 가지를 명령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아라, 나사로야 나오너라, 수건을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입니다.
무덤의 돌문을 옮기는 일은 사람들의 몫입니다. 나사로를 살리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여기에 구원의 놀라운 그림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으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죽은 자의 수건을 풀어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
오늘 메시지를 통해 결론을 내릴 것이 있습니다. 죽은 나사로는 분명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병자들을 치유해 주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들을 모두 살리시거나 병든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죽게 되었을 때 그냥 내버려 두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시험에 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메시지는 주님께서 죽을 병도 고치시고, 죽은 사람도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갖는 무한한 가능성, 주님의 기적, 초월적인 역사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칠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죽은 자도 살리십니다. 죽을 병도 고치십니다.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나사로는 살아났습니다. 나중에 나사로는 다시 죽었습니다. 나사로는 두 번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장차 죽었다가 언젠가 부활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진리입니다. 우리가 오래 산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찬양하십시오! 그분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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