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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을 따르는 길 (요 13: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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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가리켜 ‘제자의 길을 가다’라고 말합니다. 제자의 길을 걸을 때 성경 말씀 몇 구절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선 마태복음 16장 24절 말씀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네 가지 방법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제자도에 핵심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아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주님을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 할 때마다 걸림돌이 되는 것은 개인의 생각, 가치, 습관, 문화 등입니다.
둘째,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온 인류의 죄 값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을 대신해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지는 일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중(重)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 십자가를 지셨고, 따라서 온 인류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각자가 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때로 가정일 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 지는 것이 힘들다고 무조건 피하기만 해서야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 부모나 처자, 형제, 자매와 목숨까지 미워할 만큼 주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4장 26절에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이란 절대 가치를 말합니다. 부모나 처자, 형제, 자매가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더욱 귀하신 분이기에 그들보다 더욱 주님을 사랑할 때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4장 33절에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유란 물질을 말하는데, 우리가 물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사업하거나 직업을 갖는 것입니다. 물질을 안겨다 주는 사업이나 직업도 초개와 같이 버리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네 가지 핵심 사항의 공통점은 우리가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요구 사항으로 보아, 제자도의 수준이 너무 높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제자도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방법에 대해 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먼저 8장 31-32절에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13장 35절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5장 8절에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강조하십니다.
어쨌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멋있고 좋은데, 막상 예수님을 따라 제자의 길을 가려니 굉장히 어렵기만 느껴집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십니다. 36절 말씀을 봅니다.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가질 때부터 예수님의 언행이 좀 이상하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3년 동안 뵈옵던 일상적인 모습이 아닌 좀 특이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느닷없이 자신의 발을 씻어 주시고,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시며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하시며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따라갈 수 없는 그 곳
베드로가 생각해 보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알쏭달쏭했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평소 자신의 성격대로 용기를 내어 도대체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느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베드로를 통해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 우리도 베드로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잘 믿다가 어느 시점에서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회의에 빠집니다. 이성적인 상식과 일상적인 경험으로 교회에 나와 찬송하고 헌금도 하며 봉사도 합니다. 그러다 영적인 순간에 모든 것들이 혼란스러워집니다. 지금 교회에 나가 하는 일들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갈등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막판에 와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둘, 베드로는 혼란을 겪는 중에도 예수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결코 그는 예수님을 떠나거나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기에 이상한 말씀만 하시냐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어디로 가시느냐고 질문한 것이고, 예수님께서 예언적 성격을 띤 말씀으로 대답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예언적 성격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당장 말씀이 이해되지 않고 해석되지 않지만, 세월이 흐른 후에 이해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지금은 내가 가는 곳에 네가 따라올 수 없지만 나중에 오게 된다고 대답하십니다. 지금 대화하는 것이 끝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게 되는데, 베드로는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성령님이 오실 때에 모든 것을 깨닫고 예수님께서 가신 곳으로 따라 올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보통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가끔 있더라도 순수한 마음으로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성경 말씀이 틀린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언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당장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더러 있습니다.
베드로는 혼란스러운 가운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약간 약이 올랐을 것입니다. 아니 지금은 주님을 따를 수 없다니 믿을 수 없다고 했을 것입니다. 37절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역시 베드로다운 발상입니다. 예수님께서 발을 씻기려 하자, 베드로는 자신의 발을 절대 씻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의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너와 아무 상관이 없게 된다고 하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어달라고 했던 베드로입니다.

‘육’(肉)의 생각은 멸망
그리고 이번에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 따라올 수 없다고 하자, 베드로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님을 따라가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대답을 통해 몇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베드로는 주제 파악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전혀 모른 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결정이 중요한 것으로 판단했을 겁니다. 흔히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자신인 줄로 착각합니다. 원수에 대해 사랑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자신이 진짜 사랑하는 줄로 압니다. 그런데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떠보면 그게 아닌 것입니다. 그 기도는 미래에 이뤄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드리는 열정과 헌신이 곧 자신의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주님, 목숨까지 바쳐 따르겠습니다’라는 말 자체와 감정만큼은 진실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는 냉정하게 자신을 돌이켜볼 때 매우 이율배반적임을 알게 됩니다.

둘째, 베드로는 인간의 육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한 것은 거짓이 아닙니다. 그 시점에서 주님을 위해 생명을 바치겠다는 각오는 진실입니다. 그러나 육의 생각에 따라 그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깊이 들어가면,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따로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으로 말씀하시고, 베드로는 육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니고데모는 육으로 생각해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겠습니까’라고 반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나 영으로 말씀하시고, 제자들은 언제나 육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영의 말씀을 영으로 받아들이면 갈등이 없는데, 육으로 받아들이면 서로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관한 성경 말씀은 많이 기록돼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도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육을 갖고 삽니다. 육은 잠을 자고 밥을 먹으며 생리 현상을 보이고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또 때리면 아픔을 느끼고 병이 들기도 합니다. 사람은 육에 대해 굉장히 익숙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날마다 육을 가꾸고 삽니다. 요즘 ‘웰빙’(Well being)이라 하여 삶의 질을 높게 가져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 웰빙에 대해 살펴보면 온통 육에 관한 것뿐입니다. 성경에서 육은 무익하고 살리는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8장 5-9절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단순히 서로 용납하고 사랑하며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수준을 넘어서, 원수까지 사랑하는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육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런 세계로의 진입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영에 사로잡혀 있다면 육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일도 결코 어렵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도 결코 어렵지 않게 됩니다. 38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는 데 목숨을 걸겠다고 하자, 예수님께서 정말 목숨마저 버릴 수 있겠느냐며 반문하십니다. 그 이유는 베드로가 아무리 의지가 강하고 갖은 애를 쓴다 해도 육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살리는 것은 ‘영’(靈)
베드로가 목숨을 걸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자, 예수님께서 목숨은 고사하고 도망이나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와 생각과 경험과 결단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몇 걸음 나아가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까지 개인의 의지와 자존심으로 밀고 나갈 수 있지만 얼마 못가 곧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영적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영적 원리를 이해하고 직접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육으로 하는 것과 영으로 하는 것은 다릅니다. 봉사도 육으로 하는 것과 영으로 하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나라고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의 영에 접붙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예수님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고도 그물을 들고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습니다. 이것이 육의 인간이고 본능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육의 본능을 이기고 영의 옷으로 갈아입는 방법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의 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법칙입니다. 이에 관한 말씀은 성경 전편에 걸쳐 기록돼 있습니다.

십자가와 성령의 법칙
육의 본능을 깨뜨리고 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십자가의 법칙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아니하면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이미 선고하셨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육의 본능을 죽이는 길입니다.
또 성령의 법칙은 로마서 8장 1-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씀으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주신 메시지가 ‘성령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모든 일들을 능히 해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음에 전도해야겠다고 느낄 때 이미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생명의 성령이 우리 안에 있게 되면 제자도가 완성된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이해되고 즐거워지며 항상 좋아 어쩔 줄 모르는 기적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 베드로는 오순절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됩니다. 그 후 베드로는 초대 교회의 리더가 되고 최후에 주님을 위해 순교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육의 사람이 아니라 영의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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