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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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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으로 달려가 주님의 시체를 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빈 무덤이었습니다. 충격을 받은 마리아는 누군가 주님의 시체를 훔쳐 간 것으로 생각하며 그 사실을 베드로에게 알렸습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 만난 사람들
베드로도 급히 뛰어 갔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는 없었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시신을 싸매고 있던 세마포만이 아주 단정히 개켜 있었습니다. 특별히 머리를 감쌌던 수건은 다른 곳에 개켜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체가 도난 당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빈 무덤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갈등을 일으킵니다. 도대처 누가 이 돌을 움직였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돌문은 로마 법에 의해 로마 군병이 밤새도록 지키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한 사람이 굴릴 수 있는 돌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옮겨진 돌은 분명히 안 쪽에서는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 밖에서 돌을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빈 무덤’은 정상적인 이성을 가진 사람에게 해석되지 않는 여러가지 질문을 던져 줍니다.

시체를 훔쳐 갔다면 분명히 수의로 싼 채 들고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의는 곱게 개켜 있었습니다. 시신을 둘러 감겨져 있는 수의를 혼자서는 풀 방법이 없습니다. 누군가 풀어줘야 가능합니다. 또한 훔쳐 갔다면 시체를 들고 황급히 도망갔을 것입니다.
머리를 쌌던 수건도 딴 곳에 개켜 있었습니다. 이는 자신이 풀었거나 훔쳐 가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음을 증명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예수님의 시체만 사라졌습니다. 마치 번데기 상태에 있던 나비가 껍질을 벗고 창공을 향해 날아간 것을 연상시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시체가 없어진 자리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이 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마리아는 천사인 줄 모르고 미친 사람처럼 하소연했습니다. 시신을 가져간 사람을 안다면 가르쳐 달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여자가 돌이켜 보니 또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임을 알아차리지 못한 마리아는 동산문지기로 착각했습니다. “누군가 시신을 훔쳐 갔다면 돌을 움직인 후에 끌고 갔을 텐데 혹시 예수님 시체를 가져 간 사람을 알거든 내게 얘기를 해 주십시오”라며 말을 건넸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배우는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옆에 계셔도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걷고 대화하고 식사를 나눴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눈이 가리워졌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없는 것도 예수님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의 눈이 가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귀가 막혀 있고 가슴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 신앙’, ‘체험 신앙’
지금 우리 교회 안에도 예수님이 계십니다. 내 가까이에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소유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의 음성을 듣을 수 있는 영적인 귀가 열리기를 바랍니다. 내가 가장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예수님은 그 곳에 함께 계십니다. 혼돈스럽고 의심이 들어오고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예수님은 바로 그 곁에 계셔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기 위해 곁에 계십니다.
마리아 옆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마리아야!” 이 말을 듣는 순간 여자의 눈이 열렸습니다. 비로서 곁에 있는 분이 예수님인 것을 알게 됐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마리아는 즉시 제자들을 찾아가서 주님을 만난 사실을 전했습니다. 18-20절을 보십시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를 보십시오. 이들은 예수님의 12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이들은 십자가 사건이 해석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십자가야 달려야만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극단적인 처형을 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침묵하며 자기 변명을 하지 않은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묵상할 수록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잊을 수 없고 지울 수 없는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를 더 큰 충격으로 몰고 간 것은 ‘예수가 부활 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됐을 때 처음에는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직접 풀어 주셨습니다. 선지자의 글로부터 성경에 나오는 자기에 관한 내용을 다 뽑아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때 두 제자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첫번째 비결은 말씀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성경해석은 그 분을 만나는 결정적인 열쇠입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떡과 포도주를 나눴습니다. 그러다가 눈을 떠서 주님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엠마오로 가던 발걸음을 돌이켰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모여 한 마음을 이룰 때 서로 큰 힘이 됐을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경험이 있으면 입을 열어 증거 하십시오. 내가 2천년전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과 성령을 통해 그 분을 만날 때 내 가슴이 뜨거워지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엠마오로 가는 발걸음을 예루살렘으로 돌이켜서 ‘우리가 예수를 만났다’고 고백 했습니다. ‘예수를 믿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마십시오. ‘내가 예수님을 만났다’라고 확신있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인 활동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를 지적으로 인식하고 깨닫는 깨달음의 종교가 아닙니다. 체험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그 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내 존재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변하여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 분은 나의 인식의 대상이 아닙니다. 지적 대상, 학문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분 안에 거하는 이런 만남이 있을 때 부활 신앙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지식은 깨닫게 하지만 능력이 없습니다. 아는 것은 힘이 아니라 갈등입니다. 고민만 늘어납니다. 또한 알고 있는 지식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체험돼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분이 내 삶과 인격 속에 들어올 때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단계를 넘어서 만나는 체험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피와 살속에 거하는 복이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표재순씨가 연출을 맡은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가 공연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원작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빠져 있었습니다. 십자가로 끝이 나버립니다. 고민 하다가 부활을 만들어 공연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예수의 끝은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공연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는 부활이 들어가 있습니다. 원작자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부활을 만들었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촛점은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반면 부활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인간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은 십자가로 끝납니다. 십자가 이상을 넘어 서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람,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자신 안에서 경험합니다.

‘평강의 주인’되신 예수님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문을 닫고 방 안에 모여 자기들끼리 간증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닫혀 있는 문을 통과하여 예수님이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40일은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 천국과 땅의 시간이 합일 된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음식을 먹으며 사람들과 얘기하다가도 사라지셨습니다. 주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기도 하고 시간과 공간안에 머물기도 하십니다. 물질과 함께 있을 뿐만 아니라 물질을 초월하기도 하십니다.

40일의 기간은 우리가 앞으로 경험하게 될 천국의 시간을 앞당겨 보여주신 아주 독특한 구원의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문이 닫혀 있어도 들어 오시고 음식을 먹다가도 없어지시며 인간적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독특한 시간을 40일동안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맨 먼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막힌 메시지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평강이 이 시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이후에 아주 중요한 네 가지 메세지를 남기셨습니다. 첫째가 지금 주시는 말씀입니다. 샬롬! 샬롬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형적인 인사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단순한 인사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이 언급한 샬롬은 독특한 것입니다. 그 분이 평안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안에 있는 평안을 주겠는 것입니다.
이 평안은 앞으로 일어나게 된다거나 단순히 문안하는 식의 기원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완성된 참 평안입니다. 미완성의 기원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가지신 진정한 하늘의 평안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건강하면 좋겠다는 것은 기원입니다. ‘잘 됐으면 좋겠다’라며 기원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메세지는 기원이 아닙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뤄 놓은 평강을 받으십시오.
세상의 특징은 염려와 근심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염려와 근심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권력을 가진 사람은 권력을 가진 대로, 권력을 뺏긴 사람은 권력을 뺏긴 대로 심각한 고민이 있습니다. 어른은 어른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모두 고민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정신병이 있습니다. 어른과 똑같이 고민하고 괴로워 합니다.
이와 달리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평강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이 평강을 지금 받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받으십시오. 노력해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평강의 주인, 평화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으면 그 분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하신 참 평강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통해 완성된 참 평안
예수님의 두번째 메시지는 ‘성령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숨을 내쉬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십시오. 성령 충만하십시오. 성령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임할 때 예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세번째 메세지는 ‘내 양을 먹이라’, ‘내양을 치라’입니다. 예수님이 맡겨 주신 그 분의 양들을 말씀과 사랑으로 먹이시기 바랍니다. 평강을 회복하고 내힘이 아닌 성령의 능력을 갖게 되면 주님의 양을 치게 될 것입니다.

네 번째 메시지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으라’입니다. 안주 하지 마십시오. 순종함으로 떠나 제자 삼는 사명인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이 네가지 말씀을 꼭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하신 평강을 받으십시오. 모든 염려와 근심과 걱정은 땅에 묻고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예수님은 평강이십니다. 평화의 왕이십니다. 하늘의 평화와 땅의 평강을 완성한 사람입니다. 주님이 공짜로 주시는 평강을 받으십시오. 요한복음에는 특별히 이 평강에 대한 얘기가 많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을 보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릅니다. 세상은 근심, 걱정의 대명사입니다. 세상은 권력, 돈, 명예 등 모든 것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것은 소유하면 할 수록 불행해집니다. 돈을 가진 만큼, 권력을 가진 만큼 불행해지고 세상에서 유명해지는 것 만큼 외롭습니다.
비교적 높은 위치에 있는 분들에게 괜찮은지 여쭙고 싶습니다. 조금만 살펴봐도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화려하고 근사하지만은 않은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은 남이 모르는 심각한 고민이 있습니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괴로운 것은 그가 한 번 결정을 잘못 내리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고 수만명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쉬운 것이 아닙니다.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좋아 보여도 그만큼 외롭고 힘듭니다.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근심 걱정의 절정은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죄의 권세를 멸하고 사탄의 권세를 박살내신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진짜입니다. 확실한 것입니다. 받기만 하십시오. 소유 하기만 하면 진짜 하늘의 평강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을 보십시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평안은 이런 의미에서 안식입니다. 평안은 하나님의 완전함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목자이심으로 우리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호와를 목자로 삼는 사람은 먹을것, 입을 것, 집이 없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평안을 유통시키는 ‘평강의 사람’
그 분은 나의 평안이십니다. 안식자며 공급자되십니다. 그분은 내 인생의 목표이며 전부입니다. 비록 세상에 있을 지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특징은 환란, 염려, 근심, 갈등, 목마름, 외로움입니다. 인생은 외로운 존재입니다. 외롭기 때문에 떠나지 못하도록 사람을 움켜 붙잡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로마서 5장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내 자신이 누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도 누리고 나아가서 하나님과도 평화를 누리는 참된 복을 갖자는 것입니다. 평화를 누리는 방법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평강은 나눠야 합니다. 성령으로 이것을 나눠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7절을 보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러분, 예수님이 완성하신 평강을 받으십시오. 이 평강을 누리십시오. 평강을 전하십시오.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참 평강의 복이 여러분의 삶 속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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