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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떠나는 것이 유익이라 (요 14: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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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알기 원합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고, 능력도 알 수 있지만 외모에 대해서 묘사된 부분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알 수 있다면 믿기가 한결 수월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유일한 예수님의 외모는 그분이 유대인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에서 추측해 볼 수 있는 것 뿐입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봐야만 믿겠다는 도마에게 예수님은 나타나셔서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도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합니다.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분의 기적을 직접 보았고, 가르치심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믿음에 이른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보고도 믿지 못했던 사람들을 가리켜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소경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 5∼7절을 보십시오.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실은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들에게는 유익’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이 말씀에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곁에 계셔서 예수님이 직접 가르치시고 일하셨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을 보십시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보혜사’는 헬라어로 ‘파라클레이토스’입니다. 우리를 돕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고, 변호하시고, 또 우리를 보호하시고, 위로하시고, 상담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보다는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면 성령님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분이심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 자신의 죽음과 떠날 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영원히 거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17장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가는 길목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준비시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중에 있는 가룟유다가 자신을 배반할 것도 알고 계셨고, 베드로가 3번에 걸쳐 자신을 부인할 것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에게도 성찬을 베푸시고 평안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을 약속하셨습니다. 사랑안에 함께 거할 것을 말씀하시고, 큰 기쁨을 보장하시고, 열매 맺는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면서 자신의 떠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성령님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보혜사인 것입니다. 또 성령님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서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보혜사는 그 이전에도 역사하고 계셨습니다. 천지창조 때도 성령님이 수면에 운행하셨습니다. 또 구약시대에는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다윗, 삼손, 심지어 사울왕에게도 임하셨습니다. 또 많은 선지자들이 대언을 할 때도 성령이 함께 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 임했던 성령님은 영원히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 아니었고, 우리안에 계셔서 열매를 맺게 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역사는 하지 않으시고 오직 능력으로만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만 함께 하셨습니다. 필요할 때만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후에 오신 성령님은 영원히 거하시는 성령님입니다. 지금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님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 떠나시고, 우리가 깨끗해지면 다시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성령님을 근심하게 합니다. 우리가 불순종하고, 죄를 지으면 그분이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탄식하고, 근심하십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제한하십니다. 성령 하나님 만큼 인격적인 분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강제로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분이 필요없다고 하면서 스스로의 능력을 의지하면 성령님은 물러서 계십니다.
말을 듣지 않는 영은 귀신입니다. 그래서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가고, 들어오지 말라고 해도 들어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던 목적 에는 성령님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함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떠나시면 그가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과 함께 하심보다 더 유익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7절을 보십시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세상은 그분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성령님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글을 모르는 까막눈에게 글을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 중에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성령님을 모릅니다. ‘모른다는 것’은 정말 엄청나게 큰 차이를 불러일으킵니다. 알면 간단하고 쉽지만, 모르면 정말 이해하기 힘든 분이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설명하기 보다는 만나야 할 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성령님이 우리안에 오시고, 우리가 그분을 알고 사모하게 됩니다. 지금 예배를 드리는 이곳에도 함께 계십니다. 온 우주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날이라는 말은 성령님이 우리안에 오시는 날을 가리킵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 우리가 예수님안에, 예수님이 우리안에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오셨다는 사실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령님과 함께 우리안에 계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셔서 그 분 손안에 두셨지만 우리의 마음만은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마음대로 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때는 차라리 우리의 마음을 우리 마음대로 하게 놓아두지 마시고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면 하나님도 편하고 우리도 편할듯 합니다. 항상 우리 마음이 많은 문제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마음을 주는 것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강제로 무엇인가를 행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할 수도 있고, 사탄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또 예수님을 영접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맡겨놓은 마음을 얻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물질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컴퓨터처럼 프로그래밍해서 얻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진심을 다해서 그분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주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질을 주고, 육신을 주어도 마음을 주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탕자를 보내주지 않고 곁에 붙들어 놓을 수도 있는데 왜 보내주었을까요? 상속권을 빌미로 유산을 주지 않았다면 아들은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떠난 사람을 붙잡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아버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재산을 잃더라도 아들의 마음을 얻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을 떠나보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모험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을 거부하고 사탄을 섬길 수도 있는 상황 가운데 두셨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실패하신듯이 보였습니다.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과 이브의 실패가 그렇게 보였던 것입니다.
마음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의 마음을 얻기 원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여러분,
성령님이 내주하시면 우리가 절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계속하시는 것은 우리의 행함과 능력으로는 불가능 합니다. 내 최선으로도 안됩니다. 열매맺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실제로 보면 그 사랑과 믿음이 더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육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얼굴을 맞대고 가까워도 서로안에 들어가보지 않으면 그 마음을 다 모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 반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 제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떠나시고 성령님이 오시자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성령님이 우리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보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보고도 못믿는데 보지 않고 믿는 비밀은 성령님이 내 안에서 내 영과 직접 만나고 계심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분이 원하시면 우리의 목숨까지 내 놓고 그분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성령님과 함께 내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인도로 깨닫는 진리

다음 주간에 있는 성령집회에 모두 오셔서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집회를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새벽기도도 많이 해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르짖어도 뭔가 잘 되지않는 듯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알지 못하고 그저 능력만 구해서는 성령님이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위로부터 부어지는 능력은 성령님의 내주하심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안에 거해야만 성령충만하게 됩니다. 성령님을 사모하고 능력을 구할 때 성령의 불과 능력이 임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먼저 능력과 은혜를 구하기 전에 우리안에 성령님을 확인하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정말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을 보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우리안에 성령님이 계시면 이 세상이 알 수 없는 평안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눈 앞에 져야할 십자가가 있어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사방에서 위협이 닥칠지라도 잔잔한 물결처럼 요동하지 않는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있는 평안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우리안에서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축복입니다.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것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인 이유가 또 있습니다.
다음 성경 구절들을 보겠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14장 26절을 보십시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16장 12, 13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예수님이 3년동안 제자들을 가르쳐도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우리의 수준 때문에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다시 설명을 해도 깨닫는 제자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할말이 많으시지만 우리가 알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모두 말씀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제자들과 육체로 함께 거하실 때는 인간의 언어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고, 제자들이 아는 개념 정도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경우도 가장 어려운 설교가 유치부 아이들에게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알아듣는 수준의 표현으로 설교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실 때는 우리의 지성의 수준에 맞추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계셨을 때는 입도 열지 못했던 제자들이 성령이 오시니까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해서 몇 천명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온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우리말로 되어 있습니다. 비밀스러운 기호와 암호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머리가 좋다고 해서 깨달아지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말씀을 내 지성으로 읽으면 바리새인들처럼 될 수 도 있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고, 진화론이 맞다고 하기도 합니다.

능력의 비밀

유대인들 가운데는 성경을 통채로 외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아직도 예수님을 모릅니다. 성경을 통채로 외워도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예수님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못배운 사람이 성령이 역사하시면 말씀을 깨닫게 되고 예수님을 위해 목숨도 내어놓습니다.
성령님은 자신을 위해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성령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찬양하게 되고 예수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하다고 생각되는데 예수님을 높이고 증거하고싶은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나타내십니다.
14장 21절을 보십시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성령을 받기 전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가고, 그분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다고 장담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성령을 받자 짧은 기간동안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유월절과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오순절 사이에는 겨우 50일이 경과했을 뿐입니다. 그 짧은 시간동안 그들은 완전히 달라졌던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것도 마지못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지키고, 마음으로 순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받게 합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은 율법에 문제가 있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흠이 없고 완전합니다. 문제는 율법을 지킬 힘이 사람들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시대의 성도들과 다른 것은 그 율법을 지킬 힘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으로 인해서 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능력의 비밀은 성령이 함께 하신데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는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성령의 능력으로 일하셨다면 우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령님은 영이십니다. 육신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자신의 몸으로 삼으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과 함께 하셨던 그 일을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확실한 것은 성령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고아와 같이 사십니까? 왜 성령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처럼 사십니까? 더 이상 고아처럼 방황하지 마십시오. 성령님이 마치 계시지 않는 것처럼 여러분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들지 마십시오.
그분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나하나 하다보면 점점 성령님이 우리를 완전하게 주장하시게 됩니다. 날마다 내 의지와, 의와, 경험을 복종시켜 드리십시오.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있으면 세미한 음성이 바람처럼 순식간에 스쳐간듯한 생각이라도 순종하십시오.
갑자기 기도하고 싶거나, 성경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전도하고 싶고, 헌금하고 싶고, 봉사하고 싶은 마음은 여러분의 마음이 아닙니다. 순간적으로 지나가다가 누군가를 돕고 싶다면 도우십시오. 그렇게 한 걸음씩 순종하면 어느새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사시는 놀라운 역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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