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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엠마오 도상의 제자 (눅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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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사망권세를 이기신 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복된 날입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을 보고 절망하고 좌절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인해 절망과 좌절이 컸던 만큼 그들에게는 희망과 용기와 흥분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된 그들은 어쩔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을 바쳐서 예수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순교도 마다하지 않았던 결정적인 동기는 부활이었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고 부활주일을 많이 지냈지만 오늘 아침만큼 감격스러운 날이 없었습니다. 마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난 것과 같은 감격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주일 아침을 온누리교회 성도들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수술을 통해서 받은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목회자로서 주님을 섬겨왔지만, 과거는 다 버리고 다시 한번 더 순종하고 무릎꿇으라는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저의 병은 죽을 병이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모든 환란도 저주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사건이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두 번째 수술을 통해 하나님은 제게 더 깊은 회개를 하도록 하셨습니다. 교회적으로 받은 복도 많습니다. 첫 번째 수술을 할 때는 많은 분들이 기도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수술을 하고 나니 교회가 통성기도하기 시작했고, 장로, 권사, 목사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아이들까지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했다는 것보다도 교회가 기도하기 시작했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비밀이요, 축복이라고 믿습니다. 기도만 더 하게 할 수 있다면 세 번까지 수술할 용의가 있습니다. 제가 완전히 건강해져도 이 기도의 불길이 꺼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제목이 너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기도하지 않는 분은 없지만, 교회가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받은 축복은 부흥입니다. 우리는 별로 한 일이 없는데 하나님은 온누리교회를 부흥하게 하셨습니다. 양재 성전까지 주시고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새 생명을 얻어 변화와 기적을 누리며 사는 것을 볼 때 우리의 사명이 얼마나 큰지 새삼 깨닫습니다. 이처럼 어둡고 캄캄한 세상에서 교회가 유일한 희망인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런 믿음을 계속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힘

도대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첫째, 십자가로부터 옵니다. 십자가에 능력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 위에 서 있고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는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죄의 권세와 사망의 권세와 사탄의 권세를 꺾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보혈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크리스천의 힘의 원천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둘째는 부활입니다. 십자가가 자물쇠라고 한다면 부활은 열쇠입니다. 그 열쇠로 십자가를 열 때 그 굳게 닫힌 자물쇠가 열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부활의 능력과 동일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초대교회에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로마와 전 세계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죄인들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자살하고 싶던 사람, 절망했던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셋째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로마서 8장 2절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습니다. 성령의 능력, 부활의 능력, 십자가의 능력은 하나입니다. 삼위일체와 같습니다. 저는 부활 주일 아침에 여러분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보혈의 능력이 여러분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자신이 변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가정이 변하고 자녀들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의미가 아닙니다. 많은 인본주의자들은 예수는 위대한 인간이며 예수의 부활은 상징적인 의미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부활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부활은 문학이 아닙니다. 철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지식적인 문제가 아니라 체험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목격한 것과 같이 체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 입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그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사건은 죄 없는 한 청년이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은 일을 말합니다.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고,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경험하게 되면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쓰고, 채찍에 맞고, 조롱을 당하고, 창에 찔린 죄 없는 한 청년을 생각하면 누구든지 양심에 가책을 받고 영혼이 요동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이 십자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다른 화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항상 ‘왜?’라는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왜 그가 죽었을까?’, ‘왜 잘못이 없는 그 분이 그토록 고통을 당하며 죽어야 했을까?’, ‘왜 그는 변명하지 않고 침묵했을까?’, ‘왜 그 얼굴에는 고통중인데도 영광의 광채가 있었을까?’ 십자가는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십자가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을 던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한 가지 주목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의문이 있을 때 예수님이 그 곳에 계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왜?’라고 질문할 때 예수님이 그곳에 계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이해 못한 제자들

여기서 또 한 가지 발견하는 것은 주님이 옆에 계시더라도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없어서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계셔도 못 알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15절에서 세 번째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주님을 못 알아본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나의 말을 듣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음소리를 듣고 계시며, 여러분의 고통을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눈이 가리워졌기 때문입니다. 눈을 떴지만 보지 못하고, 귀가 있지만 듣지 못하고, 가슴이 있지만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눈과 귀와 가슴으로 주님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너희들이 하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라고 했더니 그들이 ‘슬픈 빛을 띠었다’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왜 그분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했는가?’, ‘왜 그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어떻게 그분은 그렇게 침묵할 수 있었는가?’ 누구든지 이 사건을 만나게 되면 잠도 오지 않고 밥도 먹지 못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그 사건을 삼척동자로 알고 있는데 어찌하여 그 사건을 당신만 모르느냐’ 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사건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이 대화를 보면 그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분노와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1-24절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이 사람들이 슬픈 빛을 띠고 있는 것은 십자가 사건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받은 충격은 다른 것입니다. 그 사람이 살아났다는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그 소문이 그 사람들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했습니다.
21-24절을 가만히 보면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 중에는 확실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어찌어찌 들은 소문입니다. 여러분, 왜 부활이 믿어지지 않는 줄 아십니까? 소문만 듣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확실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 사람들처럼 방황하고 헤매게 됩니다. 해석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고난이 다 해석되기를 바랍니다. 혼돈에 빠진 모든 사람들이 갈피를 잡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실히 만나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으로 만나는 부활하신 예수

그러면 혼돈스럽게 갈등 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엠마오로 가던 발걸음을 180도 돌려서 예루살렘으로 오게 되었을까요? 이것이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메시지입니다. 25-27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를 경험할 수 있습니까? 첫번째 방법은 말씀입니다. 생각한다고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공부를 한다고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직접 성경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들에게 ‘그 사람이 나다’라고 말하면 더 쉽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전도를 통해, 말씀을 통해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그분을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주일에 교회에 오십시오.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공부에 결석하지 마십시오. 성경공부 할 때 아무렇게나 하지 마십시오. ‘예수중심’으로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할 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만난 예수가 여러분의 예수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씀 앞에 있을 때 살아계신 예수님이 여러분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는 믿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입니다. 이해하는 것도 아니요, 믿으려고 애쓰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그가 피가 되고 살이 되어서 예수님을 부인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체험신앙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체험신앙을 갖기를 바랍니다. 그 때 부활의 능력, 성령의 능력, 십자가의 능력이 내 안에 새롭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하는 것같이 하시니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쳐 주었는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은 예수님을 알 수 있는 시작이요 지름길입니다. 교회에 다녀도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도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목사가 되어도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예수님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능력이 없습니다.
사랑은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한테 몹쓸 짓을 하는 사람,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성만찬의 능력

30, 31절을 보십시오.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말씀을 배울 때 그 사람들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축사하신 떡을 먹으면서 눈이 떠졌습니다. 이런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만찬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성만찬 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형식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진짜 성만찬은 눈을 뜨게 합니다. 저는 이번 성만찬에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떡을 먹고 잔을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몸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인격 속에, 삶 속에 축복받은 떡을 통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고 새벽기도회에 다니면서도 능력이 없는 것은 주님이 내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적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하나의 문화로 이해하기 때문에 능력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살과 피가 내 안으로 들어와서 그분과 내가 하나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눈이 떠지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랜 세월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오랫동안 교회 다닌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주님의 살과 피가 삶 속에 들어올 때 능력의 사람, 부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성을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능력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부활하신 예수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부활절 의식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기름부으신 떡을 먹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예수를 알아본 그 순간 예수님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면 어디를 가든지, 어떤 위기를 만나든지 실망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형태의 죽음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갈등이 없습니다. 이미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죽음, 실패,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존심도 상관없습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저는 여러분의 마음이 뜨겁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만찬을 할 때 모든 것이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의 신앙

33-35절을 보십시오.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수가성의 여인을 기억하십니까?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고는 마을로 뛰어갔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보면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엠마오로 가는 길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내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가는 길과 하는 일을 축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잘 되면 복이라고 생각하고 안되면 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인생의 길이 근본적으로 수정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목표가 수정되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사람이 길을 바꾸었습니다. 직업을 바꾸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직업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부인과 남편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들은 엠마오로 가던 길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열한 명의 제자들이 모여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간증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나도 예수님을 만났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누가 은혜를 받았을까요? 베드로였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열 한 제자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만나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길거리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산에서도, 안방에서도 어느 곳에서나, 누구든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예수님을 여러분들이 만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의 능력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인간적인 생각과 자기 만족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기적이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표적이 없어도 됩니다. 이미 그 분은 내 영혼에 도장을 찍으셨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부활신앙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가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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