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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아들이 되라 (마 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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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이 되라 (마 5:9)

예수님의 행복 이야기는 점점 그 강도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위로를 받고 땅을 기업으로 받는 행복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는 행복과 심지어는 하나님을 보는 행복으로까지 나아가더니, 오늘의 본문에서는 급기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우는 행복에까지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만 해도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많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의 패턴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일들은 아무리 위대하고 고상해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토록 갈망하고 추구하던 것이라도 일단 그것을 얻고 나면, 물론 처음에는 흥분과 감격이 있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흥분과 감격도 사라지고 시들해지는 것입니다. 안 해 보았을 때, 몰랐을 때는 그것이 대단해 보였는데, 해 보니까, 그리고 정복해 보니까 별 것이 아니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큰 기쁨과 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깊어질수록 더 심오한 영적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연구할수록 더 놀랍고 오묘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 헌신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더 충성할수록 더 많은 기쁨과 감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숙할수록 우리가 맛볼 수 있는 행복은 점점 커지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재미이기도 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런 감격을 맛보지 못하며 살고 있다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지가 꽤 되다 보니까 모든 것을 터득해 버려서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새로울 것도 없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를 제대로 믿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는 감격과 기쁨 속에서 살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그 열정과 사랑이 다 식어버리고 겨우 예수 믿는 시늉이나 하면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에서 이것은 중병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는 결코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이 우리에게 한없는 감격과 은사를 공급해 주고 있는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맛보지 못하면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행복을 말씀하시는데, 이 행복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개념이 우리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당연한 일이지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으니까요(요 1:14).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은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입니다(롬 8:15, 갈 4:6). 그러나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이 크게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불과 몇 번의 언급이 있을 뿐입니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았다는 언급이 있습니다(창 6:2).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과연 누구냐 하는 것에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만, 어쨌든 특별한 경우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하나의 민족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을 아들이라 부르신 적도 있습니다(호 11:1). 욥기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천사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욥 1:6). 또 시편에는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 땅의 지배자로 등극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시 2:7). 옛날 중국에서 황제를 천자(天子)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사상이지요. 어쨌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일반적인 보통 사람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 특별한 일입니다. 따라서 아직 구약의 사상세계 속에 살던 당시의 군중들로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운다는 말이 커다란 충격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이 성경을 도배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인데,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를 갖게 된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도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처럼 행하는 사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마 5:44-45, 눅 6:35, 엡 5:1).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운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최고의 영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무슨 명예박사에 비교하겠습니까? 어디서 받은 표창장이나 훈장에 비교하겠습니까? 지구상에서 최고의 명예라고 할 수 있는 노벨상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수여할 수는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쿠데타에 성공한 군인들이 자기들 계급장에 스스로 별을 붙이듯이 우리 스스로 붙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불러주시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입술을 통해서 그렇게 불리워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인정해 주실 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 하나님을 닮은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과연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한 사람인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살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살아가는 모양을 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러 주실 것인지 생각해 보세요. 세상에서 사람들이 우리가 행하는 일들을 보고 '아, 역시 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야.' 이렇게 말할 것 같은지 생각해 보세요.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실패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운다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고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 이것은 하나님의 대리인,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우고 싶으시지요?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하시는지 보세요. 주님은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우는 행복을 갖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화평케 하는 것이 그만큼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하실 일이라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누가 싸우고 있으면 가서 싸움을 말리고 서로 화해하게 만드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당장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싸움을 그치게 하고 평화를 만들어내는 것을 하나님이 그토록 중요하게 보신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말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보시는 시각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유추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은 평화로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서로 싸우는 세상, 서로 미워하고 서로를 파괴하는 사람들로 가득찬 세상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의 마음은 멍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은 그런 세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선하신 모습을 담아 아름답게 지으신 세상이 그처럼 변질하고 타락한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속상해하시겠습니까? 그런데 그 싸움을 그치게 하고 다툼과 갈등을 없애서 평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꼭 하시고 싶었던 일을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싸움과 갈등이 있습니까? 사람이 두 명 이상 존재하는 곳에는 갈등도 반드시 함께 존재하게 됩니다. 개인 사이의 갈등, 집단간의 다툼, 계급간의 싸움, 국가간의 전쟁, 이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그렇게 싸우는 것은 인간의 상실과 자연의 파괴를 초래합니다. 부부가 싸우면 가정이 상처를 입습니다. 노사간의 갈등은 회사와 사회를 불안하게 하고, 지역감정은 나라를 멍들게 합니다. 히틀러의 나찌는 6백만의 유태인을 죽였고, 캄보디아에서는 크메르루주에 의해 무고한 백성이 2백만이나 학살되었습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싸움도 잔혹해지고 그 결과는 훨씬 고통스러운 것이 되고 있습니다. 보스니아의 비극은 인종청소라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냈고, 르완다와 부룬디에서는 두 종족의 서로에 대한 적개심이 나라를 초토화시켰습니다. 지금도 팔레스타인에서는 총소리가 끊일 줄 모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전면전을 일으켜 팔레스타인을 쓸어버려야 한다는 주장도 대두되고 있습니다. 엊그제는 북아일랜드에서 신구교도 사이의 갈등으로 거리가 불바다로 변하는 광경이 텔레비전 화면을 채웠습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는 지금 교과서의 역사왜곡 문제로 그렇지 않아도 깊은 갈등의 골이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인간 사이의 갈등, 특히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간을 파괴하는지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서쪽 해안에 자리잡고 있는 가자지구의 검문소에 두 팔레스타인 노파가 통과시켜 줄 것을 요청하며 이스라엘 병사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지금 어디 가서 통행허가증을 얻는단 말입니까? 산모와 아기가 위태하니 빨리 통과시켜 주십시오.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하니 제발 우리를 통과시켜 주시오. 위급합니다.' 두 노파는 이스라엘 병사들을 향해 소리치며 절규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아랍 사람들은 출입증이 없으면 아무데도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려면 반드시 통행증을 발부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날 갑자기 진통이 시작된 자신의 딸을 데리고 정신없이 헤브론에 있는 병원으로 질주하던 도중 통과할 수 없는 검문소에서 그만 주저앉고 만 것입니다. 이들은 신음하는 산모를 차에 두고 한 시간동안이나 매달리며 사정했지만 이스라엘 군인들은 '당장 이 곳에서 사라지라'는 말만 거듭하며 끝내 통과시켜 주기를 거절했습니다. 뙤약볕 아래서 산고에 신음하던 산모는 탯줄을 자를 장비조차 없는 불결한 차 안에서 결국 아이를 해산해야 했고, 아이는 몇 시간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인종적 수모와 함께 종이 한 장이 없어, 살아있는 어린 생명이 1미터의 바리케이드를 넘지 못해 사막의 이슬이 되어 죽음의 길로 가야 했던 것입니다.

한 아랍 여인은 헤브론 지역 바깥 100미터 지점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백일이 지난 아이가 고열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헤브론에 있는 병원으로 가기 위해 달려갔지만 이미 통행금지 시간이 넘어 버렸고 검문소에서는 이 모녀의 통행을 금지시켰습니다. 아이를 살려 달라고 애원했지만 법이 인간 위에 있는지라 검문소를 통과할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체되자 아이는 점점 위급해지고 고열 속에 토하며 극도로 위험한 상태가 되어갔습니다. 또 한 번 용기를 내어 제발 병원에만 들여보내 달라고 사정을 했지만 이스라엘 병사는 시계를 보여주며 '되돌아가라'는 말만 쏘아 부쳤습니다. 아이의 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자, 이 여인은 한밤중의 정적을 깨뜨리는 절규를 터뜨렸고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이 틈을 타 뒤로 도망친 그녀는 근처 포도밭을 뚫고 병원으로 달려갔으나 너무 시간이 지체되어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는 그만 사망했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실신을 해버렸습니다.

증오는 증오를 낳고,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생산해 냅니다. 그런데 그 증오와 폭력 사이에서 평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위대한 사람입니까? 그런 사람은 미움을 사랑으로 변화시키고 폭력과 파괴의 상처를 치유하는 사람입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구원하는 사람이고, 신음하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회복시키는 사람입니다.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느 곳에서든지 어떤 갈등과 다툼을 목격하든지, 그것을 강건너 불구경하듯이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니까, 괜히 휩쓸려서 나까지 곤란해지고 싶지 않으니까 하는 자세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툼과 갈등 속에서 평화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인간 사이의 갈등과 다툼은 멀리 전쟁터까지 가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가 서 있는 자리에도, 내가 몸담고 있는 곳에도 미움이 기생하고 있고 갈등이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습니다. 교회라고 해서 추악한 인간의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의 갈등과 다툼은 해결하기가 훨씬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망과 부정직한 동기는 뒤에 감춘 채 하나님의 정의를 내세우며 각자 하나님이 자기편이라고 주장하며 싸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싸움은 극단적인 데까지 나가는 수가 많습니다. 세상의 피스메이커가 되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싸움과 분열의 모범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요.

어떤 아빠가 자기 집 뒷마당에서 왁자지껄 싸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뒷마당에 가보니 자기 딸이 친구 몇 명과 함께 놀고 있었습니다. 딸을 나무라자 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빠, 우리는 지금 싸우는 게 아니에요. 그저 교회놀이를 하고 있는 중이었어요.' 왜 교회놀이가 찬양하고 기도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싸우는 것이 되었을까요? 교회는 싸우는 것이 불가능한 공동체입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거나 할 수 없습니다(고전 12:21).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한 몸 속에서 생겨나는 갈등과 싸움이 다른 싸움보다 더 심각하고 추악하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화평케 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전에 싸우지나 마십시오. 싸우는 것이 취미인 사람이 어떻게 남의 싸움을 말릴 수 있습니까? 싸우는 교회가 세상에 나가서 평화를 선포할 때 누가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싸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옳고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뉴질랜드에 있는 한인교회들은 바람 잘 날이 없이 그렇게 시끄럽습니까? 여기 이민 온 사람들이 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만 왔기 때문입니다. 대학 안 나온 사람은 이민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또 어지간한 경력 가지고는 명함도 내밀 수 없습니다. 비록 여기서는 백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는 다들 한가락하던 사람들이란 말이죠. 다들 서로 잘났고 똑똑하니 지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러면 피터지도록 싸워야지 다른 방도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잘나고 똑똑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학 나오고 경력이 화려하다고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게 아니에요. 자기 주장 굽힐 줄 모르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는 귀 기울일 줄 모르는 사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생각도 마세요.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피스메이커로 오셨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어떻게 하셨나 보세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하셨는지를 잘 보고 배워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싸우지 않습니다. 양보할 줄 아는 사람은 싸우지 않습니다. 이렇게 싸우지 않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화평케 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 간곡히 권면하는 것은 앞으로 여러분의 교회생활 가운데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교회 안에서 싸우거나 교회를 분열시키는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 마음이 맞지 않고 도저히 함께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되면 조용히 떠나세요. 떠나도 조용히 떠나야 돼요. 괜히 정의 편에 서네, 개혁을 하네 하면서 시끄럽게 풍파를 일으키고 편을 가르고 싸우고 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한번 그런 일에 관여하게 되면 그것도 경력이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아세요? 거짓말도 자꾸 하면 는다는 말처럼, 싸우고 분열시키는 데도 관록이 붙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있을 때는 훨씬 더 열심히 싸울 수 있게 되고 더 효과적으로 교회를 분열시킬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행복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싸우는 교회들, 목사와 장로가 싸우고, 교인들 사이에 패가 나뉘어 싸우는 것을 보면 너무나 괴롭고 서글픈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무슨 스트레스 해소장입니까?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찾아볼 수가 없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선 싸우지 않는 사람입니다. 싸울 일이 있어도 참아내서 싸우지 않게 되면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손해보고, 내가 양보하고, 내가 참으면 싸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좀 못났어도 괜찮아요. 똑똑하지 못해도 예수믿고 구원얻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어요. 그러나 잘나고 똑똑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고 성도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깊은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 잘난 사람이 아니라 화평케 하는 사람, 싸울 일이 있어도 싸우지 않는 바보같은 사람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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