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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수는 나의 것? (마 05: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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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매우 설득력 있게 작용하는 원리는 “give and take”입니다. 내가 할 만큼 하고 또 그에 따른 권리도 당당하게 찾아먹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올바로 못하면 사회로부터 눈총을 받거나 따돌림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꼭 해야 할 일을 게을러서 또는 하기 싫어서 안 한 사람에게는 합당한 제재가 가해지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힘이 부쳐서 못하는 수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의 체제는 적자생존, 혹은 약자도태의 원리가 작동되는 사회이기 때문에, 남을 밟고 올라서서라도 제 할 일을 누구보다 잘하는 것이 미덕으로 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못하고 뒤쳐지는 사람은 삼등 인생 취급을 당하기 쉽습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자기 권리를 충분히 주장하는 것도 능력의 표현방식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가운데 ‘자기 밥그릇도 못 챙기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남의 밥그릇 뺏어오는 것은 고사하고 자기 것도 챙기지 못하는 매우 무능력한 인간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남의 밥그릇을 뺏어오는 사람은 엄청나게 능력이 많은 사람이라는 뜻이 들어있기도 합니다. 즉 한 마디로 하면 손해보고는 못사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이런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말은 매우 타당하고 공평한 것처럼 보입니다. 비록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요청되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썩 내키지는 않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 “give and take”의 원리에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유용한 법칙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의 원리에 맞는 법칙을 따르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새로운 질서와 법칙을 새로 제시하고 계시는 걸까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그 백성에게 주셨던 이 율법이 선하지 못한 것이었다는 말입니까?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그 율법대로 행하면 거룩함과 의에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율법은 의롭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별로 선해 보이지 않는 이 규칙을 율법에 두셨을까요?

사람들이 흔히 보복법이라고 부르는 이 율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선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또 더욱이 보복을 보장하는 법도 아닙니다. 오히려 거기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약자를 보호하시려는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폭력이 폭력을 낳고, 또 그 폭력은 점점 증가하는 것을 우리가 많이 봅니다. 예를 들어 조직폭력배 한 명이 라이벌 폭력배 집단에게 두들겨 맞았다고 합시다.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무엇입니까? 맞은 쪽에서 각목을 들고 떼거리로 몰려가서 라이벌 집단의 깡패 몇 명 갈비뼈를 부서뜨려 놓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예상되는 일은 무엇입니까? 칼부림이 일어나고 한두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전면전이 벌어지겠지요.

폭력은 결코 더 작은 폭력에 의해 만족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두 대 얻어맞은 사람이 한 대 때리고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어이 자기가 맞은 것보다 더 많이, 그래서 세 대나 네 대를 때려야만 분이 풀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두 대 때렸다가 네 대 얻어맞은 놈은 분해서 견딜 수가 없겠지요. 이제 여섯 대나 여덟 대를 때려야만 그 분이 풀릴 것입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법칙은 바로 이러한 과잉보복을 금지한 법입니다. 그러니까 한 대 맞은 사람은 한 대 때려서 보복하라는 보복법이 아니라 한 대 맞은 사람이 두 대 때리지 말라는 과잉보복 금지법이 되겠군요.

오늘날 이 세계를 보십시오. 어린 아이들의 다툼에서부터 국제적인 분쟁에 이르기까지 이 과잉보복 금지법이 지켜지지 않아서 얼마나 많은 폭력과 파괴가 자행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군대가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을 체포합니다. 그러면 며칠 후 자살폭탄이 터져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서는 전투기를 보내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폭격합니다. 이 폭력의 악순환은 언제나 끝이 날까요? 9.11 테러나 이라크 침공 같은 가공할 만한 폭력과 파괴행위 역시 보복을 주고받으면서 그 규모가 점점 커져가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으라는 이 법칙은 개인들에게 주어진 법이 아니라 재판관에게 주어진 법입니다. 이 법에 따라서 한 사람이 한 대 맞았다고 그 때린 사람을 한 대 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개인간에 분쟁이 생겼을 때 재판관을 찾아가서 그 분쟁을 해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닭 한 마리의 손실이 생겼을 경우 재판관은 이 법칙에 따라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닭 한 마리로 보상하도록 판결을 내립니다.

힘없는 사람이 닭 한 마리 빼앗기고도 하소연할 곳이 없이 그대로 당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닭 한 마리 손실이 생겼는데 힘 있는 자가 와서 닭 대신 소 한 마리를 뺏어가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얼마나 선하고 의로운 법입니까? 그러니까 이 법은 보복을 용납하고 폭력을 부추기는 악법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이 법이 그 당시에 보복법으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누구나 이 법을 근거로 해서 자기가 당한 일에 개인적으로 그만큼 복수를 할 수 있다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대 맞았으면 꼭 한 대를 때려야 하는 것이 율법인 것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율법은 그렇게 딱딱하고 인정머리 없는 법이 아니에요. 고아와 과부를 배려하고 나그네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항이 얼마나 많습니까?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의 속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선하고 거룩한 법입니다.

내가 닭 한 마리를 잃어버렸어도 상대방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해서 배상시키지 않고 잊어버리는 것이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내가 못할 일을 당했어도 그것 가지고 재판정에 가기보다 용서하고 잊어버리려는 것이 율법을 올바로 행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선생이라는 사람들이 이처럼 율법을 악한 법으로 만들어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단 말이지요.

이제 주님께서는 참으로 율법을 지키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치도록 돌려 대라는 것입니다. 뺨 한 대 맞았으면 나도 상대방 뺨을 한 대 치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설령 상대방이 아주 악한 사람이어서 내가 부당하게 피해를 당했더라도 그 악인과 싸우지 않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입니다. 누가 우리를 고소해가지고 속옷을 빼앗아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 벗어주라고 하십니다. 글쎄요, 누가 우리 팬티 같은 속옷을 뺏으려고 고소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서 말하는 속옷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속옷이 아니고 그냥 옷입니다. 그리고 겉옷은 그 위에 걸치는 외투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성경에 속옷을 벗었다는 표현이 종종 나오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속옷을 벗은 것이 아니에요.

또 억지로 5리를 같이 가게 하면 10리라도 같이 가 주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 신체에 관한 손상이나 재산상의 손해, 또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는 행위, 즉 모든 피해와 손해에 관해서 우리가 그것을 지키겠다고 싸우기보다 양보하고 차라리 손해를 보면서 살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또 나쁜 사람에게 사기를 당한다거나 도둑을 맞는다거나 이렇게 피해를 입을 때도 많아요. 그럴 때면 우리는 자연히 복수를 꿈꾸게 됩니다. 복수를 해야 속에 응어리진 한이 풀릴 것 같지요. 또 복수해야 할 대상은 그렇게 악한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남편이나 아내에게 복수를 해야겠다고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부모에게 복수하려는 자녀들 많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치지요. “복수는 나의 것!”

그러나 복수라는 것은 아무런 이득이 없는 파괴행위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내 이빨을 뽑았다고 칩시다. 복수한다고 내가 그 사람의 이빨을 뽑으면 내 이빨이 새로 납니까? 내 눈을 뽑았다고 상대방 눈을 뽑으면 내 눈이 새로 생기나요? 눈 없는 사람만 하나 더 늘어날 뿐입니다. 우리 집 유리창을 깼다고 나도 몽둥이 들고 가서 그 집 유리창을 두들겨 깨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속이라도 시원할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차라리 용서하고 사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하게 사는 방법입니다. 악을 이기는 방법은 악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고 했습니다. 복수에 대해서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잠 20:22).

복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도 끝내 복수를 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사냥을 나섰습니다. 그러다가 들판에서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들판에 화장실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고 왕 체면에 아무데서나 일을 볼 수도 없잖아요. 그런데 마침 근처에 동굴이 하나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옳지 됐다! 하고 들어갔겠지요?

그런데 그 동굴은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숨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의 부하들이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원수 갚을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다윗이 칼을 들고 사울의 곁에 가만히 다가가서 사울의 옷자락만 베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나간 후에 뒤따라 나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여, 왜 나를 죽이려고 하십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그러면서 그 옷자락을 보여 줍니다. 그것을 보고 사울이 통곡을 하면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빕니다. 그리고 다윗 사냥을 포기하고 돌아갑니다.

그런 일이 또 일어났습니다. 이번에도 다윗 사냥을 나선 사울이 그 군대와 함께 진을 치고 밤에 잠을 잡니다. 다윗이 용사 아비새를 데리고 진으로 숨어들어갔는데 아무도 잠을 깨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비새가 말합니다. “이제야말로 당신의 원수를 갚을 때가 왔습니다. 내가 창으로 찔러서 땅에 박아버리겠습니다. 두 번 찌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머리 곁 땅에 꽂혀 있는 창을 빼들고 또 왕의 물통을 챙겨가지고 조용히 빠져나갑니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큰 소리로 왕을 불렀습니다. “왕이여,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잡아 죽이러 오셨습니까?” 이번에도 사울은 다윗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고 돌아갑니다.

성경은 이러한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찬합니다. 뭐, 다윗처럼 훌륭한 사람은 그렇게 살았을지 모르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 같습니다. 또 우리가 복수를 하지 않고 원수를 용서한다고 해서 악한 사람들이 감동받고 변화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만만하게 보고 더 이용하려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다는 죄로 도대체 얼마나 억울하게 당하고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은 벨도 없이 살아야 합니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래, 벨도 없이 살아라. 사실은 우리 주님 자신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온갖 능욕과 멸시를 받으시고 사람들의 폭력에 아무 저항도 하지 않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축복이고 특권입니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광입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그것은 마치 바보처럼 사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비즈니스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또 히브리서 기자도 똑같이 말합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히 10:30).

우리가 원수에게 뺨을 맞고 재산도 빼앗기고 심지어는 일신상의 자유마저 구속당하는 수가 있지만, 우리가 원수를 갚는다고 나서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는 오히려 악과 폭력이 증가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를 때, 우리가 당했던 모욕과 슬픔은 하나님께서 찬란한 영광과 풍성한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그리스도인,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그리스도인, 솔직히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오늘 이후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여기 모인 숫자만큼 늘었다고 주님이 기뻐하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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