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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리 마태 (마 09: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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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마가, 누가, 이 세 가지 복음서를 공관복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공관'이라는 것은 '같은 시각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에서부터 시작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사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과 가르치신 교훈들을 거의 같은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그 복음서의 내용 중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짤막하게 끼워 넣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기록할 때에 1인칭을 사용하지 않고 3인칭을 사용합니다.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것처럼 기록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붙잡혀 가실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사실 이런 이야기는 성경에 기록할만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청년이 벗은 몸에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님을 따라오다가 붙잡히니까 홑이불을 버리고 벌거벗고 도망갔다는 것이 왜 성경에 꼭 기록이 되어야 합니까?
그런데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은 이것이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 자신의 부끄러운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주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을 때, 주님이 잡혀가시던 현장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하던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부끄러워, 참회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서에는 군데군데에서 저자 자신의 이야기가 간단하게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마태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것도 역시 언뜻 보기에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 같지만 사실은 마태 자신입니다. 마태 자신이 겪었던 일을 3인칭의 형식을 빌어서 기술한 것입니다.
그러면 마태라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살펴봅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가복음 2장 14절에서는 그의 이름을 '알패오의 아들 레위'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마태라는 이름은 나중에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붙여진 이름이고 그의 본래 이름은 레위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레위인 것으로 미루어 그는 레위지파에 속했던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레위지파는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서 제사장 지파입니다. 신명기 10장 8절을 보면 '그때에 여호와께서 레위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이며, 여호와 앞에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고, 그 일은 오늘날까지 이르느니라.' 기록되었습니다.
레위지파는 제사장의 가문입니다. 하나님께서 12지파 중에서 특별히 택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과 성전을 돌보는 책임을 맡겼던 거룩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다른 어느 가정보다 신앙적인 가정에서 태어나서 엄격한 신앙훈련을 받으며 자라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어디에 앉아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마태는 세리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10절과 11절을 보면 '죄인과 세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죄인이라는 단어하고 세리라는 단어를 붙여서 사용합니다. 죄인과 세리를 같은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로마정부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두어들이기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 중에 세리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세리들이 일정한 세금을 거두어 준다면 그 이상 걷는 것은 세리들의 몫으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가능한대로 많은 세금을 거두어 착복하였고, 또 그것으로 고리대금업을 해서 많은 돈을 모으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멸시와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압박자인 로마의 등에 붙어서 자기동족의 피를 빨아 배부르게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리라는 직업의 도덕성 이전에 민족을 배신한 반역자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세리의 그림자만 보아도 침을 뱉었고 세리라는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택하신 가문인 거룩한 레위지파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동족을 배신하고 죄인의 대명사로 불리던 세리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마태는 세리라는 직업을 선택했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죄인으로 손가락질을 받는 세리직업을 좋아서 선택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리라는 직업은 로마의 보호를 받으며 아주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입니다. 마태는 그 인생의 목표를 돈버는 데에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돈만 있으면 인생을 멋있게 살 수 있다. 가문이 무엇이고, 신앙이 무엇이냐, 어찌되었든 돈을 벌어야 성공한 인생이지 가문을 지키고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도대체 내게 해주는 것이 무엇이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머니 머니 해도 머니가 최고다.' 하는 것입니다. 돈을 위해서라면 신앙도 필요 없고, 명예도 체면도 필요 없습니다. 돈을 벌 수만 있다고 죄인이라고 해도 좋고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레위지파의 아들이 신앙을 버리고 죄인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태를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가 일하던 세관으로 찾아가셨습니다.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오늘은 누구에게 가서 어떤 방법으로 얼마를 뜯어내고 얼마를 로마정부에 바치고 얼마를 내 주머니에 넣을까?' 계산기를 두드리고 앉아있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다른 사람들처럼 애타게 예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같은 세리의 직업을 가졌던 삭개오라는 사람은 뽕나무에 올라가서라도 예수님의 얼굴을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산으로, 들로, 바닷가로 좇아 다닐 때에도 마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는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침상 채로 예수님 앞에 들고 나왔는데 예수님께서는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이 말씀 한 마디로 고쳐주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온 동네가 난리가 났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겠다고 다 몰려나왔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세관에 앉아있었습니다. 아마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은 얼마 짜리, 저 사람은 얼마 짜리, 예수님 덕분에 다 모였네' 이러고 앉아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좇으라.' 죄인 중의 죄인인 마태, 제사장 가문의 명예를 버리고 세리의 직업을 택했던 마태, 신앙보다는 돈을 더 사랑한 마태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를 좇으라.'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야겠다.' 그래서 예수를 믿은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불러주셨기에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을 본문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의롭게 살아서가 아닙니다. 남보다 착하게 살아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과 원수처럼 살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저는 야곱이라는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큰 은혜를 받습니다. 야곱이 말년에 아들들과 손자들을 축복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무슨 말인가 하면 야곱이 비는 축복이 야곱의 부여조, 즉 아버지 이삭과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축복보다 훨씬 더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그 할아버지 아브라함이나 아버지 이삭과 비교하면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누구입니까?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던 사람입니다. 평생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았고 마지막에는 백세가 되어 얻은 아들까지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믿음을 보인 사람입니다.
이삭도 아버지 아브라함 못지 않은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려고 모리아산으로 올라갔을 때에 이삭은 순순히 제물이 되었습니다. 당시 이삭은 건장한 청년의 나이입니다. 늙은 아버지 아브라함을 얼마든지 밀치고 달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자기가 제물로 바쳐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순순히 제단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처럼 이삭은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과 이삭에 비하면 야곱은 철저히 세상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장자의 권리를 빼앗았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 살면서 결국에는 삼촌의 재물을 다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야곱은 그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 비교하면 형편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야곱이 지금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내가 비는 축복이 내 아버지 이삭과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비는 축복보다 훨씬 낫다.' 이렇게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언제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순간도 야곱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야곱은 언제나 하나님을 떠나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순간도 야곱의 곁을 떠나신 적이 없었습니다.
야곱이 집을 떠나 외로운 나그네의 길을 시작할 때에 하나님은 야곱을 찾아오셔서 '내가 너와 함께 하마.' 약속해 주셨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형 에서가 군대를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 떨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축복해 주시고 형과 화해하도록 해주셨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다음에 자녀들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게 되자 이번에도 나타나셔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그 인생에서 위기를 만날 때마다 반드시 나타나셨습니다. 가야 갈 길을 알려주시고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용기를 주시고 새 힘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내가 비는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낫다.' 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나는 내 할아버지 아브라함이나 내 아버지 이삭과 비교할 때 형편없이 못난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누구보다도 사랑하신다. 이 못나고 죄 많은 나를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 더 사랑하신다. 그래서 내가 비는 축복을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크게 응답해 주신다.' 하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못난 자를 더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죄가 많은 자를 더 불쌍히 여기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을 찾아오신 주님을 마음의 문을 열고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처럼 하나님을 떠나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이기적인 삶을 살아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한시도 잊으신 적이 없습니다. 마태처럼 신앙의 길을 버리고 세상에서의 부귀와 영화를 좇아 살아왔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내게로 오라.' 부르십니다. 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순간 여러분이 과거에 지은 모든 죄는 다 사라져 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마태를 찾아오셔서 '너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묻지 아니하셨습니다. '너는 거룩한 레위지파의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지금 이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냐?'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의 더러운 과거를 보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짓고 있는 죄를 묻지도 않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그 순간부터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어떤 죄를 지었든 그것은 전혀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 앞에 서는 순간 모든 죄는 다 사함을 받고 새롭게 거듭난 모습으로 서는 것입니다.
미가서 7장 1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가 너무 커서 두려워합니다. '내가 이렇게 큰 죄를 지었는데 과연 용서해 주실까?'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 넓고 깊은 바다, 그곳에 우리의 죄를 다 쓸어 넣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무섭고 크다 해도 얼마든지 용서해주십니다.
지난주에 TV에서 미국의 노예상인들이 아프리카에 가서 흑인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파는 영화를 방영하는 것을 보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 미국까지 배를 타고 오는 도중에 병든 노예가 있으면 그대로 바다에 던져버리는 참혹한 모습들이 방영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노예를 사고 파는 노예상인 중에 '존 뉴톤'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때로 아프리카까지 원정을 가서 흑인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팔기도 했고, 울며 매달리는 어머니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노예로 팔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영접하고 변화를 받아 목사가 되어서 40년 동안을 신실하게 주님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내 죄를 다 용서했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나는 너무도 무서운 죄인이 아닌가, 사람을 잡아다 파는 이 엄청난 죄를 지었는데 주님께서 정말로 나를 용서하셨을까?' 이런 불안이 늘 그의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이사야서 43장 4절의 말씀이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노라.' 존 뉴톤은 나 같은 죄인도 하나님께서는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말씀을 의지하여 평생을 기쁨으로 살다가 죽음을 앞에 두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 나라로 간다. 내가 하나님 나라에 가면 나는 너무도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과거에 노예 상인이었던 내가 구원받고 천국에 와있는 것을 보고 너무도 놀라게 될 것이다.'
주님을 만난 사람은 그 순간 지금까지의 모든 죄가 다 사라집니다. 아무리 큰 죄, 두려운 죄라 할지라도 깨끗하게 벗겨지고 전혀 새로운 사람, 정결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 이 시간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이 놀라운 기쁨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름을 보면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세리 마태, 야고보, 다대오, 시몬, 유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그냥 이름만 기록되어 있는데 유독 마태만은 '세리 마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죄인의 대명사이고 '마태'라는 뜻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리 마태'라는 이름은 '죄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입니다.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하면서 굳이 자기 이름을 '세리 마태'라고 기록한 것은 그의 신앙고백입니다.
'나는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인 세리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이제는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 감격을 일생동안 잊지 않기 위해 마태는 스스로를 '세리 마태' 라고 불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는 다 더러운 죄인이었습니다. 전에는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죄인, 하나님의 은혜'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이름입니다. 이 시간 '나를 좇으라.' 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일평생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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