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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냉수 한 그릇 (마 10: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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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본문 중 42절 말씀을 보면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1. 줄 때의 기적
라운드 폴 공의 꿈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한 성을 다스리는 공작(公爵)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평생의 한 가지 소원이 있었는데 그것은 유월절 성만찬 때 예수께서 사용하신 금잔(金盞)을 손에 넣는 것이었습니다. 라운드 폴 공작은 그 금잔을 찾기 위해서 의복을 차려 입고 성문(城門)을 나섰습니다. 성문을 나서는데 한 거지가 “체리티(Charity)!”하고 외칩니다. 채리티란 말은 “적선 하십시오”라는 뜻으로 먹을 것이 없는 불쌍한 거지를 도와 달라는 간절한 호소였습니다. 그는 매우 기분이 나쁘고 마음이 언짢아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거룩한 일을 막 시작하려는 마당에…” 그는 기분이 나빠서 그냥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세월은 흘렀고, 가지고 나간 돈도 다 떨어지고 화려했던 옷도 재대로 세탁하지 못해서 남루한 옷같이 보였습니다. 초라한 모습으로 성으로 돌아오는데 한 거지가 “체리티! 먹을 것을 좀 주세요!”하고 적선을 구했습니다. 성문을 나설 때 바로 그 거지였습니다. 그는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그의 모습이나 자신의 모습이 별 차이가 없어 보였습니다. 단지 다른 것은 집에 들어가면 그는 돈이 있지만 거지는 돈이 없는 것 차이 이외에 모든 것이 비슷해 보였습니다. 라운드 폴 공작은 짐 보따리에서 남은 빵 한 조각을 꺼내서 모두를 건네주었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허겁지겁 먹는 바람에 목이 말라 보였습니다. 폴 공작은 거지에게 물을 떠주기 위해 말에서 내려 성문 옆에 있는 우물가로 가서 추운 얼음을 깨고 옆구리에 찼던 표주박으로 물을 떠서 거지에게 주었습니다. 그 순간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거지가 물을 마시고 있는 표주박이 라운드 폴 공이 일평생 찼던 예수님의 금잔이었습니다. 표주박이 금잔으로 바뀐 것입니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공작(公爵)은 창고를 열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65378;라운드 폴 공(公)의 꿈&65379;이란 단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2. 성도의 영적 삶은 환대(주는 삶)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삶의 전략은 언제나 자기중심적(Self-Centeredness)이 그 기초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재산을 늘리기 위해 이웃을 착취하고 이용하는 것이 삶의 전부입니다. 이들에게서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는 환대란 찾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략은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환대(Hospitality)가 기초입니다. 여기서 환대란 단어의 원어는 'hospes'라는 말인데 이것은 주인(host)과 손님 (guest)모두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즉 너와 내가 각자 개성을 가진 자로 인격적 만남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 환대의 근본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환대를 잘 함으로 복을 받은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도 가축을 키우면서 살아가는 유목민이었습니다. 베두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지나가는 나그네가 텐트 끈에만 닿아도 의무적으로 3일은 집안에 초청하여 묵고 가게 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마침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앉았다가 멀찍이 지나가는 나그네를 보고 달려 나가 영접하여 집안으로 들려 환대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에게 고운 가루를 가지고 떡을 만들라고 부탁합니다. 아내가 만든 떡과 함께 버터와 우유를 곁들입니다. 하인에게 명령하기를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고 하여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 고기로 극진히 대접하고 푹 묵어가도록 합니다(창18:1-8). 아브라함은 극진하게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그 결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소식도 미리 알게 되었고 조카 롯도 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롯의 환대는 달랐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롯이 마침 소돔 성문에 앉았을 때에 나그네 두 사람이 그의 집으로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롯은 달려 나가 영접하지도 않았고 나그네를 대접할 때도 베두인들의 의무정도의 환대를 하였습니다. 무교병을 구워 대접하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결과 소돔 고모라의 멸망과 함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었고 사위들은 죽었고 두 딸은 겨우 구원을 받았지만 아버지와 근친상간하여 모압과 벤암미를 낳았습니다.
21세기의 최고의 영성 신학자 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 '상처 입은 치유자'란 책에서 현대인의 최대의 약점은 “영적 삶의 핵심인 환대의 부재 혹은 결핍”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환대의 목적
나의 삶의 중심에 내가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 있습니까? 성도의 삶의 중심에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어서 그를 배려하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성도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즉, 자기희생적 삶의 실천이 성도의 힘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참 환대의 이유는 특별한 목적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이만큼 베풀면 더 많은 것이 돌아오겠지..’ 하는 이기적인 틀을 깨뜨려 벼려야 합니다. 이것은 수학의 법칙이며, 상거래 법칙일 뿐 성도의 삶의 틀은 아닌 것입니다. 뭔가를 주면 되돌려 받을 것이란 계산에서 구제하고 나누어 주는 것은 기독교의 참 환대가 아닙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 때에 나에게 다시 돌아올 때에는 하나님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다시 돌아올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베푸는 자체가 기쁨이며, 상급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을 상대에게 줌으로 그를 지배하거나 조종하려는 목적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오직 순수하게 줄 뿐이어야 합니다.
몸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물과 피를 쏟아 주시고 생명까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아무 대가 없이 아낌없이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되돌려 받으려고 하지 않으시고 거저 주기만 하셨습니다. 주시고 난 후에 우리를 지배하려는 목적도 없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려울 때 도와준 뒤에 그를 조정하기도 하고 지배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또 다시 되돌려 받을 때에는 수십 배 많은 이익을 위해서 주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식탁친교를 통해 사람들과 교제하실 때에도 차별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죄인까지도 환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나 간음한 여인도 차별 없이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사람들이 저가 죄인의 집에서 먹고 마신다고 비난해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하나님과 죄인을 신비하게 결합시키는 파스카(Pascha)였습니다. 파스카란 ‘함께 나누는 식탁의 음식’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현대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도 신분을 따집니다. 서로 많은 사람과의 교제가 아니라 누구나 함부로 할 수 없는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가라! 가난한자, 병든 자, 못 배운 자는 얼씬거리지도 말라!”고 합니다. 교회는 거룩한 컨테이너가 되어야 합니다. 경부선 고속도로를 달려 보면 부산에 가서 외국으로 수출하기 위해서 물건을 싣고 가는 컨테이너를 보게 됩니다. 그 안에는 무슨 물건이든지 다 들어갈 수 있습니다. 수출하는 자동차부터 가전제품들을 비롯한 갖가지 물건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교회는 누구든지 품어야 합니다. 교회는 누구나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냄새나는 죄인들까지도 이곳에 들어 올 수 있어야 합니다.
냉수 한 그릇으로 우리는 천국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아무 대가 없이 냉수 한 그릇이라도 줄 수 있다면 주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가치 없어 보이는 냉수 한 그릇이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대접할 때 하늘의 상이 클 것입니다. 교회 주변과 우리의 이웃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나누어 줍시다. 매 주일 우리교회에 찾아오는 노숙자들이 약 100명가량이 있습니다. 교회 식당에 와서 밥을 먹고 갑니다. 얼마나 배가 고프면 와서 밥을 먹겠습니까? 교회 현관에 헌옷을 깨끗이 클리닝 해 두면 누구든지 몸에 맞으면 가지고 가는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많이 가지고 가서 마음이 참 좋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환대 중 최고의 환대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냉수 한 그릇 보다 더 큰 것이 복음을 주는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의 생명을 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웃에게 빵이나 옷보다 더 소중한 복음을 나누어 주는 사랑의 실천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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