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준비된 사람 (행 01:15-26)

첨부 1



준비된 사람 (사도행전 1:15-26)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보고 경험한 사람들과 더불어 성령을 기다리며 마음을 같이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재창조하시는 공동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움직이는 놀라운 공동체인 교회가 창조되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나갈 위대한 예수공동체를 이루며 하늘의 권능이 임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기도할 때 사람들은 겸손해집니다. 기도는 자기를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사모하는 가장 겸비한 자세에서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태도입니다. 기도하기 전까지는 모르던 세계가 기도 가운데서 열립니다. ‘무릎을 꿇을 때는 거지 같이 꿇었지만 일어설 때는 왕같이 일어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도한 후에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기도를 통해 성령이 충만케 되면 사람이 바뀝니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일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간절히 기도하며 성령이 임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베드로는 열 두 제자 중에 한 명이 부족한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가룟유다가 빠진 열한 명, 이 상태로 성령이 임하면 뭔가 빠진 교회, 불완전한 교회가 될 것 같았습니다.

회복돼야 할 빈 자리

40일동안 주님이 이 땅에 계시면서도 한 명을 채우라는 말씀을 하지는 않으셨지만 제자들은 이 문제의 심각함을 알게 됐습니다. 열둘은 매우 중요한 상징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열둘은 구약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열두 지파가 배치돼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하나님나라의 완벽한 틀입니다.
사람들은 상징에 의해 살아갑니다. 메이커와 브랜드로 전신무장한 오늘날 세대들은 별 것아닌 다 찢어진 옷일지라도 거기 있는 상표에서 힘을 얻습니다. 열둘이라는 상징은 하나님 나라의 약속이 응집된 언약의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세 사람의 결과입니다. 이들을 통해 맺어진 열매가 열두 지파이기 때문입니다.
열두 아들은 하나님 나라의 땅을 받은 사람입니다. 구약을 관통하는 열둘이라는 상징은 하나님 나라의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열둘은 신구약 전체 역사의 심층을 관통하며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주님은 열두 지파의 후계자들을 끝없이 권면했지만 그들은 바리새주의로 물들어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밤이 맞도록 기도하며 새로운 열두 제자들을 택했습니다. 계시록은 옛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을 가져와 열두 진주문이 세워지는 것을 보여 줍니다. 기초석에는 열두 제자의 이름이 새겨집니다.
영원한 상징 열둘은 교회의 완벽한 모습을 말해 줍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말하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주님은 교회를 세울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열두 제자가 기초석이 된 이 교회는 음부의 권세, 사망의 세력이 이기지 못하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모든 사망의 세력을 이기고 생명의 찬가가 울려 퍼지는 근원,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를 흔들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는 교회의 대표적인 구성원 중 두 사람 베드로와 가룟유다가 심하게 흔들린 것입니다. 이들은 마귀의 시험에 휘청거렸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는 열두 지파의 후계자들, 새로운 역사를 만들 대표적인 제자 두사람 중 가룟유다는 사단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사단이 들어가 스승인 주님을 팔아 넘기고 말았습니다.

사단은 베드로도 넘어뜨리기 위해 세 번을 시험했습니다. 제자인 것을 저주하며 부인한 베드로 또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사단이 밀까부르듯이 흔들며 시험한 베드로, 주님을 세 번 부인한 후 완전히 깨지고 주저 앉은 그에게 주님은 기도의 손을 뻗어 붙드셨습니다. 주님을 부인했던 가련한 제자가 지옥의 심연가운데 떨어지지 않도록 붙드신 것입니다. 사단이 아무리 우리를 흔들고 시험하고 송사할 지라도 주님의 깊은 사랑과 긍휼과 공로는 우리를 붙들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구약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신 지성소에는 일년에 한 차례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만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 번제, 속건제, 소제, 화목제와 같은 이 모든 제사를 단번에 이루셨습니다.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왕같은 제사장이 되어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공로는 나 한 사람을 왕 같은 제사장으로 우뚝 세우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이것이 음부의 권세가 해치지 못하는 교회의 권세와 복입니다.

베드로는 세 번 부인한 사실로 인해 누구 앞에서 고개 들고 얘기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인격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양심이 쉬지 않고 고소했습니다. 그는 끝나버린, 매장된 것 같은 무너진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주시는 사랑의 품에서 베드로는 힘차게 일어났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40일 동안 교훈하시는 말씀을 듣고 전체 공동체를 인도하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문득 자신은 회복됐지만 아직도 비어 있는 자리 하나를 발견케 됐습니다. 열둘 가운데서 가룟유다는 제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회복되지 않은 이 빈 자리가 채워져야 합니다. 나머지 한 자리가 채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의 완전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 음부의 권세가 해칠 수 없는 그 온전한 그릇을 회복해야 합니다. 16, 17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 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베드로는 동료인 유다가 주님을 등지고 비참하게 죽은 사실을 인간적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사건과 인생의 과거와 미래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경 안에서 해석했습니다. 이 사건이 성경에 이미 예언된 것이므로 빈자리는 마땅히 채워져야 함을 성경으로 입증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이것은 임의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뜻이었습니다. 주님은 마지막날에 당신을 믿고 따르는 자는 한 사람도 잃지 않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가룟유다는 본래 갈 길을 간 것입니다. 열둘 중에서 하나님이 택한 백성은 해함을 받지 않았음을 입증할 수 있도록 가룟유다 대신 미리 택하신 제자를 찾아야 했습니다. 가룟유다는 주님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21, 22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주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 ‘주바라기’

하나님은 생명을 살리는 위대한 사도행전적 역사에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베드로는 지난 3년동안 주님 안에서 보고 들은 모든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뽑아야 할 것을 말했습니다. 마지막 역사에 빛과 소금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주역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주님을 내내 따라 다닌 사람이어야 합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나님 말씀을 증거할 때 일그러진 세계가 다시 펴집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재창조 역사가 우리와 교회를 통해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바로 그 교회’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교회는 예루살렘교회, 안디옥교회처럼 성령께서 이끌어가는 교회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역사의 마지막까지 우리는 어떤 절망과 낙심에도 묶이지 않고 부활의 증인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은 그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보고 들은 것이 없으면 말할 내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 묵상한 것, 마음에 새긴 것을 말하게 돼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약 인간이 회복되는 구속의 드라마를 반복해서 계속 보았다면 예수에 대해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 분의 영광이 어떤 것인지를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을 한 번 뵈면 다른 것은 볼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회복한 사람의 모습이 얼마나 품위와 깊이가 있고 아름다울 수 있는 지 그리스도를 통해 본 사람은 거짓된 아름다움에 인생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오신 주님은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진정한 예배와 감사와 찬미의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열두 제자는 그분을 메시아로 고백하며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광야에서 오직 성막만을 따랐던 열두 지파처럼 그다지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광야에는 성막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밖에는 없었습니다. 바로 그 성막이 성육신하여 오셨을 때 열두 제자는 3년 내내 아침 저녁으로 주님만 바라 봤습니다. 그 사랑이 그토록 강력한 체험이었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분은 우리의 신랑이고 우리는 그 분의 신부’임을 고백했습니다. 그 분안에서 모든 생명과 아름다움과 충만한 삶을 발견했습니다.

주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안에서 우리는 사랑과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의 눈빛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주후 1세기 역사는 새로운 지평이 열렸습니다. 인간적인 종교, 철학, 문화를 담은 모든 삶 속에 그리스도는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열두 제자가 보고 듣고 만졌던 주님의 세계는 이 땅 가운데서 경험한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열두 명의 남자는 피가 끓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 분을 따라 나설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인생은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를 꿈꾸며 설레이는 3년을 보냈습니다. 반면 주님이 십자가로 향할 때 그들은 지옥으로 곤두박질하는 절망과 어둠과 슬픔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인간이 도착할 수 있는 광대한 비전 속으로 이끄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처럼 새로운 지평으로 인도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리 주목받지 못하던 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부들에 불과했고 칼을 든 열심당으로 혁명이나 꿈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돈이나 세며 일생을 세리로 마칠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주님을 만날 때 영원한 세계, 하나님의 웅대한 세계를 꿈꾸며 남은 생애를 투자할 수 있었습니다. 그 벅찬 감동과 비전을 안겨 줬던 주님을 3년 동안 따르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다시 일어났을 때 제자들은 무서운 것이 없었습니다.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은 그분을 만난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일회적이고 피상적인 만남이 아닙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마지막까지 봐야 합니다. 주님의 생애를 따라나서서 십자가를 통과하고 부활까지 봐야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이 모든 것의 절정입니다.
우리는 기독교라는 틀안에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힘써 따라가지 않습니다. 마음에 새기며 기억하고 있는 말씀도 별로 없습니다. 주님을 증거하기 어려운 것은 그분을 강렬하게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과 함께 죽는 경험을 한 적이 없기에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듭니다. 부활의 능력을 경험치 못했기에 부활을 증거하기 어렵습니니다.

하나님이 눈 여겨 보시는 숨은 제자

주님은 새로운 역사를 이루는 바로 그 교회를 이루기 위해 항상 함께 다니던 사람을 세우기 원하십니다. 열두 제자 외에 주님을 항상 따르던 사람들이 더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나 사도라는 명분이 있으면 열심히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런 타이틀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주님만 바라보고 묵묵히 따라다녔습니다. 이름도 명예도 없지만 오직 주님 한 분 바라보고 따랐습니다. 23-25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두 사람을 천하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두 사람을 천거했습니다. 이들은 3년내내 주님을 따랐던 사람입니다. 이들은 감추어져 있다가 드러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사도들에 못지 않게 주야로 주님만 바라보고 모든 가르침과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한 사람은 바사바였습니다. 그는 유스도, 요셉이라는 별명을 가졌습니다. 이 사람은 많이 알려진 사람,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맛디아라는 다른 사람은 이름 하나밖에 없습니다. 맛디아는 이름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분명히 둘 다 헌신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중심을 더 살펴야 했으므로 그들은 열두 제자를 택하신 주님이 다시 택하시도록 기도했습니다. 각자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했습니다.

마음은 우리 속에 있는 기억입니다. 매일 그분만 바라보고 모든 고난에 동참하여 주님을 따랐던 이 사람들에게는 주님과 만났던 기억과 추억이 있었습니다.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은 누가 얼마나 깊이 신뢰하며 사랑했는지를 아십니다. 주님이 아시기에 속일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력을 증거하는 부활의 증인들은 두려움을 모르는 자유함을 뿜어 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주님이 주신 한없이 깊은 신뢰와 사랑의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라 살아있는 역사,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구속의 위대한 드라마속의 주인공들입니다. 각자의 배역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생애에 참여해야 합니다. 모든 순간마다 그분을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얼굴로 그분의 이름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봉사의 직무, 사도의 직무를 수행하는 새로운 역사의 일꾼을 뽑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무턱 대고 뽑지 않으십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알고 따르는 사람을 뽑습니다. 그분은 마음을 헤아리는 분이십니다. 마음을 헤아리는 분이 우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의 몸된 교회와 성도를 섬기는 자원봉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마음 중심을 보시고 사용하십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눈여겨 보시며 찾으십니다.
평소에는 아무도 그렇게 마음을 다해 주님을 따르고 날마다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3년여의 시간이 흐른 후 추천을 받고 숨어 있던 그들의 명단이 드러난 것입니다. 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이 아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준비된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