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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택한 그릇 (행 09: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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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사도 바울의 회심은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흔히 '사도 바울의 회심'이라고들 말합니다. 그가 회개해서 새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회심이란 영어로 con-version입니다. 완전히 새로워졌다, 새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회심이라고 합니다마는 어느 모로 생각해보아도 바울 그가 회심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바울 그가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뉘우친 흔적조차 없습니다. 두려운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회심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중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의 인간성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바울의 인격을 말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의 회심을 놓고, 바울 한 사람의 그 회심사건을 통해서 바울을 너무 높이 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이 선택한 회심이 아니니 그렇습니다. 그의 인격에 의해서 기독교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가 공부를 많이 해서 깨달음으로 된 것도 아니요, 인격적인 수양을 하면서 예수를 발견하게 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의 구도자의 자세에서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께 포로된 것일 뿐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바울은 회심한 일이 없습니다. 회심을 생각한 일 도 없습니다. 바울 자신의 회개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 하시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순간에도 그가 뉘우치고 회개하고 '잘못했습니다. 큰 죄를 지었습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을 할 겨를도 없고 그런 느낌도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럴 기회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만날 사람이 있다--그것뿐입니다. 이 얼마나 강권적입니까? 얼마나 일방적입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사도 바울의 경험이라는 것은 참 대단한 것이다, 정말 하나님께서 강제로 포로 하신 사건이다--이렇게 이해됩니다마는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의 회심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을 여러분 자신의 것이라고 믿습니까?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체험을 놓고 보더라도 어쩌면 나는 예수를 안 믿으려고만 했던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자꾸 멀어지려고만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될 수 있는 대로 멀리멀리 가고자 하는 못된 성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막으셨습니다. 사도 바울만이 그토록 드라마틱한 체험을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내 길을 가로막으시고 강제로 붙드셔서 그리스도인 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신앙을 지키도록, 그러지 않으면 안되도록 역사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강권적인 손길을 여러분은 과연 얼마나 의식하고 있습니까?
보십시오. 바울은 문제를 거기서 끝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일생을 통해서 말씀합니다. 오히려 육체의 약함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복음을 전하지 않을 때에 그는 아마도 육체적인 고통을 더 크게 느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밖에 해석되지 않습니다. 육체가 약했기 때문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건강해야 복음을 전하지 약해 가지고야 어떻게 복음을 전하겠어요? 그러나 바울은 약하기 때문에 전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는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나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화가 있을 것이라고까지 말씀합니다. 그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듯 강제로 포로 되었는데 도망을 간다면 죽을 수밖에 없지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분명히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열심히 열심히 전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얼마나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자유와 내 선택, 내 의지, 내 사상, 내 인격에 의해서 예수를 믿고 예수를 선택해서 오늘까지 믿어온 것이냐, 아니면 나는 원래 믿을 사람도 아닌데, 안 믿을 소지가 풍부한데, 끼가 많은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워낙 강하게 붙드셔서 하나님의 사람 되게 하셨고 오늘까지 믿음을 지켜나가 게 하신 것이냐--하나님의 강권, 그 일방적인 능력, 그 선택권을 내가 얼마나 피부로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까? 느끼고 깨닫고 하는 정도가 아니고 몸으로 체험하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붙들렸다고 해서 그가 항상 질질 끌려만 갔느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없이 예수 믿고, 할 수 없이 전도하고, 벌받을까봐, 지옥갈까봐, 저주 받을까봐, 그래서 끌려가는 모습으로 살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붙드신 뜻은 절대로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을 보십시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하고 말씀합니다. 잡혔다는 말은 포로 됐다는 말입니다. 잡혔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억압 적인 일이요, 좇아간다는 것은 자발적인 일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붙드신 그 손, 손길을, 하나님의 강한 의지를 의식하고, 그 다음에는 도망가려 하는 생각이 아니라 좇아가려고 하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도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유 이외에는 자유를 누릴 권리가 없다.' 그렇잖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유입니다. 열심히 사랑하십시오. 그 무한한 자유를 우리가 누릴 수 있지만 여기서 멀어진다던가 벗어나려고나 떠나려고나 하는 순간에는 벌써 엄청난 수렁에 빠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사도 바울은 아무래도 그리스도께 포로된 사람입니다. 그의 의지, 생각, 그의 의견, 사상 같은 것은 일체가 불문입니다. 심지어는 한마디도 변명이나 뉘우침의 소리를 할 기회조차 주시지 않았습니다. 찍소리 없이 끌려가게 된 것입니다. 자유를 온전히 박탈당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문제가 또 있습니다. 본문에 보니 아나니아를 보내십니다. 사울에게 다메섹으로 가라, 네가 행할 것을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고 그만이셨던 주님께서 다메섹의 아나니아를 부르셔서 저 다소사람 사울을 찾아 만나서 그를 치유하고 그에게 내가 하는 이야기를 일러라 하십니다. 두 사람에게 따로따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에게는 다메섹으로 가라, 아나니아에게는 사울을 만나라-양방에 아주 세밀하게 동시의 지시를 하셨으니 연결되는 것이 아닙니까? 아주 오묘한 일입니다. 두 사람이 다 서로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두 사람이 다 순종하고 서로 만나게 됩니다.
저는 가끔 이 대목을 두고 참 재미있게 생각하곤 합니다. 왜 재미있는고 하니 가끔 이런 경우가 있거든요. 어떤 분이 저를 찾아와서는 '목사님, 제가 지금 아주 어려운 일을 당했는데요. 이걸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계시를 보내주셨는데, 곽목사님을 찾아가라, 그러면 몇억 줄 것이다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해결될 것이라 믿고 찾아왔습니다'해요. 이에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그럼 여기서 좀 기다리세요. 하나님께서 내게는 아무개가 올 테니 얼마 줘라 하시는 계시를 아직 주시지 않았습니다.' stand by please--그랬더니 조금 앉아 있다가 가버립디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일이 그렇게 되어야 맞는 게 아닙니까? '그게 아니라면 당신을 만나는 순간, 당신의 그 어려운 사정을 듣는 순간에, 내 마음이라도 감동이 되어야 할 게 아니예요? 정말로 당신이 40일 금식을 했다면, 그 기도가 진짜라면 내 마음이라도 감동이 되어야 하잖아요. 내 마음이 싸늘한데, 꼭 사기 당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이게 하나님의 일이냐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가라 했으면 내가 가서 만날 사람도 감동을 해주셔야 할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맞아떨어져 야 그게 하나님의 역사이지요.
일방적이어서는 안됩니다. 전에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보니 여 전도사님이 어느 날 점심을 들면서 실실 웃는 것입니다. 왜 웃느냐고 물으니 어떤 사람이 편지를 주고 갔는데, 그 편지를 읽어보니 '하나님의 계시였는데 전도사님과 결혼하랍니다' 했더래요. 그렇게 하면 선지자를 낳는다고 하더래요. 편지를 보여 주기에 같이 읽으면서 한참동안 웃다가 '전도사님에게도 무슨 계시가 왔습니까?'하고 물었지요. '나한텐 안 왔어요'해요.
여러분, 오늘 여기서 주시는 말씀은 이래서 오묘한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사건인 것입니다. 생생한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다메섹으로 가라, 네가 만날 사람이 있다 하시고 다메섹의 아나니아에게는 너는 아무개 집에 가서 사울이라는 청년을 우선 만나라 하십니다. 심지어는 가서 할말까지 다 일러주셨어요. 얼마나 오묘한 일입니까? 바로 이 같은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 혼자 일방적으로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밀한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쌍방 에 다 명하셔서 사건을 온전하게 이루어 가시는 귀한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의문스러운 것은, 우리 생각에는 예수님께서 기왕 사도 바울을 만나셨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가르쳐주셨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그러시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너 그 동안 잘못했다, 네가 스데반을 죽인 것도 잘못했고, 이런 것 저런 일 다 잘못했다, 그러니 이제부터 너는 회개하고 열심히 복음전하라, 베드로에게 가서 순종하고, 배우고, 복음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라--이렇게 좍 설명해주셨으면 참 좋았을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딱 한마디밖에 안 하셨어요. 가라, 일러줄 자가 있느니라, 그리고는 왜 아나니아를 통해서 말씀하셨을까, 왜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셨을까 싶어요.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여기까지만 가르쳐주시고, 만나주시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가 계시다는 것, 그리고 만나주시는 것으로만 끝나고, 이상하게도 그 다음 일은 아나니아를 통해서 들으라 하시는 것입니다. 오묘하지 않습니까?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아주 귀한 진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직접 다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어떤 분들은 그래요. 내가 예수님을 만났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경험했다 하는데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그 다음에는 목사님으로부터 배우고, 선생님으로부터 배우고, 친구로부터 배우고, 교회에서 배워야 하겠는데 그러지를 않고, 시시하게 그럴 것 뭐 있나, 직접 배우지, 그러고는 산에 올라가 직접 부딪치려 하다가 사고 납디다. 거기서 성경 다 배워 가지고 내려오겠다는 것이지요. 거기서 성경 졸업하고 내려오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일이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주신 계시도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에게 가서 배우라 하셨습니다. 내가 아나니아를 통해서 말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얼마나 오묘합니까? 초대교회 사도행전은 우리가 이미 보았습니다마는 2장, 3장에 보면 초대교회 사람들이 성령 충만했어요. 그러나 충만했다고 해서 통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계속해서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사도들에게 배웠어요. 내가 체험한 종교적 체험에 대하여 성서적 해석을 얻은 것입니다. 소위 Biblical interpretation(성서적 해석)을 받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일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해서 간접적으로 아나니아를 통하여 힘을 얻게 됩니다. 내가 당한 일이 무슨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내가 당한 사건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뒤에 보니 사도 바울을, 사울이라고 하는 이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다 받았다, 나는 예수님께로부터 다 받았다, 누구의 말도 안 듣는다 하는 교만한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는 아나니아로부터 배웁니다. 그리고 특히 아나니아에게 붙여진 호칭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본문에 보니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10절)'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라고 호칭하는 것입니다. '제자'라고 하는 말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제자라고 일컫지 않았어요.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을 두루 '제자'라고 불렀어요. 단어는 같은데 그 쓰이는 개념이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제자'라고 하는 것은 예수 잘 믿는 사람, 예수를 따르는 사람을 일컫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로 쓰인 말입니다. 주님께서 이 '제자'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시고 그를 통해서 역사 하십니다.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이 사람은 지금 분명히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려고 가는 길이 아닙니까? 좀 더 직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아나니아 같은 사람을 해치려고 가던 길입니다. 아나니아 같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죽이고자 다메섹까지 가는 길인데 예수님께서 딱 붙드시고 굴복시킨 다음에 말하자면 네가 죽이려고 하던 바로 저 사람으로부터 배우라 하시는 것입니다. 기막힌 순간이지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사울 그가 하찮게 여기는 무식 한 사람들, 율법을 모독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그런 사람들,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 사람의 도움을 받고 그 사람에게서 배우라시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참 못 할 짓입니다. 체면이 말이 아니지요. 그야말로 체통이고 뭐고가 완전히 말살 당하는 순간입니다. 자존심 완전히 죽여야 되는 것입니다.
'죽여 마땅한' 사람한테 가서 나 살려주십시오, 나 안수해주십시오, 나를 위하여 기도해주십시오 하는 일인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요. 그러나 실인즉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게 바로 회심이거든요. 사울은 이제 전혀 딴사람으로 변신한 것입니다. 변신하고 보니 그 일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죽어 마땅하고' 그래서 '죽이려고 했던' 바로 그 사람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어라, 먼저 믿은 아나니아 앞에 무릎을 꿇어라 하심입니다. 곧 교회라는 공동체의 성격을 보여주심이요 성도의 교제를 보여주심이요 도움 받는 자의 자세를 말씀해주심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를 도와줄 때에 내가 돕는다고 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계시를 받았다고 '나는 계시 받은 사람이다'하고 귀족연(貴族然)하지 마십시오. 내가 지금 아나니아로부터 태어나는 것입니다. 전혀 스스로 교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와 또다시 듣는 자, 그들과 함께 배우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분명히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직선적인 은혜가 있지만 다시 성도로부터 배워야 하고 같은 제자들로부터, 혹은 주의 종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도움 받는 자세에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그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제 아나니아를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께 일단은 이의를 제기 합니다.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 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13, 14절).' 내가 알고 내가 들은 대로 이런 사람인데 내가 어떻게 그를 만납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쥐가 고양이 앞으로 나아가는 격이지, 아, 나를 죽이려고 찾아오는 사람을 만나라시니 어인 일입니까, 오히려 피해서 도망을 가야 할 판인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가 저런 자를 피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오히려 지금 쫓아오는 저 사람을 만나라시니 될 말씀입니까이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 명령이었습니다. 아나니아로서는 충분한 이유가 있고 거절할만합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나다나엘이라고 하는 사람이 빌립의 전도를 받자 일단은 거부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일이 나겠느냐 하고 거부하지만 와보라 하니까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의심도 많고 문제도 많아요.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순종합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분명한 사실입니다. 말씀하시니 순종합니다. 인간적인 상식으로는 안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가지요, 가서 만나겠습니다 하고 따르게 됩니다.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하나의 모험이었습니다. 가라 하시니 갑니다. 만나라 하시니 만납니다. 가서 전하라 하시니 전합니다. 그뿐입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을 찾아 만날 때에 뭐라고 말합니까? '형제 사 울아(17절)'합니다. 첫마디가 그렇습니다. '이 웬수야'라고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형제 사울아--보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므로,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사랑으로 원수를 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형제관계입니다. 얼마나 은혜스럽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이야기가 그리스도 안에서 있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오직 신앙, 오직 은혜로,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형제 사울아'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불러주어라 하신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러나 아나니아의 마음은 그러했습니다. 왜입니까?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 저도 사랑하십니다. 나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 저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나를 강권적으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저 사람도 강권적으로 부르십니다. 다 함께 은혜 안에 있기 때문에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지마는, 전혀 낯선 사람이지마는 인사가 그러했습니다. '형제 사울아'--따뜻하게 부르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두 사람이 만나게 됩니다. 서로 영접하게 됩니다.
이제 주님께서 아나니아를 통하여 사울에서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우선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하고 사울을 소개하십니다. 여기서 지난 시간에 말씀한 것을 거듭 말씀하지만 은혜와 은사는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택했다' 하심은 한 사람이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고 하는 단순한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를 쓰신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 경륜 안에서 그를 고용하신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저를 부른다-그래서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의 강권적인 능력으로 오묘한 경륜 안에서 적절한 인간을 부르셨습니다. 적절히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놀랐습니다. 사울은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입니다. 종교적 문화적 지적인 경력, 특별히 기독교를 박해한 경력 등을 아울러 볼 때에 사울은 복음을 전하는 데 가장 적절했던 것입니다. 헬라파 유대인이니 헬라말 하는 모든 사람에게, 거의 온 세계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학자이니 임금들과 고관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이방사람들에게 두루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또 있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복음을 전할 때에 핍박을 당해도 할말이 없습니다.
빌립보 감옥에서 사도 바울은 늘씬하게 매를 맞고 죽을 지경이 돼 가지고 찬송을 불렀다고 하는데 무슨 마음으로 불렀을지, 한번 생각해봅니다. 그는 분명히 스데반을 돌로 쳐죽일 때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 스데반은 그 때 얼마나 아팠을까? 내가 맞아보니 대단하거든요. 여러분, 매맞아 보았습니까? 안 맞아보았으면 모를 것입니다. 맞아봐야 그 아픔을 압니다. 그래야 남을 때리지 못합니다. 때릴 줄만 알고 맞는 아픔을 모른다면 아주 잘못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때려봤습니다. 그러나 맞아본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맞아보니 아주 힘들어요. 그러나 그는 생각합니다. 나는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인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주님의 부름을 받고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가, 나아가 순교까지 하게 되었는가--그는 감지덕지합니다. 그래서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그 결과로 옥문이 열리게 된 것이 아닙니까? 생각해봅시다. 하필이면 왜 사울입니까? 이 사람은 포행자요 핍박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방에 복음을 전하면서 앞으로 많은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고, 또한 조금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니까요. 뒤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니까요. 그런 사람이기에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害)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16절).' 내 이름을 전할뿐만 아니라 내 이름을 위하여 앞으로 해를 많이 받을 것이다, 매도 많이 맞고, 감옥에도 많이 가고, 마지막에 순교까지 할 것이다 하심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던 그가 이제는 예수의 이름으로 죽게 됩니다. 가장 합당한 인간이 아니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인 경험이 있는 이 사람을 부르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죽는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렇게도 꼼짝못하게 할 수가 없다 싶어요. 사도 바울은 완전히 포로가 된 것입니다.
불평할 자격이 없고, 아무리 매를 맞아도 아프다 할 권리도 없어요.
이렇게까지 철저히 포로 하신 것입니다. '택한 나의 그릇이라'--사도 바울은 이를 받아 디모데후서 2장 20, 21절에서 말씀합니다.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그릇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그는 처음부터 그릇에 대하여 할말이 많은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도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릇이란 용기(容器)입니다. 그릇의 가치는 그 안에 있는 내용물에 있습니다. 복음을 담는 그릇은 지중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복음을 담은 그릇으로 쓰임 받습니다. 귀중하게 쓰임 받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만나자 안수하고 성령 충만케 하고, 그리고 세례를 줍니다. 안수가 먼저고 세례가 나중에 있습니다. 안수로 치료받고 세례로 그리스도인 됨을 확정하는 것입니다. 앞서 5장에 보면 세례가 먼저 있고 안수가 뒤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안수가 먼저 있고 세례가 뒤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순서에 대해서는 우리가 상관할 필요가 없어요. 하나의 확증하는 예식이니까요. 본문에는 그 다음에 또 하나,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19절)'합니다. 먹었습니다. 기도 받고 그대로 강건해진 것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으니 강건해졌다고 합니다. 확실한 역사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이 태어났다--참 놀라운 일이지요. 결국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의지, 하나님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고자 하시는 그 역사가 이루어짐에 있어서 아주 세밀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사울이라 는 사람을 쓰시는 것입니다. 오묘한 방법으로 불러 쓰시고 그를 통하여 큰 역사를 이루십니다. 바울의 회심은 우연한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교 안에, 확실한 그 경륜 안에 나타난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한사람 한사람이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당하는 사건 하나 하나가 깊이 생각하면 의미 없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사건을 통하여 오늘도 분명히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문제는 내가 그 것을 아느냐 모르느냐 입니다. 그 다음에는 얼마나 알고 감격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만나라고 해도 만나야 했듯이 주님께서 저 사람을 만나라 하시면 미워도 만나야 합니다. 전도하라 하시면 전도해야 합니다. 꿈에도 보기 싫은 사람일지라도 만나야 돼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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