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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초적 불안감에서 벗어나려면 (골 01: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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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골로새서 7번째 강해입니다. ‘원초적 불안감에서 벗어나려면’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골로새서의 주제는 예수님은 누구인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기독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왜 이 기독론이 중요한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정확히 알아야만 정확히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흐릿하게 알면 흐릿하게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8장을 보면 백부장의 믿음이 나옵니다. 백부장이 자기 하인의 중풍병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그 집에 가서 병을 고쳐주겠다고 했더니 이 백부장의 이야기가 ‘예수님께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다만 말씀만 해 주십시오. 말씀만 하셔도 병이 나을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부연설명을 하기를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고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습니다. 이더로 가라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옵니다. 또 하라고 하면 그대로 합니다. 그러니까 말씀만 해 주십시오.’ 대단한 믿음입니다. 이 사람이 하인의 중풍병을 어떻게 이해했습니까? 예수님께서 명령만 하시면 중풍병은 예수님의 명령 앞에 복종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무서운 질병도 예수님의 수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이 ‘이 믿음이 크도다,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라고 하시면서 최고의 찬사를 그에게 보냈습니다.

이 사람은 군인이기 때문에 군인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수하에 부하들이 있습니다. 명령만 하면 목숨이라고 걸 정도로 순종합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이 뭐라고 표현합니까? ‘질병조차도 병조차도 예수님 수하에 있습니다. 오실 것 없습니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백부장은 모든 질병조차도 예수님의 수하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능력을 가지 계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한 믿음이 자기의 삶 가운데 큰 능력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내용과 행동이 다를 수 있습니까? 명확하게 믿어야 명확한 능력이 나타나고 명확하게 믿어야 명확한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1. 화목자 예수님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이제까지 세 가지를 살폈습니다.
①첫째,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구속해 주시는 구속자가 되어주신다, 죄로부터 우리의 건져주시는 분이시다.
②둘째,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이 되어주신다.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고 섭리하고 계신다.
③셋째,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창시자시요 교회를 유지하시고 교회의 머리되시는 분이다.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입니다.

④오늘 살필 네 번째, 예수님은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를 화목케 하시는 분입니다. 화목자 예수님이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는 분이십니다.
21절과 22절을 보십시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절대 거룩하신 분입니다. 거룩이란 죄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범죄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막혀 버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원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혔던 것을 뚫어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지 않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무조건 만나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집니다.

저는 몸의 신비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몸에 쓸개가 있고 쓸개에는 바늘보다도 더 작은 구멍이 있는데 그 구멍에서 담즙이 계속 흘러나온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이 자리에 나올 정도이면 쓸개를 다 가지고 계신 분이고 쓸개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구멍에서 뭐가 자꾸만 흘러나오기 때문에 여기까지 나올 수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 구멍에서 담즙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분 가운데 목숨의 위기 가운데 거하신 분 중의 한분, 그 구멍이 막힌 분이 있습니다. 그 구멍이 막히니까 죽습니다. 막히면 죽습니다. 담즙이 흘러나오는 구멍만 그렇습니까? 어떤 사람은 뇌로 가는 혈관이 막혔더니 마비가 되었다고 합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막히면 다 죽습니다. 뚫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영적인 존재 아닙니까? 그런데 영적인 통로가 막혔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이 죽습니다.

저는 막히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에 대해서 본 적이 있습니다. 전에 있던 동네의 어떤 아파트단지였습니다. 어느 날 이상하게 물이 잘 안 나옵니다. 그래서 이유가 뭔가 하고 아파트옥상에 가서 물탱크를 열어 보았더니 별로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물탱크의 물을 다 퍼냈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 죽은 지 몇 년은 되어 보이는 큰 쥐가 통로를 막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죽은 쥐를 빼내고 나니까 그제서야 물이 뻥 뚫렸습니다. 그 아파트 사람들은 몇 년 동안 그 커다란 쥐가 죽어서 용해된 물을 먹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 아파트 주민들은 며칠동안 밥도 안 먹고 서로 아파트 값 떨어진다고 그 일에 대해서 입을 막았습니다. 저만 계속 말하고 다녔습니다. 저는 거기 살던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성도들 웃음)

이사야서 59장1절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쥐와 같이 막힌 것이 있습니다. 그 쥐가 바로 죄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이 막혀있는 죄라는 큰 쥐를 빼 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뚫어 주시는 것입니다. 흐르지 못했던 흐름을 흐르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하셨습니다. 막힌 것을 뚫으신 분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갈 때 관계가 중요한데 제일 중요한 관계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나의 하나님의 관계가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성경은 ‘의’라고 표현합니다. 디카이오수네, 영어로는 righteousness인데이 의를 ‘인간관계 속에서 정의를 이루고……’ 라고 이해를 하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의의 원초적인 의미는 인간관계에서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 사이의 화해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이루어진 것을 의가 이루어졌다라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내 공로, 내 힘 가지고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화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죽으셨던 그 피를 의지하고 나아갈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행위로 됩니까? 안됩니다! 공로로 됩니까? 절대로 안 됩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가 대만선교를 갔다 왔습니다. 우리가 다른 나라에 입국할 때 필요한 증명서가 있지요. 저도 가지고 있는 증명서가 많이 있습니다.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각종 신분증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 입국하면서 주민등록증 보여주면 입국시켜 줍니까? 운전면허증 보여주면 입국시켜 줍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 것 수백 장이 있어도 입국 안 되고 오직 이것 하나가 있어야 합니다. 딱 하나! 여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아무리 내 공로, 내 행위, 내 철학을 들고 가도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들고 나왔느냐, 그것 하나 인정해 주십니다. 그것 외에는 전혀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로마서 3장20절을 보면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중략)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 있느뇨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믿음의 법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그 믿음만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18세기에 영국에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잔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를 중심으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역사를 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민들을 우리 조상들도 다 했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고민을 안 하는 방법은 역사를 많이 공부하는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우리 고민의 해답이 99.9% 다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인간성이 괜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충성이 있고 열심이 있고 신사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자기들끼리 써클을 만들었습니다. ‘홀리클럽’이라고 합니다. 열심히 믿겠다고 했습니다. 몇 시간씩 기도했습니다. 성경 읽고 기도하고 구제했습니다. 홀리클럽이 교도소 전도의 효시라는 것을 아십니까. 이들이 최초로 죄수들에게 나가서 복음을 전도했습니다. 이것은 혁명적인 일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죄수는 근접 못할 버린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전도했던 사람입니다. 굉장한 사람들 아닙니까?

휫필드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휫필드가 얼마나 금식기도를 자주했던지 수업을 자주 빼먹었습니다. 금식을 밥 먹듯이 했습니다. 열심 하나만 가지고 얘기한다면 휫필드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뭔지 아십니까? 그렇게 많은 열심을 부렸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삶 가운데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해도 건져내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해도 해도 안 됩니다.

여러분, 이땅을 살아가다 보면 열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심 있는 사람들의 큰 축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열심 있는 사람의 특권이 있습니다. 열심으로 어떤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열심만으로 일이 안된다는 것을 깨닫는 특권을 누립니다. 하나님께서 주로 사용하시는 사람을 보면 열심 있는 사람들 가운데 자주 사용하십니다. 열심 있는 사람은 무슨 일에든 열심을 다해 봅니다. 루터도 그랬고 잔 웨슬리도 휫필드도 열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한가하게 사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하여튼 끝장을 보는 인생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깨닫는 것은 열심만으로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열심 있는 사람이 마지막에는 은혜를 붙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은혜를 붙듭니다. 그런데 열심 없는 사람은 열심도 부려본 적이 없기 때문에 열심히 하면 될 되는 줄 알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열심도 안 부리면서……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열심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열심 때문에 쓰는 것이 아니라 열심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에 쓰는 것입니다. 루터를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열심을 다했습니까? 무릎에 피가 날 정도로 고행도 해보고 휫필드도 잠 못 자가면서 굶어가면서 뛰잖아요. 그러면서 나중에 안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것 가지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스쿠걸이라는 사람이 쓴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종교적인 노력으로는 인간이 선해질 수 없고 거듭나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길이 없노라!’ 우리가 보편적으로 누구나 들었던 로마서의 말씀을 듣고 휫필드가 깨지기 시작합니다. ‘그렇다! 열심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집중하지 않으면 영혼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것을 깨달은 다음 그는 찾아다니는 사람들에게 전과 동일한 열심을 가지고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랬더니 부흥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열심 있는 사람들! 잘 보십시오! 우리 가운데도 보면 다 그렇습니다. 저도 그랬던 경험이 있고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뛰었습니까? 열심히 잠 안 자가면서 율동준비도 하고…… 이번 대만선교를 위해서 여러 가지로 눈물겨울 정도로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거기 가서 첫째 날 둘째 날 깨닫는 것은 준비한 것 가지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땀 흘리고 노력했던 것 가지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됩니다. 주님의 능력으로만 됩니다. 은혜로만 됩니다.

그런데 참 묘한 것이 열심을 부렸던 사람은 열심으로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십자가의 의를 추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합니다. 그 다음부터 열매를 거두기 시작합니다. 오늘 저녁에도 간증들을 할 것인데 간증을 들어 보십시오. 어마어마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모두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열심 없는 사람은 소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열심히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열심 가지고 될 줄 아는 묘한 미신이 있습니다. 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어보면 그들은 조금 더 열심히 하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안된다니까요! 안돼요! 절대로! 그런데 그것을 언제 깨닫느냐 하면 열심히 해 보아야 깨닫습니다. 주님의 은혜 가운데 그런 모습이 필요합니다.

저는 복음증거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복음이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렵고 지식적인 것이었다고 하면 지금 예수 안 믿는 사람 가운데 예수 믿을 사람이 더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예수 믿는 것은 참 유치해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심을 바라보라! 네가 한 일 아무 것도 없고 없다! 오직 예수님이 한 일을 받아들이면 구원이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유치하게 생각을 합니다. 철학적으로 빈약하구만, 그 정도라면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복음을 거절합니다. 그러다보니까 머리 잘 도는 사람은 일부러 복음을 어렵게 만듭니다. 어렵게 만들어서 성공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최근 십몇 년 동안의 추세를 보면 사람들이 복음을 어렵게 만듭니다. 예를 들면 구역이라고 하면 될 것을 가지 셀목회라고 하고 알파코스 등 이상한 이름을 붙입니다.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드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어떤 코스웍을 만들어서 중간에 막 탈락시킵니다. 끝나면 자격증도 줍니다. 그렇게 자꾸 어렵게 만들어요. 그런데 사람이 참 묘합니다. 그렇게 어렵게 만드니까 관심을 가지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열심히 옵니다.

만약에 이 예배도 선착순으로 오라고 하면 다 금방 올 것입니다. 아무나 오라고 하니까 늦게 오는 이상한 사람들이 다 있지요. 아무 것도 아니지만 월드컵을 할 때 시청 앞 광장에 사람들이 모였을 때 축구시합은 8시30분에 있는데 아침8시부터 앉아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만일 열심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면 여러분은 다 구원 못 받습니다. 여러분의 열심은 세상에 나아가면 상종할 수 없는 열심이에요.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 있는지 아십니까? 서울역 한번 나가 보십시오. 추석표 사겠다고 거기에서 아예 누워 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셨습니까? 월드컵 입장권 사겠다고 노숙하며 3박4일 동안 라면 끓여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은 그런 열심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렵게 만드는 것을 되게 좋아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렵다는 것이 우리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어려운 것을 했다…… 그래서 자꾸 사람들이 고시를 보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려고 합니다. 어려운 것을 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심리를 이용해서 복음을 어렵게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정신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자체가 틀린 것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계속 가면 우리의 마인드가 변화될 수 있습니다.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 공로, 내 의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변화가 됩니다.

결국 복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나의 몸에 그대로 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푹 빠지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기숙사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대만대학 기숙사에서 조금 더럽게 사는 어떤 형제와 함께 보냈습니다. 저는 남자이니까 빨래나 이런 것을 별로 해본 적이 없는데 거기는 모두 스스로 해야 되니까 여러 가지 도구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하나 정말로 오래간만에 손으로 잡은 것이 있는데 스폰지였습니다. 스폰지를 잡았는데 기분이 상당히 좋더라구요. 이런 감촉이 다 있네-물속에 푹 담갔습니다. 스폰지에서 상당히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스폰지를 물속에 담그니까 물속에 잠겨있을 때의 스폰지는 어디까지가 스폰지이고 어디까지가 물인지 구분이 안갑니다. 이것이 물이야, 스폰지야? 탁 들면 그제서야 아, 스폰지군 하고 느껴집니다.

저는 그때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예수님을 나의 삶 가운데 영접한다는 것이 이 물속에 잠겨있는 스폰지하고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나’라는 자아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의 강수가 밀어닥칩니다. 물속에 잠겨 버립니다. 물속에 잠겨있는 동안 나 자신이 사라집니다. 내가 스폰지인지 물인지 구분이 안 갑니다. 갈라디아서 2장20절을 잘 아시지요. 저는 이것을 스폰지복음이라고 별명을 붙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내가 내안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합니다. ‘나는 스폰지다, 하지만 나는 스폰지가 아니야, 내 안에는 물이 살아. 나는 물이야.’ 그런 얘기지요. ‘나는 물이야. 내 안에서는 물이 역사해!’ 스폰지는 스폰지의 의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속에 있으면 물의 의지대로 가는 것이지요. 바로 그것이 필요합니다.

지난 주간에 대만선교를 위해서 14군데의 교회를 돌아다녔습니다. 하루의 이동거리만 해도 어마어마했습니다. 사실 굉장히 몸이 피곤해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저는 과거에는 무엇이든 잘하려고 했습니다. 설교도 잘하려고 했습니다. 정말 잘하려고 했습니다. 목회도 잘하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제 몸에 자꾸 힘이 들어가고 아플 때가 많았습니다. 안되는 것을 하려고 하니까 아팠습니다. 저는 그다음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깨달았습니다. 스폰지가 물속에 들어가듯이 주님께 잠기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피곤한 몸입니다. 제가 보통 때도 눈이 작지만 오늘 더 작아졌습니다. 눈이 떠지지 않습니다. 굉장히 피곤한 몸입니다. 저는 잘하려고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 그 포인트 하나 증거하면 된다, 나는 통로일 뿐이다, 지치면 지친 상태 그대로, 힘이 있으면 힘이 있는 상태 그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 의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

그런데 묘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냥 그렇게 해 나가는 것인데도 열매가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겠다고 할 때는 잘 안 되는데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충성 다하면 열매를 거둡니다. 그냥 하나님께 붙어있다 보니까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를 받아들인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라고 느낍니다.

오늘도 고갈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삶에 문제들이 많이 있지요. 삶의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하려고 하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 의지할 때만 능력이 나타납니다. 오직 십자가의 의를 붙들고 주님을 영접하고, 물속에 잠겨있는 스폰지와 같이 주님의 물결이 역사하는 하나님의 귀중한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삶의 특징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이기려고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열심 있는 사람이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을 내가 책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열심 가지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공부 열심히 한 사람들이 성공을 합니다. 공부 때문에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 가지고 안 된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에 성공합니다. 똑같은 논리입니다. 공부를 안 해 본 사람은 공부를 더 하면 될 줄 압니다. 그래서 공부 안 해 본 사람이 나이 서른 넘어서까지 공부하겠다고 합니다. 공부가 답인 줄 압니다. 그런 공부를 어렸을 때에 착실히 잘한 사람은 거의 철학적인 수준에 올라갑니다. 공부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인생 후반기부터는 진짜 필요한 공부를 합니다. 인간관계가 중요하고 겸손함이 중요하고 기도가 중요하고 섬기는 것이 중요하고…… 스물다섯 전에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공부가 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공부한 사람만 압니다. 늙어죽을 때까지 공부만 찾다가 죽지 마십시오. 빨리 깨달으십시오. 공부가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어야 합니다. 은혜를 붙듭시다. 은혜를 받고 그 힘을 가지고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산상수훈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하는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왼뺨을 때리거든 오른뺨을 돌려 대고 억지로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까지 가 주고 구하는 것을 거절하지 말라”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솔직히 이런 삶이 가능합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땅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이 관계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기려고 하다가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기 위해서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져 주라는 것입니다.

싸움이 벌어지는 교회에서 그런 예를 많이 봅니다. 나의 라이벌과 싸움을 벌입니다. 억지로 그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싸움에서는 이겼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중요한 것 아닙니까? 예를 들어서 연애를 하는 사람은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떤 여자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여자의 마음을 얻고 싶습니다. 그런데 내 옆에서 나의 라이벌인 어떤 남자친구가 와서 집적댑니다. 보통 때 같으면 주먹이 운다고 할 사람이 일부러 씩 웃는 이유가 무엇이지요?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양보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중요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것보다 덜 중요한 관계를 포기하게 되어있습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산상수훈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나머지 관계는 포기할 수 있는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주일을 맞아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예배로부터 우리의 관계를 시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나가서 사람과의 관계를 맺겠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원리입니다.

우리는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지 않습니다.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이땅과의 경쟁에서는 승리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은혜가 떠나기 때문입니다.
여기 젊은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 어떤 보상보다는 일할 수 있는 곳으로 가시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채우는 기적을 맛보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았던 모델이 있습니다. 창세기 22절을 보면 이삭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삭이 우물을 팠습니다. 이것은 오아시스입니다. 재산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랄 목자가 와서 그것이 우리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삭은 그들과 싸우지 않고 두말없이 주어버립니다. 또 와서 팠더니 또 물이 터지고 또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또 주어 버렸습니다. 또 물이 터져 나옵니다. 이제는 미안하니까 그들도 말을 못합니다. 그 우물 이름을 르호봇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장소를 넓게 하셨다고 하면서 누리게 됩니다.

이삭은 세상과 경쟁하는 인생이 아니라 세상의 경쟁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한 인생이었습니다. 우물 하나 가지고 싸우는 인생이 아니라 우물보다 훨씬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인생이었습니다. 흘러넘치는 은혜가 경쟁에서 이깁니다. 나중에 그랄 목자들이 이삭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은혜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살아가야합니다. 세상과 경쟁하지 마십시오. 그보다 더 큰 은혜를 구하면 됩니다.
저는 이번 대만선교를 갔다오면서 하나님께 참 감사드렸습니다. 많은 액수도 아니고 많은 선물도 아니지만 우리가 선물을 나누어줄 수 있다는 것, 우리가 헌금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더 주시면 더 베풀 수 있잖아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은혜의 통로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우리는 세상과 경쟁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 큰 은혜를 구하는 백성입니다.

제가 전에 워치만 리의 설교집에 나오는 예증을 들었었습니다. 워치만 리가 전도여행을 떠나는데 급물살이 있는 강에서 배를 타고 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눈앞에 커다란 암초가 있습니다. 배가 파선위기에 놓였습니다. 그래서 잠시 묵상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나 살려달라고 하고서 눈을 떠 보았더니 갑자기 어디선가 알 수 없는 물이 흘러넘쳐서 물이 불어나서 그 암초보다 더 많은 물이 있으니까 배가 그 암초를 뛰어넘어가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예배드리는 성도에게 적은 개인적인 암초들, 가정적인 암초들, 직장에서의 암초, 사명감당할 때 닥쳐오는 암초들이 있지 않습니까? 교회에도 암초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것을 이길 수 있지요? 흘러넘치는 은혜의 강수가 밀어닥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묘한 여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부자입니다. 하나님의 흘러넘치는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가 날마다날마다 비참하게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왜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싸우고 있습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이렇게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은혜 없는 사람은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거지들을 보십시오. 서로 먹을 것 가지고 싸우잖아요. 우리도 가난할 때는 그렇습니다. 우리나라가 6.25이후에 그랬어요. 먹을 것이 없어서 먹을 것을 훔쳐가고 그랬습니다. 가난하니까요. 그러나 지금 밥그릇 붙들고 기도하는 사람 있습니까? 밥 많이 주면 오히려 화를 내지요. 생활이 여유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그런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들에게 이런 은혜가 임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내 힘 갖고 살 수 없습니다. 내 삶에 은혜가 없습니다. 모래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고갈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아시지요. 내가 일은 많은데 능력이 없습니다. 날마다 피곤합니다. 걱정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힘에 벅찹니다. 주님 이러다가 내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갈되어 쓰러지겠습니다……여러분들 괜히 병들지 않습니까? 몸이 약하지 않습니까? 허리가 휘지 않습니까? 은혜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을 하나님의 은혜로 부어달라고 구하는 시간입니다. 가정과 개인과 교회 가운데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 붙들 때 은혜가 넘치는 인생이 됩니다. 우리는 경쟁의 논리가 아닙니다. 은혜의 논리입니다.
경쟁보다 더 큰 은혜의 논리로 승리하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용서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화평을 이룬 사람의 두 번째 특징은 용서하는 삶을 삽니다.
용서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용서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용서받은 사람의 당연한 결과입니다. 마태복음 18장을 보면 1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나옵니다. 주인이 1만 달란트 빚진 것을 탕감해 줍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100데나리온 빚진 사람이 있습니다. 100데나리온 빚진 동관의 멱살을 잡고 갚으라고 합니다. 못 갚겠다고 했더니 감옥에 집어넣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럴 때 주인이 다시 불러서 이런 놈이 있느냐면서 작살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잘 보십시오. 1만 달란트라는 것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닙니다. 무한대의 액수라는 뜻입니다. 1달란트가 3, 4㎏거든요. 계산하기 편하게 곱하기 2를 해서 68㎏짜리 여자가 있다고 합시다. 아주 살이 충만하신 여자 분이 있는데 그것이 다 금덩이에요. 그런 금덩이로 된 여자가 5000명 있습니다. 그것이 다 금입니다. 5000개의 금덩어리, 그것을 액수로 산정할 수 있겠습니까? 산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1만 달란트는 생각할 수 있는 무한대의 돈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빚을 진 사람이 탕감을 받았습니다. 대단한 은혜지요. 대단히 감사하지요. 그러면 이 사람은 평생을 눈물로 지내도 감지덕지한 인생 아닙니까!

그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사람이 있습니다. 1데나리온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일당입니다. 우리가 하루 일당을 10만원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100데나리온은 1000만 원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빚질 수 있는 액수입니다. 그런데 1000만 원 빚진 사람이 돈을 안 갚겠다고 하니까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러면서 ‘사회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저런 놈들은 놓아두면 안돼! 사회경제질서를 무너뜨리는 사람이야. 남의 눈에서 눈물나게 만들면 자기 눈에서는 피눈물이 난다는 것을 알아야 돼! 선이 확실해야 돼! 기준이 있어야 돼!’ …… 그랬더니 주인이 뭐라고 합니까? ‘너는 1만 달란트 탕감받고 남에게 100데나리온을 탕감 못해 주냐!’ 하면서 감옥에 집어넣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런 인생 아닙니까? 저는 은혜받은 사람이 행해야 될 최대의 비용은 다른 사람에게 관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은혜받은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조건 용서합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제일 힘이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죄를 짓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 참 애매합니다. 죄인이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아니라고 하기도 애매합니다. 정말 힘든 사람은 나이 서른이 되도록 남자 손 한번 안 잡은 여자입니다. 이런 여자는 누가 팔짱만 끼고 다녀도 다 더러운 여자라고 합니다. 자기 기준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러면서 눈에 보이는 별 죄가 없는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남을 미워하고 질투하고 시기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목회할 때 제일 힘이 되는 사람은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입니다. 이번에도 어떤 대만선교 팀에 갔는데 정말 기분 좋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예배시간에 항상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설교하면 가만히 안 듣고 끄덕끄덕하고 얼마나 반응이 좋은지…… 그래서 나는 그 사람만 쳐다보면서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예배에는 참여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왜 그러느냐 하면 죄를 정말 많이 지은 사람입니다. 깨지고 상하고 아픔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무슨 설교를 해도 다 은혜를 받습니다. 주변의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다 용납이 가능합니다. 용서가 되는 사람입니다. 왜 되느냐 하면 누구든 나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창기나 세리하고 똑같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정죄가 없습니다. 그래도 저 사람은 나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넘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파도를 칩니다. 그것이 상한 심령입니다. 주님이 그런 심령을 원하십니다.

반면에 우리 마음이 너무 높아져 있으면 어떻습니까? 우리 마음이 높아져 있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교정시키는지 아십니까? 자기 자신이 깨지지 않으면 자기 주변의 사람 가운데 누구를 넘어뜨립니다. 그래서 이것이 생각대로 쉽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예를 들어 자기 자녀 가운데 망나니 같은 애를 나오게 만듭니다. 자기가 이제까지 얘기했던 그 기준으로 자기자녀를 얘기 못하잖아요. 비로소 용납하게 됩니다. 사람은 이렇게 범죄할 수도 있고 넘어질 수도 있고 쓰러질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넘어져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두 가지를 해야 됩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붙듦으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주님께 용서를 구하면 용서해 주십니다. 범죄했을 때 우선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또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범죄한 사람일수록 반드시 나보다 더한 사람들을 용서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과 행위를 자꾸 구분하려고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든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반드시 은혜를 구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용서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뒤집어 얘기해서 어떤 사람이 내 힘으로 내 힘으로 내 힘으로 라고 한다면 입으로는 뭐라고 하든 간에 그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 자기 입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얘기하지만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있지요? 그 사람은 진정으로 예수님 앞에 죄인으로 선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님 앞에서 범죄했던 모든 것의 사함의 감격을 느끼는 사람은 용서할 수밖에 없습니다. 용서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용서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 됩니다.
솔로몬에게 시므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길 때 사울의 자손 가운데 시므이라는 사람이 있었지요. 이 사람은 다윗을 욕하고 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재수없는 놈아! 재수없는 다윗! 재수 꽝!!!’ 이렇게 욕 하던 사람입니다. 그럴 때 주변에 있는 사람이 ‘저놈을 죽일까요?’ 라고 하니까 다윗이 ‘죽이지 마라. 저 사람의 저주 까닭에 하나님이 나에게 선으로 갚아줄지 아느냐?’ 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위대합니다. 쫓겨 가면서도 자기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용서했습니다. 품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솔로몬에게도 그를 용서해주라는 유언까지 했습니다. 그랬더니 솔로몬이 어떻게 합니까? 솔로몬이 시므이에게 내가 우리 아버지에게 행했던 것을 용서할 텐데 대신 네 집 근처를 떠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시므이는 잊혀졌습니다.

사무엘상 2장에 가면 무슨 얘기가 나오느냐 하면…… 시므이는 사울왕의 계보였기 때문에 여전히 부자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 가정에 종이 있습니다. 두 명의 종이 있었는데 이 노예가 가드왕 마가에게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다윗에게 용서를 받고 솔로몬에게 용서받았으면 그 종들도 용서해 주면 안 됩니까? 그런데 시므이는 용서하지 못하고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배은망덕한 놈아!’ 하면서 종 두 명 잡으러 갔다가 솔로몬에게 발각됩니다. 그래서 죽임당합니다.

저는 이것이 구약에 나타나는 용서에 관한 귀중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용서받은 사람은 용서해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용서 안 하려고 쫓아가다가 자기가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모든 백성들은 모두 용서하는 모습 가운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용서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었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물을 것도 없지만 누가 우리에게 왜 용서하느냐고 물으면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십시오.
예수님을 믿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전보다 부유해집니다. 재수하던 사람이 기도하는 가운데 대학에 붙었습니다. 맨날 라면 끓여먹던 가난한 교숙자가 연봉 4000, 5000 하며 잘난 척 하고 다닙니다. 부요해졌습니다. 연약할 때 허리가 휘어지고 걷지도 못하던 사람이 이제는 뛰어 다닙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요하게 만드셨는데 이상하게도 우리 삶이 풍성하지는 않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재수할 때, 가난할 때는 어렵게 어렵게 선교도 갔습니다. 헌신하고 새벽기도도 나왔습니다. 힘들 때인데 선교하고 기도하고 헌신합니다. 안쓰러울 정도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부요함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와-이제 얼마나 풍요로워질까……’ 그런데 풍요롭기는커녕 쪼들려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잘 보십시오. 2, 3년 전에 비해서 우리가 얼마나 부요해졌습니까? 그런데 삶은 풍성해졌습니까? 십자가 떠나면 부요함은 있더라도 풍성함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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