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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공동체가 함께 사는 법 (살전 0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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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만남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만남의 복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중 하나가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만남을 축복의 기회로 바꿀 수 있도록 만남을 준비해야 합니다. 준비돼 있지 않으면 좋은 만남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관계 위에 세워지는 만남의 복

무엇보다도 중요한 만남의 복이 있습니다. 꼬이고 어그러진 모든 삶의 영역을 회복하는 만남, 바로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에 하나님은 사람이라는 통로를 사용하셔서 은혜와 축복을 부어주십니다. 따라서 만남에 실패하고 올바른 관계를 세우지 못하면 하나님의 축복과 임재도 막힐수 있습니다.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마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을 통해 만남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실존주의의 헛되고 목마른 삶, 허무한 삶에 절망하고 있는 지성계를 깨웠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혼자 있으면 기쁨도 보람도 없습니다. 뭔가 열심히 일을 하는 것도 누군가 봐주는 사람, 인정하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이 있을 때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첨단 과학과 기술, 통신, 교통, 정보의 발달로 세상은 이제 24시간 안에 도달 못할 곳이 없는 지구촌 시대가 됐습니다. 그러나 물리적인 거리는 이처럼 가까와 진 반면에 인격적인 만남, 진정한 만남은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외와 외로움에 시달리며 고통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친밀감, 진실된 모습으로 서로를 만나 확인할 수 있는 관계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잘 말해 줍니다. 아무리 큰 업적을 이뤘을 지라도 관계를 세우는데 실패한 사람은 고독한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앗아가는 무서운 세력입니다. 그러나 이런 죽음이 생명은 취해 갈수 있어도 내게 남은 소중한 관계만은 절대로 가져가지 못합니다.
모세와 우리 사이에는 3천년이라는 긴 세월의 간격이 있지만 인격적인 만남이 가능합니다. 비록 세상을 먼저 떠난 성도들이라할찌라도 주 안에서 믿음의 관계는 영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계 속에 참 행복과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결국 우리 삶의 기초, 터전은 올바른 관계입니다.

성경에서 ‘의’라는 말은 바로 올바른 관계입니다. 올바른 관계 속에 참된 의가 있고 그 의 위에 우리의 삶은 든든히 세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더불어 살아가는 훈련, 너와 나 사이의 진정한 만남, 인격적인 만남, 신앙적인 만남, 올바른 관계를 배울수 있습니다. 이런 관계의 훈련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습니다. 12절,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길에 대해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지도자와의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지도자를 귀히 여기며 순복하는 태도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리더십은 매우 중요합니다. 리더십이 흔들리면 공동체가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가 올바로 견고히 서 있는 것은 나를 포함한 공동체의 복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지도자를 귀히 여겨야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지도자를 굳건히 세우는 것은 공동체를 지키는 것입니다.
지도력은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흔들리고 약하면 보완하며 지지해야 합니다. 지도자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계속해서 건강하게 일어나도록 지지하는 일들은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누구보다도 수고하는 사람입니다. 지도자가 부지런하지 않고 열심이 없으면 그 공동체는 건강하기 어렵습니다. 주안에서 다스림은 힘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섬김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본을 보임으로, 영적권위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또한 진리를 통해 다스리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고 인도하며 보호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영적 지도자들을 가장 귀하게 여기라고 말합니다.

지도자에 대한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일치합니다. 지도자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엉터리 지도자에 대해 때로는 비판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사람에 대해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순복하는 태도는 잃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잘못된 지도자는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사울이 아주 잘못 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순종합니다. 물론 때로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원수를 멸해 달라며 기도 했지만 사울에 대해 그가 직접 대적하거나 반발하지는 않았습니다.

영적 지도자는 섬김을 당연하게 받으면 안됩니다. 영적 지도자는 먼저 존경받고 인정 받을 수 있도록 갖춰야 하며 누구보다 먼저 헌신하며 본을 보여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부족한 지도자라 할찌라도 그를 귀중히 여기는 이유는 그 사람 때문이 아닙니다. 혹 어떤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이 있을 지라도 사람을 섬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그를 섬기고 귀히 여기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이 기억하시며 복되게 하십니다. 영적 지도자에 대한 이런 순복하는 태도를 지니면 하나님의 때에 주께서 우리를 세우고 높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내 평생의 길을 인도하는 동안 누구를 섬기라고 주신 기간이 있습니다. 그 때 충성해야 합니다. 그 기간동안 충성하고 섬기면 하나님이 어느날 내가 서야 할 자리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지도자를 대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입니다.

크리스천은 ‘화목’을 만드는 공장
교회안에서 훈련하고 배워야 할 두번째 모습은 동료 사이의 화목입니다. 보통 동료간에는 화목하기보다 경쟁하기 쉽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가장 큰 힘이 되기도 하지만 가장 민감한 경쟁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똑같이 신앙이 출발했는데 어느 한 사람이 앞서 가기 시작하면 마음이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화목을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큰 시기와 경쟁의 대상이 바로 동료입니다.

약한 사람을 위해서는 희생할 수 있습니다. 우두머리를 위해서도 희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쟁자를 위해서 포기하고 희생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동료간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침이 화목입니다. 무엇보다도 서로 화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가치관,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새사람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첫번째 요구하는 사명과 직책이 있습니다. 화목케 하는 직책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화목을 만드는 사람, 평화의 도구가 돼야 합니다. 구원을 다른 말로 번역하면 화목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인정받았기에 다른 동료들간에도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회개하십시오. 평화를 만드는 사람, 평화의 도구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타락은 관계의 단절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관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이 때는 만물이 올바른 관계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 타락하는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아담과 이브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도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여 죽이는 사건으로 인해 아담과 이브는 관계파괴에서 오는 가장 큰 고통을 맛봐야 했습니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이와 다른 회복된 모습을 동기간의 우애를 다룬 이스라엘 민화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형은 새롭게 가정을 이룬 동생을 걱정하고 동생은 식구가 많은 형을 염려하여 곡식더미를 몰래 서로 챙겨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밝은 달이 비추는 날 서로의 행동을 알게 된 아름다운 얘기입니다.

서로 양보하는 그 자리가 구약에 등장하는 유명한 오벳에돔의 타작마당입니다. 후에 오벳에돔의 타작마당에 성전이 세워집니다. 이처럼 형제, 동료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진정으로 회복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주간 목요일에 제자들과 성만찬을 하시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마지막기도, 대제사장적 기도에는 십자가를 지는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화목함으로 하나되기를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9절을 보십시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목케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악인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평화를 만들지 못합니다. 악한 사람들은 다투고 싸우고 시기하고 남을 넘어뜨릴 수는 있어도 화목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모릅니다.

특별히 교회 공동체의 화목을 깨는 가장 나쁜 것은 험담입니다. 수군거리고 험담하며 남의 말 하는 것을 중지하십시오.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은 힘써 전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으로 덮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입니다. 험담하여 남을 넘어뜨리는 것은 사단의 역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여기서 말하는 규모없는 자, 힘없는 사람, 마음 약한 사람은 세상으로 말하면 내 아랫사람이나 후배들입니다. 믿음으로 말하면 초신자들로 아직은 성숙치 못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관계는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짐을 지는 것입니다. 이런 대원칙이 있습니다. 세상의 논리는 약자가 강자의 짐을 집니다. 오히려 세상은 약한 자에게 더 섬기라고 합니다. 반면 교회와 가정은 언제나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자리입니다. 그런 면에서 주차장에서 봉사하는 분들이나 러빙핸즈들은 우리보다 더 성숙한 분들입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분들입니다.

약한 자 격려, 규모 없는 자 권계해야
교회는 강한 자가 약한 사람의 짐을 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약한 사람에는 세 부류가 있습니다. 먼저 규모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생이 훈련되지 않아 자기가 뭘 해야 할 지를 모르며 엉뚱한 일에 간섭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과 여행을 다니면 종종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사람들은 훈련이 안 돼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어렵게 할 수 있습니다.

규모있는 삶이 공동체를 세우는 데 매우 중요함으로 이런 사람은 권계하며 훈련해야 합니다. 규모있는 사람으로 바르게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 필요합니다.

둘째로 마음 약한 사람, 소심한 사람이 있습니다. 염려가 은사인 사람입니다. 세상 모든 근심 걱정을 홀로 지고 가는 사람이 마음 약한 사람입니다. 체질적으로 이런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책망하기 보다 격려하며 용기를 불어 넣어야 합니다.

셋째로 힘이 없는 자는 영적으로 약한 사람, 유혹에 약한 사람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식으로 표현하면 규모없는 사람은 일하지 않는 사람, 마음 약한 사람은 불필요하게 죽은 사람까지 걱정하는 사람, 힘없는 자는 성적인 유혹, 도덕적인 유혹과 시험에 쉽게 넘어지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유혹에 약한 사람은 혼자 다니게 하면 안되고 곁에서 붙들어줘야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보호자, 감독자가 필요합니다. 스스로 약한 사람은 혼자 있기 보다 성숙한 사람, 자신의 믿음을 세워줄 사람과 항상 같이 다님으로 성숙을 도모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붙들어 주다 보면 자신도 지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성경은 오래 참을 것을 권면합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약한 자를 격려하고 힘 없는 자를 붙들며 규모없는 자들을 권계하는 일들은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대신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고마워 하십니다.
남의 짐을 지고 슬픔 위로하면 주님께서 상급을 주주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지치지 않고 계속하면 주님의 놀라운 상급과 축복이 있습니다. 남의 짐을 지고 다른 사람의 문제에 동참하면 하나님께서 내 짐을 대신 져 주십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상상 못할 만큼 악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만날 때 자칫하면 맞서서 복수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언성을 높이며 맞설 수 있어도 꾹 눌러 참는 이유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정당한 분노일지라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맞서면 도리어 악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사단의 세력을 오히려 도와 주는 격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단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사단은 우리를 집요하게 괴롭혀서 넘어뜨릴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악으로 갚도록 넘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넘어지는 그 순간에 마귀는 웃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악으로 맞서지 말고 마지막까지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악을 악으로 맞서는 그 순간 나는 하나님의 도구, 의의 도구가 아니라 불의의 도구가 되며 사단의 세력을 강화시켜 줄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을 처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 기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진정한 승리를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을 위해 부르셨습니다. 선한 목적, 거룩한 일을 위해 부르셨습니다. 선한 일을 할 때 하나님 나라가 확장됩니다.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에 자신을 쏟아 귀히 여기고 화목하며 오래 참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수고 위에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과 위로가 있습니다.

고난주간입니다. 먼저 어그러진 관계를 바로 잡으십시오. 윗사람과 잘못된 관계는 화해하고 용서를 구하십시오. 아랫사람에 대해 힘들게 한 일, 상처준 일이 있다면 가서 사과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악을 멀리하고 선을 추구하는 삶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번 주간에는 프란체스코의 기도가 여러분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어두움에 빛을 가져오는 자가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는 자 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서 받고 용서함으로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며 죽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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