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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기쁨이 되라 (갈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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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전 세계에서 이단이 가장 많은 나라 중의 하나가 우리 한국일 것입니다. 현재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는 자가 세 사람이나 됩니다. 하나는 죽고(박태선), 하나는 구속되었고(조희성), 하나는 버젖이 경제인으로 활동하고(문선명)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칭 재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자그만치 38명이나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나라엔 복음이 왕성한 반면 이단이 더욱 기승을 부려서 전세계의 주목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이단들이 도대체 왜 나타나고 이렇게 창궐하게 됩니까? 그리하여 믿음이 그렇게도 좋던 갈라디아교회를 괴롭혔고,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를 괴롭히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이단들이 많이 생겨났습니까? 이단들이 생긴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단들의 대부분은 복음을 정확하게 알지 않고 그 복음을 자기의 입맛대로 각색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을 정확하게 알지 않고 자신들의 구미에 맞도록 했다는 것은 복음을 자신을 위해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생각의 수준에 맞추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본문 9절은 '다른 복음은 없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신분을 막론하고 저주를 받는다'고 선언한 후 바울은 다른 복음이 횡행한 이유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1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즉 그들은 복음을 복음으로 알지 않고 자신들이 영달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바로 이 점을 계속하여 바울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남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한 두 번 하다보면 그 사람이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나쁜 말은 하지 않고 좋아하는 말만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다 보면 좋은 말만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말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죄를 지적하고 그 죄에서 돌아서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언제 가장 큰 은혜를 받습니까? 무조건 용서를 선언하고 사랑한다고 사랑을 선언할 때입니까? 무조건 복을 받으라고 선포할 때입니까? 물론 그 때에도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그 때 뿐입니다. 오래가지 않습니다.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들이 오래도록 은혜를 마음에 간직하고 살 때는 언제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죄를 깨달아 알고 그 죄에서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았다는 확신을 얻을 때에 가장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까?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 내가 주님의 은혜로 용서함을 받아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이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까? 우리가 찬송을 부를 때에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을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 얻음은 확실히 믿기는 어린 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라고 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속죄를 깨달을 때에 큰 은혜를 받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기를 청하여' 예수님이 이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일어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붓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36∼38). 이를 비난하던 바리새인과 의아해하고 있던 베드로에게 주님은 빚진 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고 하십니다(40∼42).

그러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43∼46). 그리고 주님이 결정적으로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주님을 더 사랑합니까? 그것은 주님의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 아니라 많은 죄를 용서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정말 그의 죄가 많아서 많은 죄를 용서함을 받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아 아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지적하는 엄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는 이러한 권면과 징계가 사라진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성도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설교를 하라고 설교자에게 은근히 압력을 넣습니다. 자기 마음에 맞지 않거나 자신의 죄를 지적하면 자기를 친다고 생각하고 쌩하고 돌아섭니다. 그리고 아무도 죄를 지적하는 말에 대해서는 '아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축복을 선언하고 복을 받으라고 하면 모두가 다 '아멘'하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자에게 은근히 압력을 넣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설교자들도 교인들이 좋아하는 설교만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교회가 오늘날 죄를 지적하는 설교가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적하는 설교가 사라지니까 사람들의 입에서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불평만이 나오게 됩니다. 더 좋은 것을 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에서 감사가 사라졌다면 이미 여러분의 신앙은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우리가 불평할만한 존재들입니까? 우리는 불평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맞추어 달라고 요구할 자격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엄청난 죄악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하여 왜 우리들이 이렇게 되었는지 원인을 알아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사람의 종이 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간혹 하나님보다도 사람을 더 두려워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람들을 좋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게 좋은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인심을 얻어서 그것으로 인기도 얻고 그래서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공통된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사람의 종이 되는 지름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사람의 마음에 맞추어서 말씀을 전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인간에게 아부하는 것이 됩니다. 그 사람은 사람의 종이 될지언정 하나님의 종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전2:1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 복음에 인간적인 요소를 제거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변질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말씀을 하나님의 편에 서서 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편에 서서 외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우리 교회들이 이 점을 솔직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교회의 설교가 권력의 시녀 역할을 했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교회가 민주화에 앞장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유신정권과 군사정권에 아부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부를 찬양하고 정부시책을 옹호하는 것은 정교분리가 아니고 정부에 대항하여 성경의 진리를 말하는 것은 정교분리 원칙에 위배된다는 이상한 논리를 폈습니다.

교회에 유리할 때에는 정교분리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교회에 불리하면 정교분리를 목소리 높여서 외쳤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교회는 과거에 정교분리라는 미묘한 주장을 하면서 권력의 시녀노릇을 했었습니다. 이러기에 복음이 변질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권력의 시녀이지 교회로서 진리를 파수하는 기관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러한 점을 회개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우리 교회는 교회의 실력자들의 입맛에 맞게 말씀을 전하는 행위를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실력자의 입맛에 맞추지 않으면 그 목사가 그 교회에서 쫓겨나는 비극도 있었습니다. 이것도 다 회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 교회의 실력자의 입맛에는 맞추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진리를 세우는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되게 하는데 방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변질시키는 요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종이 되든지 아니면, 사람의 종이 되든지,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종이 되든지, 아니면 죄로 인하여 마귀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들은 지금 어디에 종이 되어 있는가를 우리의 생각과 말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의 생각과 언어생활이 과연 하나님의 원하시는 대로 하고 있는가? 아니면 마귀의 원하는대로 하고 있는가? 우리 스스로가 이것을 판단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은 사람들의 종이 되지 않았고, 복음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이 진리의 복음을 버리고 사람들의 종이 되어 이단으로 간 자들을 이상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22장에 보면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이 삼년을 지내'고 있는 중에 '유다 왕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왕 아합은 '길르앗 라못은 본래 우리의 것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어찌 아람 왕의 손에서 취하지 아니하고 잠잠히 있으리요'라고 말하면서 '당신은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싸우시겠느뇨'라고 유다왕 여호사밧을 부추깁니다. 그러자 여호사밧은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일반이요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일반이니이다'라고 동의를 합니다. 그러면서 여호사밧은 '청컨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 보소서'라고 제안을 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왕은 '선지자 사백인쯤'을 불러서 '내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400명의 선지자들이 일제히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라고 아합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을 표시합니다. 그러자 여호사밧은 '이 외에 우리가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지 아니하니이까'라고 아합에게 묻습니다. 그 때에 아합이 여호와사밧에게 '오히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고 말합니다(22:8). 그러나 여호사밧은 그를 당장에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미가야를 데리고 간 사자가 '선지자들의 말이 여출 일구하여 왕에게 길하게 하니 청컨대 당신의 말도 저희 중 한 사람의 말처럼 길하게 하소서'(13절)라고 거짓말을 강요합니다. 그러나 미가야는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14절)고 합니다. 두 왕의 앞에서 예언하기를 그는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17절)라고 예언합니다. 그러면서 미가야는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23절)라고 합니다.

아합은 변장까지고 하고 전쟁에 나갔지만 선지자의 이 예언대로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쏜' 화살을 맞고 그만 죽게 됩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비록 이름이 없는 선지자이지만 정말 절대 권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만을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결코 인간의 눈치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말 참 선지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전서 2:4에서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고 자신의 사도직을 수행하는 원칙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0:33에서는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로마서 16:18에서 사람의 기쁨을 구하고 사람의 기분을 맞추는 설교자들을 향하여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5에서는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유다서 1:16에서도 거짓 목자들의 특징을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고 합니다.

우리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진리에 서서 있다면 우리는 절대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보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먼저 하게 될 것입니다. 돈 몇 푼 때문에 복음을 외면하고, 알량한 권력 때문에 복음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명예 때문에 신앙을 버린다면 우리는 사람의 종이지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복음의 종이 될지언정 죄의 종이 되지 않기를 우리는 스스로를 다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박 목사에게 복음이 종이 되도록 여러분이 협조를 해 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 주지만 죄악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고통과 지옥으로 몰고 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종이 될지언정 사람의 종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은 영원하지만 사람의 영화는 잠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큰 재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히11:25∼26).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이라면 사람의 종이 아니라, 세상의 종이 아니라, 권력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들이 되어야 합니다.

2) 믿는 이들이 복음적인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복음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떠한 삶의 기준에 의하여 살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정해야 합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삶의 원리가 복음인가? 아니면 세속의 원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만 열면 '우리에게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분은 이미 죄인의 신분이 아니라 의의 신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천국의 시민의 삶이 아닙니다. 의인의 삶도 아닙니다. 때로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악하고 더 죄인일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자신의 일이 잘 되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을 합니다. 그런가하면 반대로 잘못했는데도 불구하고 물질적인 풍요를 받을 때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나는 아무것도 잘 한 것이 없는데 물질의 축복이나 세상적으로 잘될 때에 이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하는 영악함까지도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갈라디아서에서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6:12∼13에서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당시의 사람들이 복음대로 살지 아니하고 단순히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고 ...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고 합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를 믿기는 믿어야 하겠는데 그리스도를 믿는데 유대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단지 체면을 위하여 십자가를 이용했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음으로 인하여 자신에게 닥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고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을 뒷받침해 줄만한 아무런 삶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즉 믿는 이의 본이 갈라디아 교회에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인하여 '온 아가야 지방에 소문난 교회'라고 바울은 칭찬했습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사는 교회에는 이러한 문제가 없었습니다. 믿음대로 살아가는 본이 되는 자들이 살고 있는 곳에는 다른 복음이 발붙일 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이 다른 복음은 雨後竹筍처럼 일어나서 교회를 계속해서 상처 내고 복음을 변질시킨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복음이 왕성합니다. 교회마다 성경공부 프로그램이 한 두 가지 없는 교회가 없을 정도입니다. 교인마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성경을 배우려는 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복음이 왕성한데 정비례하여 이단 사이비가 너무나도 많다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책임이 아니고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말씀을 배우려고 했지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노력이 없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복음적인 삶이 없는 한 이러한 일은 계속해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초대교회에서는 교인들이 복음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삶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기사는 얼마든지 읽을 수 있습니다. 평안도에 한 일제의 관리가 군수로 임명이 되자 그 관리를 그 군 관내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일하기가 곤란하다고 임지를 가기를 거부했다는 이야기가 신문에 실린 적이 있습니다. 그 군의 예수 믿는 사람들은 불과 몇 천명에 불과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한국에는 교인들이 1,200만 명이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회는 이제 달라져도 완전히 달라졌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탈세나 탈법적인 일을 해도 지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의분을 느끼고 그것에 대항하여 싸우고자 하는 사람도 적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해서 탈세를 하는 사람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불법을 저지르면서도 도리어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장로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국세청에서 일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세금을 적게 내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정당하게 내야 할 세금을 적게 내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탈세를 했다고 말하지 않고 절세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바다는 염분 농도가 2.8%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2.8% 때문에 바다는 결코 썩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한국에는 인구의 1/4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면 자랑하고 있습니다. 1/4이라면 25%입니다. 2.8%만 있어도 바다가 썩지 않는데 인구의 25%가 기독교인이라면 이 나라는 뒤집어져도 몇 번은 뒤집어 졌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상상할 수 없는 죄악들이 버젓이 등장하여 성행하고 있는가 말입니다.

이는 바로 사람을 즐겁게 하려는 풍조가 만연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배우는데에만 열심을 내었지 복음을 배운 그대로 살고자 노력하면서 열심을 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지금 누구를 기쁘게 하고 있습니까? 내 자신의 만족만을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의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있습니까? 야고보서 4:17에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들이 알고 배운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처음부터 많은 것을 행하지 말고 작은 것부터 실천하고 하루에 하나씩이라도 실천하는 사람이 된다면 분명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큰 변화가 올 것입니다. 그렇데 되면 우리들의 삶에 커다란 변화가 오고 우리 사회에 대변혁이 오게 될 것입니다. 이 변화의 주인공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들이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제는 우리의 삶이 복음을 배운 그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배운대로 삶에서 실천하지 않으면 그냥 기독교는 종교일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를 종교화시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엄청나게 큰 죄악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그대로 행동하는 용기를 가지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원하십니다.

3) 믿는 이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자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일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영원한 지옥의 멸망에서 구원을 얻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제는 우리의 사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하는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장로교 신앙고백 중에 중요한 소요리 문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1문에서 '인간의 제일되는 본분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입니다. 우리의 삶은 정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20:17이하에서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고' 자신이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한 것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19∼21절)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않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라'고 말하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형제나 자매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을 보고도 그것을 제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 속담에 고름은 절대로 살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플지라도 도려낼 것은 도려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에 많은 사람들이 좋은게 좋다고 그냥 넘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악은 가급적이면 도려내어서 없애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 못지 않게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당신 자신의 공의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믿는 자의 표시는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칼빈이 말하는 Coram Deo의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역주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현장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금도 보고 계신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산다고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판단의 기준은 정말 이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의 평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우리의 삶은 변화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모두가 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인가 아닌가를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분명히 자신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종'이었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에게 좋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종'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이 과연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인간의 생각과 이성에 맞는 것들입니다. 진정한 복음은 하나님의 명령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는 질문을 끊임없이 행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좀더 풍성한 은혜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는 우리 모두의 삶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자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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