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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의 선교간증 (갈 0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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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유'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께 계시로 받은 이 은혜의 복음 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다고 외쳤고, 이 위대한 선언은 많은 거짓 교사들과 율법주의자들의 대적이 될만한 말씀이었습니다. 루터나 칼빈과 같이 근대에 와서 신약성경이 기록되어 있고, 그리스도가 구주라고 하는 이신칭의의 사상도 교회에서 말하고 있을 때에도 그리스도 안의 참된 자유를 선포하는 종교개혁은 생명을 위협받는 어려운 싸움이었는데, 바울 때에 이런 새로운 깨달음은 전통적인 율법주의자들의 커다란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위대하고 파격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에 우리들의 상황에서 적용도 잘 시켜야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이 성경이 기록되었을 때의 형편과 사정은 어떠했을까 하는 것을 성경배경연구를 통해 아는 것이 더 성경을 바로 깨닫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한 구원과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유에 대한 선언을 했을 때에, 이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은 실은 세상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오늘도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 것은 세상에서보다 교회 안에 있으나, 인본주의적인 거짓된 교훈을 하는 자들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는 일이 더 많습니다.

바울을 대적하는 이들의 입장에서보면 어떻게 해야 바울의 교훈을 무너뜨릴 수가 있겠습니까? 바울은 이미 천사가 전한다 할지라도 이 복음 외에는 저주를 받으리라고 선포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전한 복음을 무너뜨릴 목적으로 바울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도로 세운 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근본적으로 흔들어버리려면 이 방법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사단은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공격합니다. 설교자를 무너뜨리지 않고는 말씀을 무너뜨릴 수 없음을 마귀는 너무도 잘 압니다.이것이 교인들이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해야할 가장 큰 이유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인데, 말씀을 받지 못하면, 설교자를 신임하지 못하여 그 들게되는 말씀의 권위 또한 의심하게 되면 그 어떤 사람도 제대로 믿음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이 사단의 미혹을 받은 그 교회는 많은 무리들은 모였다고 할지라도 이미 교회의 역할을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를 비난하는 일을 아주 삼가야합니다. 혹 내가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경우라도 그 설교자를 비난하여 설교자와 교인간에 거리가 멀어지게 하면 그 다음은 뻔한 것입니다. 이를 성령 훼방죄라 했습니다. 이 죄는 무서운 보응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고린도후서의 말씀과 비슷하게 바울의 자신의 간증이 나오고 있고, 자기의 사도권에 대한 주장이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말씀을 바로 읽어야합니다. 이는 바울 자신의 변명이나 합리화가 아닙니다. 설교자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자들에게서 설교할 수 없습니다. 먼저 인격적으로 신임과 존경을 받아야하는 것은 설교자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권위를 세워서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갈라디아 교회에 전한 복음 멧세지의 신적인 근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자신의 사도권에 대하여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11-17까지의 사도바울의 자신의 간증을 들어봅시다. 교회 안에서 프로그램으로 신앙간증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설교가 그러하듯이 간증의 포인트도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간증을 하다보면 슬그머니 자기 자랑이나 자기의 선행이 나오게 되는데 이런 체험이 나와서 되는 것이 아니라, 간증은 그리스도의 만나기 전에 자신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또 내가 그리스도를 어떻게 만났는가, 그리고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내 삶 속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하는 세 가지가 자기 신앙간증이 되어야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자신에 대하여 말합니다.

갈 1: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갈 1: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도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들보다 선배들보다도 더 열심히 유대교를 믿었던 율법주의자였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의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도 더욱 열심이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바울 되기 전 사울일 때의 그 율법주의의 열심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앞서는 열심이 되었고, 또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죽이는 잔해하는 일에 앞장섰던 과거의 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유대교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고, 그 유대교 율법주의에 열심 충성한 것이 결국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데에 앞장서는 자가 되었을 뿐이라는 고백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의 반대를 받은 바울이 자신도 이전에 유대교였고, 율법주의자였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과 율법은 이렇게 상대되는 것이 아닌데, 율법주의자가 되면 복음과는 원수가 되고, 복음을 믿는 교회와 그리스도인과 원수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아직 그리스도로 인하여 은혜로 구원 얻은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외식된 걸음을 걷고 있지는 않습니까? 비록 구원은 받았다 할지라도 율법주의적인 공로주의 적인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항상 자기 자랑이요, 교만함이 있고, 남 정죄하는 일에 빠릅니다. 이런 요소가 내게는 없습니까? 우리가 전적 은혜로 구원 받았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그냥 두시지 않았습니다.
이 하나님을 바울은 성경 다른 곳에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바울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또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구원의 은혜와 사도로 부르심에 대하여 바울은 말하기를 갈 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 로 나를 부르신 이가 바울을 구원하시는 계획을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나기도 전에, 아니 창세 전에 영원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뿐만아니라 은혜로 나를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계획은 영원전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이루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를 우리를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이 부르심, 소명에 대하여는 두가지로 말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과 죄악과 사망에 종된 데서 부르신 구원을 말할 때도 이 소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지금 사도바울은 구원의 소명 뿐 아니라, 자신을 이방의 사도로 부르셨다고 하는 이차소명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을 은혜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된 데서 부르셔서 자유와 해방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 유명한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19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시 부르셔서 당신의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신 것입니다. 만민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받는 일에 쓰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를 이스라엘은 거절해서 버린 바 되었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세상에서 부르셔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부르심은 만인제사장의 의미로 자신을 부르셨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사도로 부르셨다는 소명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일을 하려하는 사람이라면 이 특별한 소명을 가져야합니다. 소명, 하나님께서 불러서 특별한 일에 쓰기겠다는 소명이 없이 제가 좋아서 하나님의 일에 뛰어드는 일들로 복음의 가치는 떨어지고 교회는 황폐해져 갑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지 않았음에도 제 스스로 뜻을 정해서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라는 넓은 의미에서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누구라도 이 일을 해야합니다. 그러나 아무라도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사명이 없이 이 일은 더욱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이 있어야하면서 자신이 생명을 걸고 이 복음을 전하려는 각오와 결심이 있어야 감당하는 너무도 힘들고 어렵고 거룩한 길입니다.

사도바울의 받은 사명은 무엇입니까?
갈 1: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에 전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았지만 특별한 소명에 대하여는 분명한 목적이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여러 모양으로 헌신할 수 있습니다. 평신도로 우리들의 모든 삶으로도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임사역은 다릅니다. 목회자,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된다는 것은 의미가 다릅니다. 다르기 때문에 소명이 있고, 사명을 감당하려고 생명을 걸고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사도로서의 소명과 사명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지, 평신도가 가질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소명과 사명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회심과 함께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도 바울이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고 간단하게 복음을 배우고 난 뒤에 즉시로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바울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할 사역자들은 얼마나 많은 경건의 훈련과 신학적인 교육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갈 1: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갈 1: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새

바울이 사도들을 만나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사도바울은 아라비아에서 3년을 있었다고 봅니다. 거기서 무엇을 했습니까? 아라비아 사막에서 그가 알고 있는 구약의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찾았을 것입니다. 3년을 누구에게 배우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로 교육을 받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율법에 대하여 잘 알았기 때문에 그 율법에서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메시아가 누구인가, 모든 계시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깨닫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갈 1: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갈 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아는 일에 힘을 써야합니다. 더욱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역자들이 성경을 모르고야 감정과 제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바울이 바을되어서 그 놀라운 역사를 한 것을 다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에 수동적으로 기계 같이 역사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도로 세움을 이미 받았고, 계시를 받기까지 했으니 제가 힘쓴 것이 있겠는가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훈련시키시고, 세례요한을 훈련시키셔서 그를 때를 따라 쓰신 것입니다. 많은 어부들을 주께서 부르셨지만, 그들이 성경도 모르고 아무런 훈련이 없던 사람이라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유대인들 모두는 율법교육과 경건훈련을 다 마친 사람들입니다.
훈련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쓰시지 않습니다. 평신도 사울은 즉시로 복음을 전할 수도 있지만, 바울이 되기까지는 3년이라는 긴 세월을 하나님께서 훈련시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선교사로 나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하게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갈 1: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갈 1: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새
갈 1: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회심하고 다메섹에서, 아라비아로, 다시 다메섹으로 또 예루살렘으로 수리아로 길리기아로 갔습니다.

아라비아에서 훈련받은 후에 간 다메섹은 자기가 복음을 제일 먼저 전하던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의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수리아는 안디옥으로 바울 선교지의 중심이 된 곳입니다. 그 다음에 간 곳이 길리기아 지방입니다. 길리기아 지방의 수도는 다소입니다. 여기는 바울의 고향입니다.
바울은 고향에서 7년을 머물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여기서 일하고 있을 때에 안디옥에서 바나바가 같이 일하자고 요청이 와서 안디옥에서 일했습니다. 그곳에서 1년을 일하면서 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모든 교인들이 그 때에 세상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듣기까지 합니다.
그후에 성령께서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라고 하시고, 이들을 안디옥교회가 이방인의 선교사로 파송합니다.

바울은 어디에 가서 일했습니까?
그는 부르심을 받을 때부터 이방인의 선교사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의 선교사로 만들어지기까지 하나님께서 불러 쓰시기 까지는 긴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멀리 나가서 선교하려는 열심히 있습니까? 여기에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까? 훈련되어야합니다. 때를 기다리면서 먼저 고향에서 복음이 전해져야합니다. 먼저 부모 형제에게 복음을 전했습니까? 이웃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까? 자신을 불러준 교회를 섬기는 일을 해야합니다. 정말 그가 평신도로 섬기던 교회에서 그로 인하여 부흥이 일어나는 것은 또하나의 훈련입니다.
이 일 후에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따로 세워라는 지시를 받고 파송합니다.
이러므로 교회의 후원과 기도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바울 선교의 원리아닙니까?
오늘도 같은 성령께서 이와 같이 역사하십니다.
바울은 자신을 영원 전에 택정하신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 이방인의 자기를 부르시고 또 그리스도의 계시를 깨닫게 하신 것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본문의 말씀으로 자신의 사도됨이나 자신이 전하는 복음에 대한 변명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사도로 세우셨음과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복음 전파자가 그 받은 사명을 감당 못합니다. 이 확신이 자기를 반대하는 자들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1.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 받은 복음 진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2.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부르셨다는 소명의식이 있었습니다.
3.또한 그 아들을 이방인에게 전하라고 하시는 자신의 생명 다하여 충성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4. 견디기 어려움 사막에서 경건을 훈련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복음을 확인시키시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 교육받았습니다. 훈련되어져야합니다.
5. 또 이방인의 선교사로 나가기 전에 먼저 자신 주변에 자기와 상관된 부모형제 고향 친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6. 그가 아직은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지만 안디옥교회에서 평신도로서 바나바와 함께 교회를 세우는 일을 잘 감당했을 때에 성령께서 선교사로 세우셨습니다.
7. 안디옥교회는 끝까지 바울의 선교를 지원하고 기도했습니다.바울선교가 성공적인 것은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이루신 것이지만, 성령께서 바울을 쓰셔서 효과적으로 이를 이루신 것입니다.
바울을 통해서 세계만방에 그리스도의 복음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말씀이 성경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떠나서 다른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다 선교사로 나가야할 복음에 빚진 우리들에게 다 필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복음 전파자로 세움을 입을 자들에게 더욱 요구되는 말씀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전파자를 위해서 후원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이제 파송 선교사를 두게 된 것은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모릅니다. 본인도 감격해 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지금 훈련되고 교회를 섬기려합니다. 이지순 간사님은 앞으로 얼마동안 신일교회를 섬기다가 터키로 파송될 것입니다. 지금은 예비선교사입니다. 바울이 마치 아라비아 사막에서 훈련되고, 안디옥교회에서 1년을 사역했던 것 같은 입장일 것입니다. 오늘 저녁 설교가 마치 이지순 선교사 파송예배를 드리는 것 같은데 제가 평소에 지순 간사에게 했던 말씀이 오늘 본문에서 다 나타나지 않습니까? 성령께서는 또한 이 본문을 가지고 우리 교회에게 필요한 말씀으로 주신 것입니다.

선교적인 사명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사로 나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헌신해야합니다. 또한 이 복음 전하는 일의 소중함을 깨달아서 기도하며 적극적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우리한국교회는 세계교회에 이 사랑의 빚이 있습니다. 빚진 사람은 항상 마음에 눌리는 것이 있습니다. 빚진 것은 갚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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