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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 은사 (고전 14: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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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선물과 성령의 은사들, 그리고 성령의 은혜를 언급한 바울은 이제 교히의 공예배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다스리심을 설명함으로써 본 논제의 결론을 내립니다. 고린도 교회의 몇몇 성도들은 은사 활용에 있어 절제를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그들에게 교회의 공예배를 주도하는 근본 원리 세 가지를 상기시켜 주어야 했습니다.

그 내용은
1. 교회는 서로 덕을 세워 주어야 한다(14:1-5, 26하반절)
2. 진리는 듣는 사람에게 이해되어야 한다(14:6-25)
3. 교회에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14:26-40)

1. 교회는 서로 덕을 세워 주어야 한다(성령의 은사의 유익)
“덕을 세워 준다”는 것은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 중 하나인데, 이 말은 원래 건축학에서 사용되는 용어였습니다. &985172;세우다&985173;(to edify)라는 말은 “건물을 짓다”(to build up)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개념은 교회를 몸에 비유하는 것과도 잘 부합됩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65378;바디 빌딩&65379;(body building)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개념에는 중복적인 이미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전(殿)”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덕을 세운다“는 표현을 쓴 것은 매우 지혜로운 생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저지르고 있었던 잘못은 교회의 덕을 소홀히 하고 자기 개인의 덕을 세우기에 열중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덕은 세우려고 했지만, 형제의 덕을 세우려고 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다른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그런 태도를 가진 신자 본인들에게도 해를 끼칩니다. 우리가 같은 몸에 속한 동일한 지체들이라면, 다른 지체와 어떤 관련을 맺는가는 궁극적으로 우리들 전체에게 개인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지 못합니다”(12:21). 만일 몸의 한 지체가 약해지거나 병들면, 그 영향은 곧 다른 지체 모두에게 퍼집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예언을 무시하고 방언을 잘못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해 냈습니다. 신약의 예언자들을 미래의 일로 예고하는 사람들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그 이상의 일을 했습니다. 선지자들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메시지를 받아 교회에 선포했습니다. 그 일은 대개 방언의 은사를 통해서 이루어졌지만 항상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또한 예언은 오늘날의 설교와 동일한 것도 아입니다.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성경을 연구해서 메시지를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설교자도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영감(靈感)을 받았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예언과 방언의 두 은사를 비교함으로써 예언 은사가 방언 은사보다 우월한 가치를 지녔음을 설명합니다.

첫째, 예언은 사람에게 말하나 방언은 하나님께 말함(14:1-3)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려면, 최소한 제일 좋은 은사를 사모하라는 것이 바울의 권고였습니다. 예언의 은사는 최고의 은사입니다.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예언은 듣는 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며, 이 위로와 용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2절에 “알아듣는 자가 없다”는 말에는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교회가 시작될 때부터 방언은 세상에 알려져 있는 언어였으며 듣는 자들은 그 뜻을 이해했습니다(행2:4. 6, 8, 11). 혹 그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전혀 알지 못하던 방언도 있을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방언이 세상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말은 아니었습니다(14:10-11, 21).

또한 방언이 잃어버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사용되었던 말이라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사실은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바울은 교회 내에서 방언을 지나치게 사용함으로써 믿지 않는 자들이 성도들을 미쳤다고 생각할까 염려했습니다(14:23). 오순절날 성도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찬양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모든 사람이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아람어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신자는 찬양과 경배로 하나님께 말합니다. 그러나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와 함께 나누며, 그것을 듣는 자에게 도움을 줍니다.

둘째,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나 방언은 말하는 자만의 덕을 세웁니다(14:4-5).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에게 있어서의 방언의 가치를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바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5절).
통역되지 않은 방언의 메시지는 교회에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발휘할 때에는 반드시 통역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14:28).
우리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있는 것과 같은 성경을 가지고 예배에 참석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 당시 신약 성경은 아직 형성되는 중에 있었고 구약 성경 사본의 두루마리는 너무 비쌌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성도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직접 말씀하셨으며 그 메시지는 종종 방언으로 주어졌습니다. 지식, 예언, 방언의 이 세 은사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하기 위해 병행되어서 사용되었습니다(13:1-2, 8-11).

바울은 교회 내에서 교리가 가르쳐져야 할 필요성을 매우 중요하게 강조합니다. 우리들의 예배는 진리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는 단지 미신(迷信的)인 감정 주의가 될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믿는 바가 무엇이며 왜 그것을 믿는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진리를 교회에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교회의 덕을 세웁니다. 통역이 없이 방언 하는 자는, 자신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만 교회의 덕을 세우지는 못합니다.
사역을 하면서 나는 여러 교회를 섬겼으며 여러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성경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찬송은 어떤 경우에는 덕이 되지 않지만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강력한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모든 사역 자들이 자신만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여 일할 때면, 하나님께서 늘 축복해 주시고 도아 주셨습니다. 아무리 신령하게 보이는 사역이라도 덕을 세우지 못하는 사역은 흩어져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하며 그것을 각 개인의 삶 속에 적용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2. 진리는 듣는 사람에게 이해되어야 한다(14:6-25)
본 단락에서 바울은 “이해”(understanding)라는 말을 여덟 번이나 사용하였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지식을 전해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 지식이 성도들에게 어떤 유익이 되려면, 성도들은 그 지식을 받아 들여야(receive)합니다. 옥토에 뿌려진(received) 씨가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마13:23). 덕을 세우기 원하는 신자라면,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살전2:13).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모두가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설교를 들은 회중 가운데는 설교에 대한 비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판의 내용을 들으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가지고 합니다. 설교의 핵심을 잘 이해하고 잘 들었다면 그들이 하는 비판은 결코 비판의 내용이 아닌 것을 핵심을 듣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983729; 예증(14:6-11)
성숙한 영적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악기, 전쟁 나팔, 일상 대화라는 세 가지 실례(實例)를 사용합니다.
악기의 음이 분명치 못하면 아무도 음악이 연주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연주자가 아무리 바르게 연주하더라도 악기에 결함이 있거나 조율이 잘못되어 있으면, 연주자가 제대로 연주한다 해도 듣는 사람은 불쾌감만을 느낍니다.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도 리드(read)가 제대로 작동되게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점검을 해야 합니다.
나팔 소리가 후퇴를 알리는 것인지 공격을 알리는 것인지 분명치 않으면 병사들은 당황합니다. 병사의 반쯤은 공격을 하고 나머지 반은 후퇴를 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나팔 소리는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분명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일상적인 대화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제주도 말이 다르고 경상도 사투리가 다르고 전라도 구수한 맛이 다릅니다. 때로는 어떤 경우 표준말로 재차 확인해야 할 것들도 일상생활에 젖어 아무 거리낌없이 사용합니다.

10절을 통해서 우리는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방언이 하늘의 용어가 아니라 이미 통용되고 있는 지상의 언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각 언어는 서로 다르며 그 각 언어마다 고유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이 아무리 성의를 대해 말해도 듣는 사람이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의사 소통은 될 수가 없습니다. 헬라인들은 사회적으로나 종족적 서열상 가장 천한 사람들을 야만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헬라인이 아닌 사람은 모두 야만인으로 간주했습니다.
음악가, 나팔수 및 대화자들은 듣는 사람들에게 의미를 주는 방식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 한, 그들을 이해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이해의 원리를 설명하고 나서 바울은 이 원리를 상이한 새 사람에게 적용합니다.

&983730;. 적용(14:12-25)
첫째로, 바울은 이 원리를 화자(話者) 자신에게 적용시킵니다(12-25절).
여기서 바울은 어떤 종류의 영적 은사를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것보다는 교회의 유익을 위하는 것이 더 훌륭한 일임을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방언으로 말하는 신자는 그의 영(속 사람)은 그 체험을 함께 나눌지 모르나 그의 마음(mind)은 그 체험과 무관합니다. “영으로”(in the spirit) 기도하거나 찬양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여기에 마음의 기도와 찬양 그리고 자기가 기도하거나 찬양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포함되면 더욱 좋습니다(14-15절에 언급된 “영”이라는 말은 성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2장 11절에서처럼 “속 사람”을 의미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가 덕을 세우기를 원한다면, 그는 자기가 말하는 것의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는 그 메시지가 통역될 것을 하나님께 구하여야 합니다. 바울은 방언을 말할 때에 통역 자가 있어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자신이 통역의 은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27-28절). 물론 바울이 이러한 논의는 역시 방언에 대한 예언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언은 통역이 필요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바울은 이 원리를 교회 내의 다른 성도들에게 적용시킵니다.(16-20절).
성도들은 메시지를 듣고 응답해야 한다고 바울은 주장합니다. 그러나 메시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 어떻게 응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란 아마 초신 자나 아니면 교회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탐구자를 뜻하는 말일 것입니다. 어쨌든 그는 자기가 듣는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덕을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 역시 우선 순위의 문제였습니다. 바울은 방언 사용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방언을 올바른 관점에서 사용하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문제는 사용되는 말의 양(量)이 아니라 대화의 질(質)에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죄악에는 어린아이가 되고, 영적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20절/3:1-4/13:11-13).

어떤 사람들은 방언을 말하는 것이 영적 성숙의 한 증거라고 간주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방언의 은사가 신령치 못하고 비 성숙한 태도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줍니다.

셋째로, 바울은 이 원리를 우연히 교회의 예배에 참석한 불신자들에게 적용시킵니다(21-25절).
여기서 바울은 방언보다 우월한 예언의 은사를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통역되지 않은 방언은 불신자들의 마음에 죄의 깨달음을 주지 못합니다. 사실 불신자들은 회중들이 모두 미쳤다고 생각하면서, 방언의 메시지가 통역되기도 전에 교회를 나갈지도 모릅니다. 오순절 당시나 초대 교회의 모임에서나 방언은 복음 전도를 위해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방언에는 특별히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한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방언은 불신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표(sign)였습니다. 바울은 이사여서 28장 11-12절의 내용을 인용하는데, 앗수르인 들이 침략했을 때 유대인들은 그들의 “야만적”언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985172;방언&985173;이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증거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시 백성에게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분명한 언어로 말씀하시려고 했으나,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범죄로 그 일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자(使者)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언어로 이야기하게 하셨지만, 그래도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낯선 방언으로 말씀하셔야 했고, 그것은 심판을 의미했습니다.

유대 민족은 항상 표적을 귀했습니다(마12:38/ 고전1:22). 오순절 날 사도들이 방언으로 말했다는 사실은 오순절 절기를 축하하고 있던 불신 유대인들에게 하나의 표(sign)이었습니다. 방언의 이적(異蹟)은 유대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나 그들의 죄를 깨우쳐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로 하여금 죄를 깨우치게 하고 회심하게 하는 데에는 베드로의 설교(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아람어로 하는)가 필요했습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데 우선 주력하여 교회를 강건하게 하고 성장하게 할 것을 우리에게 권명합니다. &65378;이해의 원리&65379;는 우리가 함께 나누는 진리를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킵니다. 영적 은사를 개인적으만 사용하면 그 당사자의 덕은 세워 줄지 모르나, 교회의 덕을 세우지는 못합니다. 바울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를 힘쓰라고 우리에게 훈계합니다(14:12).

3. 교회에는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14:26-40)
본문에서는 두 가지 진술이 병행되는데 그것은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26절)는 것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40절)는 것입니다. 건물을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본 설계도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일이 뒤죽박죽이 됩니다.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특별한 문제는 공예배시의 무질서였습니다(11:17-23). 그 이유를 밝혀 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형제들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영적 은사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과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예배에 기여하는 바가 다른 형제의 기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대부분 형제가 그 맡은 직분을 다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그의 예배를 중간에서 가로막을 것입니다. 게다가 자유분방한 여자들이 일으키는 문제가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면 왜 고린도 교회가 세상적 혼란을 겪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26절을 통해서 우리는 초대 교회 예배의 인상적인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각 지체들은 주님께서 지시하는 대로 예배에 참석하도록 초대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편을 노래하기 원했을 것이고(엡5:19/골3:16).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가르치려 했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들은 방언으로 계시를 말하고 그것을 통역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무시하고서는 결코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없었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들이 가장 많은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을 본보기로 제시하면서 교회가 공예배시에 따라야 할 몇 가지 지침을 줍니다.

첫째, 방언하고 통역하고 그 메시지를 분별하는 일은 질서 있는 태도로 행해져야 합니다(27-33).
한 집회에서 말하는 자는 셋 이상 있어서는 안 되고, 각 사람의 말은 차서(次序)를 따라 통역되고 분별되어야 합니다.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방언을 하는 자는 잠잠히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훈계한 말씀이 이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살전5: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살전5:20) 예언을 멸시치 말고 (살전5: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그런데 예언은 왜 분별되어야 할까? 그것은 말하는 자가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파하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예언하는 자는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다고 상상할 수가 있다. 또한 사단이 가짜 예언의 메시지를 줄 수도 있다(고후11:13-14). 따라서 예언을 듣는 자들은 구약 성경, 사도들의 전승, 성령의 인도 등을 통해 그 메시지의 진위(眞僞)를 분별해야 한다(12:10의 “영들 분별함”)

어떤 사람이 말하는 도중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계시를 주시면, 먼저 말하던 사람은 하나님께서 새로이 주는 계기가 전해지도록 침묵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메시지라면 거기에는 경쟁이나 모순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저마다 메시지를 꾸며서 전파하면 혼동과 모순이 생긴다. 성령께서 역사 하실 때, 다양한 은사를 가진 사역 자들은 자신을 절제하게 될 것입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 중 하나입니다. (고전14: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스스로 자제한다는 것은 그 집회에 성령께서 정말 역사하고 계시다는 한 증거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 중의 한 가지는 혼란에서 질서를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혼란은 사단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은 혼란을 만드시지 않습니다(약3:13-18).

그런데 완성된 성경은 우리에게 있지만, 예언자들이 없는 오늘날 교회에서 우리는 바울의 교훈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우선 우리는 우리가 듣는 모든 메시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성령께서 인도하실 것을 구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와 대.소요리문답서를 통해서 신앙의 12신조를 채택한 것 중 1조는 “신.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 의 법칙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거짓 교사가 있으니 분별해야 하며, 또 참된 교사라 할지라도 따라서는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각각 듣는 메시지를 분별해서 그 분별된 메시지를 자기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특히 방송과 테잎을 통해서 나오는 메시지 가운데는 참된 교사일지라도 분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현대의 공예배는 초대 교회 때보다 더 조직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예배의 질서에 관해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집회에서는 서로를 존중하고 질서를 유지해야 합니다.

둘째,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합니다(34-35절)
앞서 바울은 여자가 기도하는 것과 예배하는 것을 허용했었습니다(11:5). 따라서 여기서의 교훈은 예언을 분별하는 일과 직접적으로 연관됩니다. 초대 교회 당시 교리의 순수성을 지킬 책임은 주로 남자에게 부과되었으며, 특별히 장로(목사)들에게 부과되었습니다(딤전2:11-12)

여자들에게 대해 이런 금지 사항이 있다는 것은 일부 여자들이 신앙에 대해 질문을 하고 논쟁까지 벌임으로써 문제를 야기하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바울은 결혼한 여자들은 남편에게 복속되어 있으므로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어 보라는 훈계를 상기시킵니다.
여기서 미혼녀들은 교회의 장로들이나 가족 중의 남자들에게 물어 볼 수 있음을 추측할 수 있는데 현대에는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는 남편이 아내에게 신앙에 대한 질문을 하고 아내가 남편에게 답변해 줍니다. 여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열심히 배우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배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는 “새로운 계시”를 경계해야 합니다(36-40)
(사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초대 교회는 구약 성경과 사도들이 구전(口傳)해 준 유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딤후2:2). 이 두 가지가 모든 계시의 진위 여부를 시험할 수 있는 기준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완성된 정경과 수백 년 간의 교회 역사를 통해 축적되어 온 교훈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분별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역사적 복음주의의 신조(信條)들은 비록 영감된 것은 아니지만, 정통 신학을 구체화시켜 우리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는 바울의 도움이 필요 없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고도 놀라운 계시를 받았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르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고린도 교인들의 자세는 위험스러운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사단의 가르침을 포함한 거짓 계시를 좇는 첫 번째 단계에 해당합니다(딤전4:1이하).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이 참 선지자된 증거의 하나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편지에 쓰고 있는 말이 진짜 영감 받은 성경이며 또 “주의 명령”(37절) 이라고 주장했습니다.

38절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무지한 채로 남아 있길 바울이 원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손수 편지를 써서 그들의 의문에 답변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자들은 자동적으로 교제를 파괴하는 것입니다(요일2:18-19).

(요일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요일2:1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39-40절에서 바울은 14장의 주요 내용을 요약합니다. 예언은 방언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방언의 은사를 옳게 사용하는 것을 금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은사는 전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질서 있는 방식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공예배는 적당한 방식, 즉 아름다움, 질서, 영적 동기와 내용이 있는 가운데서 드려져야 합니다.

본 장(章)을 마치기 전에, 바울이 방언 은사에 관해 말한 것을 다시 한번 요약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기가 전에는 알지 못했던, 그러나 세상에는 알려져 있는 언어로 말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입니다. 이 방언 은사의 목적은 죄인을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를 성숙시키는 것입니다. 모든 신자가 다 방언의 은사를 받는 것은 아니고, 또한 방언은 신령함의 증거도 아니며, 성령 세례의 결과도 아닙니다.

한 집회에서는 오직 세 사람만이 방언을 말할 수 있는데, 그들은 방언을 말하되 차서(次序)를 따라 통역과 함께해야 합니다.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방언 하는 자는 잠잠히 있어야 합니다. 예언이 우월한 은사이긴, 하나, 성경 말씀을 좇아서 사용되기만 한다면 방언도 무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터를 닦는 작업이 끝났을 때, 지식, 방언, 예언의 은사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고전13: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만 한다면 오늘날에도 방언의 은사를 주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행하는 방언 은사가 다 신적(神的) 활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현대의 모든 방언 은사의 실례(實例)들이 모두 사단의 사주에 의한 것이 아닐지라도 방언 하는 사람 스스로 행하는 것이 많습니다.

성도들이 방언을 교제나 신령함을 시험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그러한 자세 속에서는 성령께서 역사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선으로 삼아 주력해야 할 것은 죄인을 구원하고, 또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방언이라 할지라도 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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