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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 안의 인간관계 (딤전 0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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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인간관계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 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 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기뻐하실 만한 인간관계를 맺어 갈 수 있는가 하는데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어떤 선교 단체와는 다릅니다. 가령 대학생 선교회(C.C.C)라고 하면 대학생들이 전도하고 성경 공부를 하기 위해서 만든 선 교 단체로서 교회 밖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입니다. 이것을 소위 para church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입니다. 이런 선교 단체의 구성원들은 주로 같은 색깔의 모입니다.

가령 대 학생들의 모임, 같은 취미로 가진 사람들의 모임,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 같은 직장 에서 일보는 사람들의 모임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 에 쉽게 일체감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선교 단체와는 다릅니다. 교회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양한 계층으로 형성된 하나의 커다란 가족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선교 단체의 조직하고는 달리 일체 감을 형성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다양성을 가지고 색깔로 말해도 여러가지 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형성하 는 하나의 공동체라고 말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다양성 안에서 일치감을 찾 아가는 것이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가정은 핵가족화 되어가고 산업은 자동화, 기계화 되어 가고 있어서 이런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외로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어떻게 하면 가족적인 일체감을 이루어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오늘에 처한 사회의 중요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교회라고 하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가장 진한 색깔을 띨 수 있는 하나의 영적 인 가족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9절에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 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고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 인은 하나님의 권속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집안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가족적인 일체감을 형성하지 못할 때 그것은 어려운 인간관계의 결속일 수가 있지만 다양성을 극복하고 일체감을 형성할 때 그것은 지구상에서 가장 멋진 하나의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대로 디모데전서 3장 15절에 보면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라 고 말씀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요 교인은 하나님 의 집 식구들입니다. 물론 교회는 법적인 구속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대로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역동성을 가진 단체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그만큼 갈등의 소지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갈등을 극복하고 일체감을 이룰 때 각기 다른 사람이 모였다는 사실은 그 만큼 더 많이 인격적인 성숙의 기회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서로가 다른 경험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기회도 많 이 주어집니다. 따라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장 위대한 가족의 이상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도 그만큼 많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권속으로서 갈등의 소지도 많지만 그 만큼 위대한 일체 감을 형성하고 더 많은 인격적 성숙을 경험할 수 있는 무한한 기회도 가진 공동체인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에서는 바울 사도가 우리가 교회의 각 모임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섬겨야 하는가에 대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주신 말씀에서 성도들이 성도들 사이에서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노인들을 향해서 어떻게 할 것을 말씀합니다.
5장 1절을 말씀을 보세요.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하며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하라 고 했습니 다. 성경은 노인에 대한 자세를 어떻게 가르쳤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는 구체적으로 나누어서 늙은 남자에게 대해서는 아비에게 하듯하고 늙은 여 자에게 대해서는 어미에게 하듯하라고 말씀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노인들에게 그저 부모에 게 하듯하라는 교훈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조심해 보아야 할 것은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은 늙은이에 대해서는 꾸짖어야 할 일이 있어도 꾸짖지 말라고 하면서 권하라고 했습니다. 나이가 많아지게 되면 하나의 생리적인 현상으로써 자제력을 상실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노인이 되면 본의 아니게 실수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때 노인들의 실수를 용납할 수 있는 아량이 젊은 세대에게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꾸짖지 말라 고 한 말은 교육적인 낱말입니다. 책망이란 책망하는 것을 받아 소화시킬 수 있는 세대에게만 교육적인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노인들은 이미 생각하는 경향이 굳어져 버 렸기 때문에 그만큼 효과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책망해 봐도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오늘 주신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 대단히 현실적인 교훈을 담고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차라리 노인들은 향해서는 더욱 이해하고 용납하는 자세가 우리 젊은 세대에게 더 필요하다는 것을 성령께서 아셨기 때문에 이런 실제적인 교훈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믿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늙은 남자에게는 아비에게 하듯하고 늙은 여자를 행해서는 어미에게 하듯하 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부모님이 안 계신 젊은 세대에 있어서 교회는 부모님에 대한 섬김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학습의 현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70이 넘으신 분들을 젊은 선교회나 봉 사회에서 위로해 드리는 순서를 가집니다. 젊은 분들의 섬김을 받으시는 노인들이 얼마나 좋아 하고 고맙게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해야 하는 아름다운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교회에서 노인들을 잘 모시는 인간관계를 통해서 그 많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잘 섬기 고 경험할 수 있다면 교회는 훌륭한 인격적 성숙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결과를 갖 게 될 것입니다. 노인들을 향해서 부모님처럼 대해야 한다면

2. 젊은이를 향해서는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합니까? 여기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보면 젊은이도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로 나누어서 말씀했습 니다. 나이 많은 세대가 자기보다 나이 어린 세대를 대할 때 자식에게 하듯하라고 해야 논리적 일 터인데 여기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면 함부로 대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 니다. 1절과 2절에 보면 젊은 남자에게는 형제에게 하듯하고 젊은 여자에게는 자매에게 하듯하라고 합니다. 특별히 젊은 여자에게 대해서는 2절에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하라 우리는 사랑하는 친 자매를 이상으로 생각하고 불결한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매 에게 하듯 교회 안에서 젊은 여자를 대할 수 있다면 교회 안에서의 이성 교제가 얼마나 순결한 교제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성경에 왜 이런 단서가 붙었을까요? 교회라는 곳이 어떤 의미에서는 다른 어느 단체보다도 이성의 접촉이 빈번한 장소가 되기 때 문이라고 봅니다. 그 만큼 교회는 유혹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제가 어릴 때는 교회를 비꼬아 말하는 사람들은 연애당 이라고 말했습니다. 교회가 건전한 이성 교제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건전한 이성 교제가 아닐 때 사회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될 수 도 있고 사회의 도덕 질서에 흠집이 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만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실제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말은 교회 안에서 이성의 교제가 있어서 안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교회 안 에서 이성 교제를 할 때 특별히 남자가 젊은 자매와 교제할 때 깨끗함으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강조하기 위해서 깨끗함으로 란 말 앞에 일절 이라는 강조 부사를 사용했습니 다. 어떤 영어 성경에 보면 with avrolute purity'라는 번역했습니다. 절대적으로 아주 깨끗하 게 라는 뜻으로 쓴 말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강조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만 큼 단호하게 교회 안에서의 이성 교제로 인한 실수를 미리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절 깨끗함으로 특별히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은 이 편지를 받는 디모데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 당시 디모데는 젊은 사역자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아들 같은 마음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목회자로서 이런 유혹에서 스스로를 더욱 철저하게 지킬 것을 강조하고 있 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다 인간이요 인간은 누구나 다 약 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시험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지 않도록 서로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교역자와 교인 사이라고 해서 조심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예기 치 않았던 불상사가 생기게 됨을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역자 자신이 조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만 목회자와 성도가 아무도 없는데서 만나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됩니다. 무슨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공연한 오해는 받지 않는 것이 덕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덕이 되지 않을 때는 하지 않는 것이 덕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12절 말씀을 보세요.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 고 했습니다. 젊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연소함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인격 적인 존엄성을 지녀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 요소에 대해서 여러가지를 강조했습니다. 말에 대해 서 행실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그리고 마지막에 강조한 것이 정절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적인 순결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성경은 젊은이들을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 젊은 남자에게는 형제에게 하듯하고 젊은 여 자에게는 자매에게 하듯하라고 말합니다.

3. 오늘 주신 말씀에서 남편을 잃고 사는 여인에게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외롭고 아픈 삶을 사는 사람들이 바로 과부입니다. 이것은 고난 당한 사 람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의 관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혼자 지내는 부인들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쉬운 것은 아닙니 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참 과부를 경대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과부에도 참 과부가 있고 가짜 과부가 있다는 말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서 참 과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9절 말씀을 보세요. 과부로 명부에 오른 자는 나이 60이 덜 되지 아니하고 했습니다. 그러니 까 참 과부라고 하려면 60은 지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를 말합니 다. 그러니까 한 남편을 성실하게 섬기다가 그 남편을 잃은 과부를 말합니다. 참 과부는 도덕적 인 품성을 가진 분으로 하나님의 일에 헌신했던 분을 말합니다. 10절 말씀을 보세요.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여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 것이요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5절을 보면 참 과부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는 사 람입니다. 그리고 참 과부는 자기를 돌 볼 수 있는 친척이 달리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성경은 이렇게 참 과부에 대한 정의를 내리게 되었을까요? 초대 교회에서는 아마 참 과부에 대해서 그의 생활비를 책임졌던 것 같습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나 이 좋은 일을 잘못 남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이 교회가 도와주어야 할 참 과부를 구별해 야 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의 맥락을 보아서 참 과부는 단순히 교회의 지원을 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를 섬기는 일종의 사역자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역자로 세움을 받으려면 자력이 필요하 지 않습니까? 그래서 참 과부에 대한 정의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참 과부를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 3절을 보세요. 참 과부인 과부를 경 대하라 했습니다. 경대하라 는 말은 경제적으로 도와주라는 암시와 함께 존경하고 인정하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과부에 대한 경제적 원조의 일차적인 책임은 가족에게 있는 것을 말씀합니다. 4절을 보세요.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가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했고 16절에도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 고 교회로 짐지지 말게 하라 이는 참 과부를 도와 주게 하려 함이니라 교회는 달리 도움 받을 길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어야 하기 때문에 가족이나 친척이 있는 사람 들을 돕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성경의 교훈대로 하면 가족의 책임이 중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8절 말씀을 보세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하니라 했습니다. 부모에 대한 공경의 책임은 하나님께서 일차적으로 그 가족 그 자녀에게 주신 것입니다. 자손 이 없다면 문제가 다릅니다. 그러나 자손이 있을 때는 그들이 부모를 돌보고 공경하는 것이 창 조시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하나님의 기대요 하나님의 선언이요 하나님의 원칙인 것입니다. 사회 보장 제도가 잘 된 구라파나 미국, 캐나다의 경우를 보면 부모를 돌보는 책임이 자녀에 게서 국가로 옮겨지는 것은 오늘의 또 하나의 비극을 낳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6절에 교회로 짐지지 말게 하라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다른 일을 더 감당 할 수 있도록 과부를 돌보는 문제에 대해서는 자손들이 책임을 갖도록 하라는 것이 바울의 교훈 입니다. 그러면서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고 했습니다. 우선 나이를 따져 볼 때 그 당시 초대 교회가 정 한대로 60세 이상에 해당되는 소위 참 과부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삽 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재혼하라는 말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재혼의 길이 도무지 막힌 사람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때는 교회가 나 이 많은 과부를 돌보는 것처럼 교회가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일단 젊은 과부에게 재혼을 권하고 있습니다. 이런 교훈이 필요했던 까닭은 그 당시 나이 많은 과부가 교회에서 잘 대접받는 것을 보고서 아마 젊은 과부 가운데서도 그렇게 대접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젊은 과부들이 교회의 일을 전적으로 하는 사역자로서 적절하기 못했던 이유가 본문에 두 가지로 말씀되어져 있습니다.

11, 12절을 보세요.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음으로 심판을 받느니라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시집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일입 니까? 이 구절은 정확하게 번역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이 믿음 이란 단어와 비슷한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서약 혹은 맡기는 것 입니다. 영어로는 Commitment 라고 하는데 pistis 라는 헬 라어를 가장 적절하게 변역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Commitment 라는 말은 예수 믿기로 하는 서약이 아니라 과부된 사람 가운데서 나는 앞으로 절대로 재가하지 않겠 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나머지 내 평생을 드리겠습니다 라고 했던 그 첫 번째 서약을 말 하는 것입니다. 과부로서 그러한 서약을 하지 않은 사람이 시집가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일단 그러한 서약을 해 놓고 나중에 시집가 버리면 그 사람은 약속을 저버린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다른 성경 번역에 보면 오늘 주신 말씀 12절을 처음 믿음 이라고 번역한 데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과부로서 주님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 첫 번째 서약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처음 서약을 저버렸으므로 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가까운 번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본문의 내용을 쉽게 이해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11절을 다시 보세요.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 시집가고자 함이니 라고 말했습니 다. 젊은 여인은 언제나 성적인 유혹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가 만일에 유혹 앞에 굴복하면 그 것은 사역자로서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존경을 받는 참 과부로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과부로 영입되는 과정에서 젊은 과부들이 제외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13절 말씀을 보세요.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른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 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했습니다. 젊은 여인이 사역자로서 적합하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이 게으르고 망령된 폄론을 일 삼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다른 할 일은 없고 교회에서 그 생활을 책임지니까 그들에게는 시간이 많이 남아돕니다. 그래서 명목상으로는 심방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망령된 폄론을 하 게 되는 것입니다. 이 폄론 이란 말을 영어 번역에 보면 gorsipe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자들이 전혀 의미없 는 생산적이 못되는 수다를 떠는 것을 말합니다. 서로 다른 말을 해서 결국 싸움을 붙이게 되는 잡담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 교회의 여집사님들이 기여한 바도 크지만 피해를 입힌 것도 적지 않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4절에 어떤 권면을 합니까?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시집가서 정상적인 가정 생활을 하라는 권면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실제적으로 권면합니다. 얼마나 깊게 인간의 문제를 성찰하면서 꼭 필요하고도 적절한 교훈을 베풀고 있습 니까? 이 교훈을 넓은 의미에서 교회에서 활동적으로 봉사하는 여성 사역자들이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선한 일을 위해서 바빠야 합니다. 게으름이라는 것은 안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 도들은 게으름을 사단의 공작실이라 고 말했습니다.게으르다 보면 잘못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많은 향상이 되어서 수많은 여성들이 상상 못한 정도의 탈선행위 가 눈에 띄게 늘어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게으름 때문입니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틈이 없다 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바쁘게 일할 때 그것도 건강하게 자신을 드리고 헌신할 때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워지겠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은 결국은 세 마디입니다. 늙은이들에게는 부모에게 하듯하라고. 젊은 남자와 여자에게는 형제 자매에게 하듯하라고. 젊 은 과부는 자신의 남은 생애를 주님을 위해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남은 삶이 이렇게 보람되고 아름다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조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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