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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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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강제적으로 이끄시지 않는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믿게 하는 일을 쉽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거나 배척하는 것을 결정할 자유가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각 개인의 자유를 절대 침범하시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감옥에 있는 세례 요한이 자기를 의심하고 있다는 소식을 별 것 아닌 것처럼 받아들이셨다. 또 자신을 철저하게 배반했던 베드로를 세심하게 회복시켜 주셨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무척 놀란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용서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 제대로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의 태도는 관대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런 용서가 있었기에 죽었던 아들은 다시 생명을 되찾았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2).
나는 상당히 포괄적이고 당당한 그 말씀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거꾸로 보아도 역시 진리라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자유케 하지 못하는 진리는 참 진리가 아니다.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돌을 들어 그를 죽이려 했다. 그들은 그러한 종류의 자유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아쉽게도 교회 역시 그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가 자라난 교회 환경은 의심을 위한 공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냥 믿어라.” 어른들은 그렇게 말했다. 규정된 진리에서 벗어나 헤매는 사람은 성격 이상자로 몰려 징계를 피할 수 없었다.
나의 형은 1960년대에 신학교를 다녔었는데, ‘스피치 연구’ 라는 과목에서 ‘F’ 학점을 맞았다. 형은 고전 음악을 전공했고 록음악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록음악이 원래부터 나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록음악에 대한 논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형이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형은 탁월한 연설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형이 발표한 내용도 읽어보았다. 형이 ‘F’를 맞은 이유는 단 한 가지 밖에 없었다. 담당 교수와 결론이 달랐던 것이다. 게다가 그 교수는 하나님께서도 형의 결론에 동의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형은 학교를 떠났다. 더 나아가 믿음도 저버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형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고, 또한 탕자를 받아주는 넉넉한 공간을 가진 교회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나는 형과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 나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순례의 여정에서 은혜로 충만한 교회를 발견했다. 그 교회는 나의 의심마저 넉넉히 받아주는 안전한 공간을 가진 크리스천 공동체였다. 나는 복음서에서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모든 교리 중에서 필수 조건이다-에 대한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믿지 않았으면서도 여전히 그들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예수께서 도마의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신 것도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였다.

내게는 직장의 동료들과 교회의 친구들이 내 믿음이 흔들릴 때 언제라도 들어가 편히 쉴 수 있는 안식처를 제공해 주었다. 나는 교회에서 성경 공부를 가르치기 전에 이렇게 말할 때도 있다. “이 사실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저는 아직도 혼란스럽습니다.”

나는 외로운 회의자(懷疑者)로서 슬픔을 느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의심의 동료들>을 필요로 한다.

교회는 언젠가 완성될 믿음을 위한 안전하고 든든한 장소를 제공해야 한다. 우리는 완전한 형태의 믿음을 교회 문 앞에 제시해놓고 마치 그것이 입장권이라도 되는 것처럼 강제로 적용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의심’에 대해 공개적으로 글을 쓰고, 복음주의라는 교리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면, 청소년기에 그랬던 것처럼 반대에 부딪히거나 처벌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주장에 대해 화를 내고 비난하는 편지보다는 나의 의문에 공감하고 나에게 의심할 권리가 있음을 지지하는 편지들이 월등히 많았다. 그러자 점차 그러한 의심들은 나에게서 줄어들었고, 하나 둘 해결되어갔다. 두려움이 사라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존 던(John Donne)이 지은 성시(聖詩)에는 수수께끼 같은 구절이 들어있다.
“교회는 기도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다. 아주 흐린 불빛만 있으므로.”

이 구절은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문자적인 의미로 보면 촛불로만 밝혀진 성당의 내부를 언급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던이 교회 때문에 겪은 고초를 아는 독자라면, 더 깊은 내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비로움을 위한 공간을 남겨둔 교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 것은 억지로 드러내려 하지 않는 교회, 이런 교회는 예배하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을 만들어낸다. 결국 우리는 여유가 있어 하나님께 나아가기보다는, 부족하고 궁핍한 상태에서 그분을 의지하게 된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렇게 많은 교회들이 환하게 드러내려고 애를 쓰는가?
<필립 얀시,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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