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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줄을 잘못 선 사람들 (엡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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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을 잘못 선 사람들 (엡 2:1-3)

옛날에는 '군대는 줄'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개인의 능력이나 적성과는 상관없이 줄을 잘 서면 좋은 곳에 배치를 받을 수 있고, 줄을 잘못 서면 힘들고 고생스러운 곳에 배치받는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군대에서의 줄은 완전히 운을 의미했습니다. 어디에 줄을 서야 잘 선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아무 데나 섰다가 운 좋게 높은 사람의 아들과 같은 줄에 섰다면 같이 휩쓸려서 좋은 곳으로 가게 될 것이고, 운이 없으면 그 줄이 제일 힘든 곳으로 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어느 줄에 서야 좋을지 계산하고 판단해서 줄을 섭니다. 예를 들면 대통령 선거를 하는데, 어느 후보의 진영에 가담해야 할지를 잘 판단해야겠지요. 누가 당선될 것인지 계산을 해서 가능성이 있는 편에 가서 줄을 섭니다. 그렇게 올바른 판단을 해서 줄을 잘 선 사람은 논공행상의 포함되겠지만, 반대로 판단을 잘못해서 줄을 잘못 선 사람은 허무하겠지요. 지난 번 대통령 선거 때 중앙일보는 이회창 후보 뒤에 줄을 섰다가 지금 단단히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줄은 대통령의 신임을 얻고 그의 영광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줄이고, 어떤 줄은 패배와 고통의 줄일 수 있습니다. 어느 줄에 가서 서느냐에 따라서 미래가 완전히 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선거철이 될 때마다 사람들은 줄서기에 바쁩니다. 또 어느 줄에 설 것인지 저울질을 치밀하게 합니다.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어쨌든 줄을 잘 선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현상이지요.

1. 죽음의 줄에 선 사람들

몇 년 전만 해도 러시아에서는 사람들이 길을 가다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것을 보면 무조건 그 뒤에 가서 줄을 선 다음,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이 줄이 무슨 줄이냐고 묻는다는 우스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 줄에 서 있으면 양식을 배급받을 수 있는지, 아니면 끌려가서 강제노동을 하게 될 것인지 잘 알고 줄을 서야죠. 그런데 여기 정말 심각하게 줄을 잘못 선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죽음의 줄에 선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가 선 줄이 죽음으로 인도하는 줄인 줄도 모르고 그렇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너희는 죽은 자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 성경은 의역을 해서 '죽은 너희를 살리셨다'고 결론을 미리 말하고 있지만, 원래는 살리셨다는 말이 아직 나오지 않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과거에 죽은 목숨들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죽을 운명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죽은 이유는 그들의 허물과 죄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허물이라는 말과 죄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허물은 잘못을 저지른 행위를 뜻합니다. 가령 거짓말을 했다든지, 도둑질을 했다든지 하는 경우지요. 그리고 죄라는 말은 '과녁에서 빗나갔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준에 미달했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뜻이지요. 성경에서 죄의 개념은 인간이 하나님의 기준에 미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기준에 합격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가령 거짓말을 하게 되면 거짓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기준에 미달하게 되는 것이죠. 결국 허물이나 죄는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실패한 인생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실패하고 범죄함으로써 그들은 죽어버린 것입니다.

2.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그 에베소 교인들이 물리적으로 죽었던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우리의 상식적인 이해에 상반되게 사용된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뻔히 죽어있는 소녀를 보시며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비웃었지요(마 9:24). 또 나사로가 죽었을 때도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깨우러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정말 잠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요 11:11-12). 물론 이 경우들에서는 그렇게 죽은 사람들을 곧 살리시려는 예수님의 의중이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잠에서 깨어나듯이 죽음에서 깨어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죽음의 개념은 우리의 일반적인 죽음의 이해와 아주 다릅니다. 물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 같은 죽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육체가 더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영혼과 육체의 분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이분설이라 해서 주장하고, 어떤 학자들은 삼분설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영과 혼과 육의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이분설이든 삼분설이든,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는 육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즘 들어 학자들은 인간을 두 가지 또는 세 가지 구성요소로 나눈다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나누는 것은 분석하고 나누기 좋아하는 철학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지 성경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다 생명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사람이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창 2:7). 그래서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육체와 영혼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저도 한때 나의 영혼을 한번 인식해 보려고 애를 써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내 육체는 분명히 알겠는데, 내 영혼의 존재는 인식을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정신활동을 영혼이라고 할 수 있느냐? 정신활동, 즉 인식하고 추론하고 판단하는 활동은 나의 육체에서 나옵니다. 정신활동은 우리의 두뇌활동이기 때문이지요.

상당히 복잡하고 쉽지 않은 문제지요? 그렇지만 어쨌든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영혼과 육체를 분리할 수도 없고 분리해서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분설, 삼분설 하는 분리개념보다는 전인개념, 즉 영혼과 육체가 하나로서 인간이라는 개념이 점점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인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나누어지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죽음이지요. 그러나 이 죽음은 끝이 아니에요. 종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갈 망정 영혼은 아직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흙으로 돌아갔던 육체는 다시 부활해서 영혼과 연합하게 됩니다. 바다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놓을 것입니다(계 20:13). 불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놓아야겠지요.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죽음은 그래서 임시적인 죽음입니다. 마치 잠을 자다가 깨어나는 것처럼 다시 영혼과 육체의 연합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죽음은 진짜 심각한 죽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이미 그 권세와 힘이 꺾였습니다.

3. 진짜 죽음

그러면 진짜 죽음은 어떤 것입니까? 왜 바울은 죽지도 않은 에베소 교인들이 이미 죽은 자들이었다고 말합니까? 그것은 도대체 어떤 죽음입니까?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것을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진짜 죽음이고 궁극적인 죽음입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임시적인 죽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도 하나님을 떠난 상태이면 죽은 것입니다. 벌써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죽은 사람도 하나님 안에 있으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죽음입니까? 다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이야기로 돌아가 살펴봅시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코에 생기(living breath)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이 생기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생령(living being)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라는 줄이 연결되어 있어야 사람이 생령으로서 계속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더운 여름날 선풍기가 열심히 돌아갑니다. 선풍기가 그렇게 작동될 수 있는 이유는 전깃줄을 통해서 전기를 공급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깃줄을 끊어보세요. 아무리 성능이 좋은 선풍기라도 금방 멈추고 말겠지요?

이처럼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은 그 생명의 공급원이 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공급하고 있는 줄이 끊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생명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서 숨쉬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을 나누어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게 됨과 동시에 죽은 것이지요. 이것이 진짜 죽음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과거에 그렇게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죽었던 것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줄을 잘못 선 것이죠.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 앞에 줄을 서야 살 수 있을 것인데,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불순종하게 하는 영을 따라다니며 그가 시키는 대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순종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살았으니 어떻게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에게 공급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죽어 있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님을 떠나 심판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될 운명이라는 점에서도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지으실 때 불어넣어 주셨던 생명을 완전히 거두어 가시고 그들을 영원한 멸망과 죽음에 던지실 것입니다. 그럴 운명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이미 죽은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중요한 사실은 그들에게 그렇게 죽음이 초래하게 된 것은 그들이 선택을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허물과 죄 가운데서 행했고, 이 세상의 악한 풍속을 좇으면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일부러 죽음 앞에 가서 줄을 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과거에 그랬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그랬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고 불쌍한 인생들이었습니까? 그런데 아직도 그렇게 죽음 앞에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우리가 그들에게 가서 말해 주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 줄에서 빨리 빠져나오라고, 그리고 생명 앞으로 가서 줄을 서야 된다고 가르쳐 주어야지 않겠어요? 우리를 먼저 죽음의 줄에서 건지신 것은 아직 죽음 앞에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생명으로 가는 길을 증거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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