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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으로의 초대 (딤후 0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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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고 복 받으라는 말이 우리 귀에 낯설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병도 낫고 사업도 성공하고 자녀들도 앞길이 트이고… 이런 식의 메시지를 마치 교회의 등록상표인 것처럼 생각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새해가 되면 골목길에 내걸리는 플래카드나 전봇대에 나붙는 포스터의 내용은 '신년축복대성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명하고 능력 있는 부흥사들은 마치 축복을 쏟아 부어주는 사람처럼 인기가 좋았습니다. 미국은 하나님을 믿어서 부자나라가 되었고, 가난하고 무지한 나라들은 모두 우상을 섬기는 나라들이라고 늘 강조되는 단골메뉴였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았고, 이삭도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을 믿으면 그렇게 축복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믿음이 한국의 교회 안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교회에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씀은 아주 듣기 거북합니다. 차라리 성경에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재산도 몰수당하고 가족과 헤어지고 살던 곳에서 쫓겨나는 고통과 슬픔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의 실상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렇게 기독교를 박해하기 때문에 그 나라가 후진성을 면하지 못한다는 식으로만 현실을 파악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보아도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메시지가 없습니다. 오히려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예수를 믿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고난의 시작이며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과의 결별을 의미했습니다. 바울은 한번도 신년축복대성회를 개최한 적도 없고, 축복을 물 붓듯이 쏟아준 적도 없습니다. 돈을 받고 축복기도를 해 주었다는 기록은 눈을 씻고 보아도 성경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돈으로 성령의 능력을 사려고 하다가 그 돈과 함께 망하라는 저주를 받은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메시지는 예수와 함께 축복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목회를 하다가 온갖 어려움에 부딪쳐 지치고 쓰러지려는 디모데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하는 말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고난을 당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이 말이 낙심이 되었을까요? 아니면 한없는 위로가 되었을까요? 여러분에게는 어떻습니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낙심입니까? 위로입니까? 지금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을 그를 낙심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고난이라도 참고 이겨낼 수 있도록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는 여러분에게도 이 말씀이 큰 위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믿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보세요. 먼저 주신 것이 아닌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여기서 두려워하는 마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말할 때 쓰이는 단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그분의 높으심과 위대하심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워하는 마음은 겁이 많다는 뜻입니다. 소심하고 작은 일에도 놀라고 쉽게 낙심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를 믿다 보니까 툭하면 잡혀가고 고문당하고 죽임당하는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두렵습니까? 얼마나 겁이 납니까?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제자들에게 있었던 마음입니다. 그들은 너무 두려워서 문을 꼭꼭 잠가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때문에 숨어살면서 하나님 믿은 것을 큰 약점처럼 생각하고 언제 붙잡혀갈지 모르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 살도록 부르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지구촌 구석구석에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목숨을 바꿔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북한 접경의 중국에서 선교사들에게 훈련을 받고 북한에서 복음을 전하다 붙잡혀 회령 보위부 감방에 수감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한 청년의 보고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회령 보위부에서 기독교인을 몽땅 잡아서 총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 13살짜리 소녀와 8살짜리 남자아이 남매가 예수쟁이라고 붙잡혀왔습니다. 아이들이 너무 어리고 측은해 보였던지 보위부 간부는 '너희들 예수 안 믿는다고만 하면 살려주겠다. 어서 말하라'고 다그쳐도 끝내 예수를 부인하지 않으니까 옆에 있던 보위부원은 동생이 보는 앞에서 소녀를 숱하게 때리고 입을 찢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본 남자동생은 '우리 누나 때리지 말기쇼. 예수님은 꼭 믿어야만 합네다.'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보위부 간부는 '악질 반동 예수쟁이 새끼들 데려다가 총살시키라.'고 명령했고 두 남매가 개 끌려가듯 끌려간 후 다시는 이들을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로서는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그런 고문을 당하고 심지어는 처형까지 당해야 한다는 상황이 어떤 것일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어떤 심정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을까요? 괜히 예수 믿었다는 후회일까요?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일까요? 예수를 안 믿을 수는 없고, 그러나 너무나 고통스럽고, 그래서 짜증과 원망 속에서 살아가야 할까요? 체포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까요?

13살짜리 소녀와 8살짜리 꼬마가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만은, 이 아이들에게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지 않습니까? 이 아이들뿐만 아니라 붙잡혀와서 처형을 당한 모든 기독교인들은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평온함 속에서 최후를 맞이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를 믿는 그들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래 그 이름 때문에 죽임을 당한 수많은 순교자들이 그렇게 죽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도록 부르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대적 사탄에게서 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믿음이 연약해지고 결심이 흔들려서 영광스러운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게 되고 믿음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주신 것은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물론 각 개인에게 주신 능력의 종류나 정도가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요. 능력은 헬라어로 두나미스입니다. 이 말에서 다이나믹, 나이너마이트 같은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수퍼맨처럼 초능력이 생겨서 축지법을 쓴다거나 천리안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긴 어떤 분들은 병을 고치는 능력을 받은 경우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만 능력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능력을 주신 목적은 그 능력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자신의 인기를 높이고 자신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하나님 주신 이 능력이 아니면 무슨 수로 그 고난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병을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렸다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운 것, 그것이 바로 자신에게 주신 능력으로 할 수 있게 된 일이라고 말합니다. 병 고치는 것이 능력이 아닙니다.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능력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섬기고 믿는 데 장애가 되는 것들을 헤쳐나가고 이길 수 있게 하는 것이 하나님 주신 능력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 사랑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다고 말합니다(롬 5:5). 우리의 영적인 삶은 우리가 가진 사랑에 의해 측정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며, 또한 우리의 이웃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나 자신이라면, 우리의 삶은 나 자신의 유익과 성공에 초점이 맞추어지게 될 것이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나 혹은 하나님을 위해 우리 자신을 희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으로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다른 형제의 유익을 추구하도록 삶의 틀이 형성될 것입니다.

근신하는 마음이라는 것은 벌받고 반성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건전한 마음, 자기 절제가 되고 있는 마음, 또 올바른 우선순위를 설정할 줄 아는 규모있는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그리스도인이 이 근신하는 마음으로 정돈된 삶을 영위해 나가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며 살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6-27)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근신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을 때 놀라운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우리가 태어나면서 갖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훈련으로 얻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인데, 언제 주시는가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주셨다는 단어는 부정과거시제로 쓰였는데, 이것은 과거에 이미 완료된 동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연합하게 되었을 때, 그것이 과거에 한번 발생한 사건인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것을 증거하고 그에 따른 삶을 살고 있음을 나타내야 할 차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디모데 너는 주님에 대해 증거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라, 그리고 내가 주를 위해 갇힌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너도 내가 당하고 있는 이 고난에 동참하라고 고난에의 초대장을 보내고 있습니다. 바울이 혼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 힘들어서 디모데까지 그 고난에 동참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디모데 역시 이미 고난을 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바울도 고난을 당하고 디모데도 고난을 당합니다. 그들뿐만 아니라 베드로나 요한이나 당시의 모든 기독교 지도자들이, 아니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이 고난을 극복하고 다시는 고난을 당하지 않도록 하자! 이렇게 궐기를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너도 마땅히 이 고난을 당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고난은 기독교의 한 필수적인 부분이 되어버렸습니다. 기독교는 편안한 종교가 아니라 험난한 종교가 되었습니다. 가해자의 종교가 아니라 피해자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매우 당연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박해를 당하던 기독교가 지배자의 종교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고난을 당하던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거꾸로 이교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기독교의 위대한 승리요, 세상을 정복한 것이라고 입을 모아 칭송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후로부터 기독교가 생명을 잃어갔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이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가 권력이 되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인간의 고집과 독선으로 변했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은 우매한 백성을 얽어매는 종교의 규범으로 대치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발견하기가 무척 어렵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것을 더 이상 기독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였습니다. 복음은 고난을 동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권력을 생산해내는 복음이 되었으니 어떻게 그 본질에 있어서 동질성이 유지될 수가 있겠습니까?

복음은 반드시 고난을 동반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이기 때문이고, 이 하나님의 계획에는 반드시 심한 저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저항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습니다. 그 저항 때문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저항은 바울에게도 디모데에게도,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반드시 이 저항도 따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은 고난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선언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시고 고난받으신 그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고난을 회피하려 한다거나 고난을 부정한다면 그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글쎄요, 우리가 주님 때문에 받는 고난이 너무 없어서 고난에 대한 개념이 없어질 수 있을까요? 어쩌면 그것도 우리로 하여금 평안의 종교, 문화인의 종교, 교양 있는 사람의 종교에 안주하게 하려는 사탄의 계략인지 모르지요. 고난이 없다면 정신을 차리고 지금 내 자리가 어디인지 점검해야 할 때입니다. 고난이 너무 심하다면 그 고난이 얼마나 당연한 것인지, 그리고 그 고난으로 인한 유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여기 고난으로의 초대가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미련해서 그 고난에 올바로 대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그 고난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주님 자신이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고난당하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당하는 현장에는 우리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는 것처럼 그분의 고난에도 연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고난이 얼마나 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바울의 초대에 의해서 디모데가 힘을 얻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난을 능히 감당했던 것처럼, 오늘 이 말씀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뒤를 따르기를 소원하는 여러분의 삶에 능력과 새 힘을 공급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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