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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한 부르심 (딤후 0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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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매우 중요한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부르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맥을 잘 살펴보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과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이 동격으로, 혹은 동의어로 사용되어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우리를 구원하사 부르셨다고 되어 있어서 마치 시간이나 논리적인 순서가 개입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원문은 카이(and)라는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르심, 혹은 부른다는 말은 원어로 칼레오인데, 그냥 부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이름을 부른다고 할 때의 그 부른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이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테마가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과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이 어떻게 동의어가 되는 것입니까?

부르심이라는 단어는 신학적인 용어로 매우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동일한 단어를 중복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은 이름을 한번 불렀다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을 실행하시는 그분의 행위이며,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것은 거룩하신 부르심인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구원의 서정이라는 주제 속에서 이 부르심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서정이란 우리가 구원받게 되는, 또는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순서를 말합니다. 이 순서는 시간적인 순서입니다. 교단이나 신학적인 입장에 따라 이 구원의 서정을 설명하는 데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구원의 순서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정-소명-중생-칭의-성화-영화]입니다.

예정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대상을 미리 결정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예정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천지가 조성되기 이전에 이미 이루어진 일입니다. 마치 창고에 수십 년 동안 쌓여 있으면서 빛을 보게 될 날을 기다라고 있는 문서처럼, 시간으로 말하면 우리의 인내와 이해의 범주를 훨씬 초월하는 그 세계를 지나 존재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창고 속의 문서가 빛을 보게 되는 것처럼, 오랜 세월을 지나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마침내 우리에게 나타난 것은 바로 이 소명, 부르심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래된 장부를 여시고 우리의 이름을 찾으신 다음 마치 출석을 부르는 것처럼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으로써 우리를 그 구원으로 초대하시는 행위입니다. 이 부르심으로부터 우리의 구원이 마치 기계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처럼 가동된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출석을 불러도 대답을 안 하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아무리 구원으로 나오도록 부르셔도 반응을 하지 않거나 거부를 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를 들어 학생 하나가 워크맨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듣느라 선생님이 출석부를 때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이 학생은 결석입니까? 아니면 그래도 학교에 나왔으니까, 혹은 하나님의 출석부인 예정에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출석으로 해야 합니까? 이것이 우리 인간의 구원문제에 적용되면 상당히 복잡한 신학적인 논란거리가 되겠지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말할 때 효과있는 부르심이라는 용어를 쓰게 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데도 들리지 않게 되면, 부르시기는 했으나 효과가 없는 부르심이 되겠지요. 결국 효과가 없는 부르심은 우리의 구원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효과도 없는 부르심을 쓸데없이 남발하거나 낭비하시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효과없는 부르심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효과가 발생하는, 즉 반드시 그 의도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부르심이라는 뜻에서 효과있는 부르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아이에게 들어와서 밥 먹으라고 불렀습니다. 그 말이 아이에게 들려서 밥 먹으러 들어오면 그 부름은 효과를 발생시켰습니다. 그러나 엄마의 부름이 언제나 그렇게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노는 데 정신이 팔려서 엄마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효과없는 부름이었지요? 그러면 엄마가 어떻게 합니까? 엄마 혼자 밥을 먹고 나서 상을 치워버립니까? 아니지요. 아이가 대답이 없으면 다시 부릅니다. 두 번 세 번 부를 때는 엄마의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아무리 아이가 노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어도 엄마의 두 번째 세 번째 부르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엄마의 부름은 효과를 발생시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한번 작정하셨으면 그 다음 단계인 부르심에서도 반드시 그 효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구원이 부르심의 단계에서 실패하게 된다면 첫 번째의 예정이라는 단계는 무용지물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효과있는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대로 부르시면 그 부르심이 대상에게 도달하지 못하거나 또는 그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거부하거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 55:10-11). 하나님의 부르심에 헛된 부르심, 효과없는 부르심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이지요.

특히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효과있는 부르심으로 설명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로마서 8장 28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사람들은 이 말씀을 참 좋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고 하니 얼마나 기분좋은 말입니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착각하지 마세요. 이 말씀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결국 잘 풀리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들이 합력해서 결국 우리에게 좋은 결과를 도출하게 된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혹시 여러분도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셨으면 당장 그 생각을 버리세요. 무식하다는 얘기 듣고 싶지 않으면 말입니다. 바울이 계속해서 뭐라고 말하는가 보세요. 30절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미리 정하시고(예정) 부르시고(소명) 의롭다 하시고(칭의) 영화롭게 하신다(영화), 지금 바울은 구원의 서정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중에서 28절에서는 부르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구원의 서정으로서의 부르심과 일이 잘 풀리는 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헛되지 않고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효과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은 효과있는 부르심이기 때문에 이 부르심은 구원과 동의어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부르셨다는 것은 이미 구원이 선포되었고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구원을 실행단계에 옮기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부르심의 성격을 잘 나타내주는 구절은 이사야 43장 12절 말씀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여기서 지명하여 불렀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들로부터 구별하여 따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특권을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이 부르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삶 속에서 구체적인 사건들로 발생합니다. 특별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일련의 행동에서 분명하게 나타나지요. 예수님의 부르심은 한 마디로 '나를 따라오너라'입니다. 이렇게 부르심으로 해서 제자들은 예수께 속한 무리를 구성하게 됩니다. 그 부르심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결과입니다. 여기까지 말하면, 우리 주변에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 가운데도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게지요? 아직 그들에게 효과있는 부르심이 임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 효과있는 부르심은 때때로 우리 입술의 증거를 통해서, 우리의 권유를 통해서 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입술의 증거가 하나님의 효과있는 부르심의 방편으로 사용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런 열매도 맺고 그런 기쁨도 맛보고 살아야지요. 그것이 예수 믿으면서 누릴 수 있는 행복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까?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구원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은 성도에게 하나님은 또 다른 부르심으로 부르십니다. 그것은 사역으로의 부르심, 혹은 섬김으로의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사명을 부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도 일종의 부르심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 11절에서 바울이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다고 말하는 것도 사명으로의 부르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구원으로의 부르심과 사명으로의 부르심이 있는가 하면, 모든 사람에게 각기 주어진 역할로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은 이 부르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고전 7:18)고 하면서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전 7:20)고 말합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여기서의 부르심을 우리의 일상생활에까지 확대해서 적용합니다. 즉 각자의 직업에 대한 부르심으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이 하나님의 말씀이나 사회적인 도덕과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 이상, 그 일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믿고 그 일에 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것과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직업윤리의 바탕을 이루는 사상은 바로 이 소명의식입니다. 왜냐하면 만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이 허락하신 영역에서 청지기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무슨 술장사나 도박장 운영 같은 것을 소명의식을 가지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소명의식을 가지고 모든 일에 임할 때, 즉 하나님 앞에서 일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나의 뜻을 이루고 나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일할 때 사람을 보고 실망하거나 상황에 따라 낙심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소명, 즉 부르심이란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소명을 가진 사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힘들어하는 디모데에게 우리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해주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에서 맡은 직분도 하나님의 부르심이요, 직장에서 일하는 것도 하나님의 부르심이요,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도 하나님의 부르심이요, 가정에서의 역할도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이 하나님의 부르심이 여러분의 삶을 풍성하고 활기차고 감사가 넘치는 삶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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