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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떠난 사람과 돌아온 사람 (딤후 04: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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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 평생 살아가면서 만나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겠지만, 우리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거나 마음 속에 아주 커다란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애틋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나에게 상처를 입히고 떠난 사람도 있습니다. 잊을 수 없는 은인도 있고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원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요. 디모데에게 현재 자신의 형편을 설명하는 가운데 몇몇 사람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먼저 데마라는 사람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간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 곁에 있던 사람들은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동역자들이었습니다. 데마 역시 그 중 한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갑작스러운 데마의 변절과 배신에 바울은 대단히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어서 속히 오라고 하는 이유도 데마의 배신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번역이 되어 있지 않지만 원문에서 10절은 ‘왜냐하면’(gar)이라는 접속사로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디모데가 속히 와야 하는 이유는 데마는 바울을 버리고 떠났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바울과 함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 동역자들이 사역을 위해서 뿔뿔이 흩어져 떠났는데 그 중 하나였던 데마는 사역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사랑해서 바울을 버리고 떠났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사건 아닙니까? 이 데마는 바울이 로마에서 첫 번째 감옥에 갇혔을 때 매우 가까이서 바울을 보필하는 동역자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 때 썼던 편지에는 데마의 이름이 언급되는데, 골로새서에는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골 4:14)고 했고, 빌레몬서에서는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몬 1:24)고 했습니다. 그랬던 데마가 이제 와서 왜 바울을 배반하고 떠났을까요? 이 세상을 사랑해서 떠났다는 말에서 데마는 믿음까지 저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바울이 첫 번째 감옥에 갇혔을 때와 지금 두 번째로 감옥에 갇힌 것은 매우 다른 형편입니다. 처음에는 감옥에 갇혔다기보다 가택연금 상태였습니다. 바울은 집을 한 채 얻어서 거기 기거하면서 자유롭게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석방되었다가 다시 두 번째로 투옥되었는데, 이번에는 본격적인 핍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네로 황제에 의한 극심한 박해에 의해 바울이 옥에 갇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중죄인인 바울과 함께 머문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 아니겠습니까?

고난과 환난 당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환난의 가장 강력한 순기능은 진짜와 가짜를 가려준다는 것입니다. 집 나간 탕자가 흥청망청 돈을 물 쓰듯 할 때는 친구들이 몰려들었지만, 거지꼴이 되어 돼지를 치게 되었을 때 그의 곁에 남은 친구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두 가짜였던 것이지요.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어서 복 받고 부자 된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너도 나도 다 모여들지 않겠어요? 그러다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재산상의 손해를 보고 여러 가지 괴로운 일을 당하고 심지어는 목숨마저 위협을 받게 되면 어떻습니까? 누가 예수를 믿으려 하겠어요? 오로지 예수 믿는 것이 그 모든 손해와 고통보다 훨씬 더 귀중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 그 믿음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평소에는 모두 믿음을 가진 것처럼 보였는데, 고난 앞에서 누가 진짜로 믿음을 가졌는지 누가 가짜였는지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 디모데후서의 주제는 고난입니다. 복음과 함께 받는 고난이지요. 편지의 앞부분인 1장 8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했었습니다. 생애 전체가 고난으로 점철되었던 것이 바울 자신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난은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게 할 만큼 값지고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의의 면류관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도 이 고난을 피하지 말고 받으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피한다는 것은 믿음을 포기하는 것이고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해서 복음을 저버리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이기고 의의 면류관을 얻게 된 바울의 생애와 고난을 이기지 못해 믿음을 저버린 데마의 행위가 강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디모데 역시 교훈을 얻지 않겠습니까? 우리 역시 그 두 사이에서 선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데마가 처음에는 믿음을 가지고 충성스럽게 주를 섬기다가 고난이 두려워서 또는 세상을 더 사랑해서 떠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예수님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씨앗은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졌는데 곧 싹이 나왔지만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말라버렸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보고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아들였지만 그 속에 뿌리가 없기 때문에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 곧 넘어지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딱 데마에게 해당되는 경우 아닙니까?

데마처럼 바울의 신임을 얻고 복음사역에 헌신했던 사람도 그렇게 믿음의 뿌리가 없어서 중간에 그만두었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큰 경고가 됩니다. 누가 데마 같은 사람이 가짜였다고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어요?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보기에 좋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 중에도 진짜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고 고난 앞에서 넘어질 사람이 없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겠어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향해서 저 사람은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일까 아닐까 궁금해 하거나 의심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보다는 자신의 믿음의 상태를 살피고 내 믿음이 과연 복음과 함께 고난까지도 감당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인지 확인해야겠지요. 그리고 그런 믿음에 이르기 위해 애쓰고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여러 사람들 중에서 특별한 한 사람은 마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마가는 처음에 좀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지요. 바울과 바나바가 처음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전도여행을 떠났을 때 마가도 팀의 일원으로 동행했었습니다. 말하자면 선교사역을 위해 헌신해서 온갖 어려움을 각오하고 여행을 떠났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전도여행이 젊은 마가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중간에 팀을 이탈해서 돌아가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울을 몹시 화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마가는 바울에게 완전히 찍힌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가 두 번째 전도여행을 떠나려고 할 때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마가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한 번 사도들의 전도여행에 합류하기를 원했습니다. 마가의 삼촌이기도 했던 바나바는 잘못을 용서하고 다시 받아주기로 했지만, 칼 같은 바울은 절대로 받아줄 수 없다고 반대했던 것입니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대판 싸우고 각자 전도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팀이 깨져버렸는데, 바로 그 원인 제공자가 마가였다는 말이지요.

그랬으니 바울이 마가를 얼마나 좋지 않게 여겼겠습니까?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뻔히 잘못된 줄 알면서도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결국 승리자가 되는 수가 많아요. 부부싸움에서도 그렇고 사업이나 무슨 협상하는 일에서도 그렇습니다. 위대한 두 사도들이 싸우고 갈라서게 될 만큼 마가에 대한 바울의 감정이 좋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바울의 행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국 그 감정을 다스리고 마가를 용납했습니다. 바울이 바나바와 싸우고 갈라진 후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원인을 제공했던 마가를 바울이 용서하고 다시 용납한 것을 보면 바나바와의 관계도 회복되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마가를 꼭 데려오라고 부탁할 정도로 마가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과거에 가졌던 감정의 응어리를 완전히 녹여 없앴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빌레몬서에서도 마가를 동역자로 부르고 있는 것을 보면 벌써 오래 전부터 마가는 바울과 함께 사역을 해 온 것으로 보입니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 번의 실수로 인생이 좌우될 수는 없습니다. 실수를 만회하고 다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합니다. 비록 감정이 상하고 다시는 못 볼 정도로 서로 싸우고 갈라졌다 한들, 그 감정에 얽매어서 사람을 미워하고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감정을 다스릴 줄 알고 더 나아가 용서할 줄 알게 될 때 우리가 큰 일을 도모할 수 있고 사람을 세울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마가를 용서하고 용납함으로써 마가라는 신실한 사역자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마가는 바로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 아닙니까? 따라서 마가의 성공적인 생애와 사역은 바울의 용서와 화해에 힘입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바울이 끝까지 마가를 용납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우리가 마가복음이라는 책을 성경 안에서 가지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복음서의 한 권을 기록한 사람과 신약성경의 절반 이상을 기록하고 기독교의 사상적 교리적 체계를 세운 사람이 끝까지 불화하고 용서하지 못한 사이였다는 것을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니까요.

오늘 우리는 전혀 다른 두 사람을 살펴보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한 사람은 신뢰를 얻고 동고동락하다가 변절해서 떠난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한 때의 실수로 신뢰를 잃어버리고 큰 사건까지 만들었지만 결국은 신뢰를 회복하고 다시 신실한 동역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데마 같은 사람이 변절하고 믿음을 떠나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도로 하여금 그렇게 분노하게 만들고 사도들의 선교팀까지 깨지게 만들었던 마가가 다시 바울의 신뢰받는 동역자가 되리라고 누가 기대나 했겠습니까?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을 지킬 때 우리가 끝까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비록 서로 상처를 입었을지라도 용서하고 화해할 때 우리가 함께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되고 아름다운 교제와 함께 사람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처럼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일꾼으로 인정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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