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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치고 박고 싸우는 교회 (고전 0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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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회의 커다란 약점 가운데 하나는 자기들끼리 너무 잘 싸운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분쟁에 휩싸여 법정에까지 가서 결판을 내야 하는 일까지 종종 일어납니다. 그런 와중에 정말 못 봐줄 일들도 발생하는데, 교회의 분쟁에서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뭔가 하면, 목사가 예배를 인도하려고 예배당에 들어오려 하면 반대파가 못 들어오게 막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폭력이 난무하고 경찰이 출동을 합니다. 그래서 또 전치 4주의 상해를 입었느니 어쨌느니 하면서 고소를 하고 사건은 더 커지지요.

그렇게 해서 예배당을 차지하면 그게 승리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치고 박고 싸우고 나서 무슨 마음 자세로 예배를 드리게 될까요? 그 예배는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그 예배를 받으셔야 할 하나님은 기쁜 마음으로 그 예배를 받으실까요? 또 쪽수에 밀려서 본당을 차지하지 못한 쪽에서는 1층에서 따로 예배를 드립니다. 1층에서도 예배를 드리고 2층에서도 예배를 드리는데, 서로가 상대방을 저주하고 원망하면서 각자 하나님께 자기 편 되어달라고 할 것이니, 참 하나님이 곤란하시겠네요.

세상이 교회를 바라보며 갖는 기대가 있습니다. 자기들은 못하는 것을 교회가 해 주기를 바라는 기대입니다. 자기들은 착하게 살지 못하고 죄를 많이 짓지만, 교회는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또 교회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자기들보다 더 못한 짓을 하면 자연히 욕을 하게 되지요. 조폭들이 패싸움했다고 비난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패싸움을 하면 조폭보다 못한 집단으로 비치게 되는 거지요.

사실 교회에 이런 분쟁이 있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맨 처음 교회가 생겼을 때부터 분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여기 고린도교회에 나타나지 않습니까? 이 고린도교회는 여러 가지 많은 문제를 가진 교회였는데, 그래서 그 문제들을 지적하고 고치도록 하기 위해 바울이 이 편지를 써 보낸 것인데, 그 많은 문제 중에서 바울이 맨 먼저 다루고자 하는 문제가 바로 이 교회 안의 분쟁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의 분쟁을 보면 파가 넷으로 나뉘어가지고 서로 대립했군요. 바울파가 있었고,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고 그리스도파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전도하고 가르쳐서 세워진 교회가 바로 이 고린도교회이기 때문에, 바울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또 바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겠지요. 그런데 아볼로파는 왜 생겼을까요?

아볼로는 바울의 뒤를 이어 고린도교회에 와서 목회를 한 사람입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인데,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였다고 사도행전 18장에서 말합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에 있는 도시로서 당시 학문의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이 아볼로는 수사학에 특출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매우 뛰어난 언변을 구사했던 것 같습니다. 이 아볼로가 원래 에베소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는데, 아직 성령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서 바울과 동업을 하면서 함께 복음을 전했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아볼로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볼로가 고린도교회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볼로의 뛰어난 지식과 말솜씨에 고린도 교인들이 뿅 가버렸어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면서 유대인들과 말싸움을 해서 지는 법이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바울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가만 보니까 아볼로는 바울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유능하고 똑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추종자들이 생기지 않았겠어요?

그래도 바울에게 충성하는 사람들 생각에는 아무리 아볼로가 똑똑하고 잘났어도 바울이 처음 그들에게 와서 복음을 전해 주었고, 또 바울은 사도라고 하니까 바울파로 남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바울파와 아볼로파가 생겨나 세력을 규합하게 되니까, 어떤 사람들은 바울파나 아볼로파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바울이나 아볼로보다 더 큰 권위에 매달려야 한다고 생각했을 법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찾아낸 것이 베드로입니다. 바울이야 사도라고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던 데 비해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이니까 더 큰 권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될 수 있지요. 거기다가 바울이나 아볼로가 정통 유대인이 아니라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데 비해 베드로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유대인이라는 점에서 전통 따지기를 좋아하는 유대인들은 베드로파에 들어오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 파 저 파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바울파에서도 들어오라고 손짓하고, 아볼로파에 들어가자니 베드로파에 있는 친구가 섭섭해 할 거고, 이 쪽 저 쪽 다 눈치를 보며 살자니 피곤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그래서 무당파들이 모여서 자기들끼리 또 하나의 파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다른 파들이 바울이나 아볼로, 베드로 같은 사람들을 다 갖다 써버렸으니까 같다 붙일 사람이 없어요. 그리고 새로 파를 만들려면 기존에 있던 파들보다 더 권위 있는 이름을 붙여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찾아낸 것이 그리스도파라는 이름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편 가르고 당파 만드는 수법은 똑같지요? 교회라고 해서 다르지 않아요. 사람이 둘 이상 모인 곳에는 의견의 충돌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이 조정되지 않고 확대되면 이렇게 분쟁으로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 안에 분쟁이 있어서는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아무도 바울을 위해서 예수 믿은 사람이 없고, 아볼로 때문에 예수 믿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베드로의 공로로 구원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볼로에게 세례 받았다고 아볼로의 교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과 삶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바울의 교회가 아니고 베드로의 교회도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St. Andrews Church니 St. Enoch’s Church니 이런 것은 뭡니까? 교회도 루터교가 있고, 학교도 St. Paul이니 St. John 같은 이름을 붙인 게 많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앰뷸런스 회사가 St. John이더군요. 훌륭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지을 수도 있고 학교를 세울 수도 있습니다. 아볼로 같은 훌륭한 선생이라면 그를 추종하는 학파도 생길 수 있고, 또 개인적으로 베드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베사모(베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성할 수도 있어요.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바울이 바울파니 아볼로파니 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는 이유는 누구는 바울을 좋아하고 누구는 아볼로를 좋아한다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 것을 빌미로 분쟁을 일으키고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아볼로를 좋아하고 베드로를 좋아하는 것이 무슨 문제될 게 있습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분쟁을 일으키고 교회 안에서 파당을 지어야 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모든 분쟁의 원인은 이기적인 욕망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약 4:1) 물론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은 정의를 실천한다거나 악을 징벌한다는 그럴 듯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 명분을 한번 제거해 보세요. 그러고 나서 거기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로 정의를 위해 싸운다고 제가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명분을 제거한 후에 나의 원망과 분노가 남아 있다거나 나의 이해관계가 연루되어 있다면 그 분쟁에 참여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저는 주변에서 교회가 분쟁에 휩싸이고 그렇게 사람들이 원수처럼 갈라지는 것을 종종 보아왔습니다. 교인들이 싸우면 더 지독해요. 용서가 없어요. 또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대부분 목사가 개입된 문제입니다. 목사와 교인들이 대립하기도 하고, 교인들이 목사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대립하기도 합니다. 저의 부친도 목회하시다가 교회에서 쫓겨나다시피 떠나야 하셨던 적이 있었고, 저의 형님도 목회하면서 모셔오는 데 앞장섰던 분들에게 다시 쫓겨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감사하게도 아직까지 한 번도 그런 일에 연루된 적은 없습니다만,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는 알 수가 없지요.

그러나 여러분, 할 수만 있으면 저는 교회가 그렇게 갈라지고 싸우는 일이 저를 중심을 해서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 분쟁에 앞장서지 마세요. 그렇게 해서 여러분의 영적 생활과 믿음의 성장에 도움 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목사 쫓아내는 일에 총대 메지 마세요. 제가 쫓겨날까 걱정돼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쫓겨나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싫다는데 남아 있겠다고 버티고 싶은 생각도 없고, 쫓겨날 지경이 되도록 구차하게 인생을 살고 싶지도 않아요. 그러나 문제는 교회의 분쟁에 앞장선 사람들 자신이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정의를 세우고 목적을 달성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난 후에 돌이켜보면 그 인생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아 있지 않겠어요? 어디를 가더라도 그 허물은 달고 다녀야 하지 않습니까? 하늘나라 갈 때, 주님 앞에 서는 날, 그 문제는 여기다 남겨두고 갈 수 있나요?

뭐든지 끝까지 지키겠다고 버티는 두 사람이 있으면 분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양보하고 포기하는 한 사람이 있으면 분쟁은 시작되지도 않습니다. 끝없는 분쟁 앞에서 누가 잘했고 잘못했고는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분쟁 자체가 이미 더 큰 죄악으로 눈덩이 불어나듯 커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이 얼마나 애끓는 사도의 권면입니까? 교회 안에 분쟁이 생기고 서로 싸울 때,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의 가슴은 찢어질 것입니다. 반면에 그것을 즐기고 부추기는 것은 누구입니까? 우리의 원수 사탄이 아니에요?

우리가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한 마음과 한 뜻을 품게 되기를 바랍니다. 비록 생각이 다르고 습관도 다르고 살아가는 방법도 달라서 서로 마음이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 차이들을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양보해서 아름다운 화평의 모습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교회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천국에 갈 것이고 다 함께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인데, 여기서 그렇게 조금 다르고 서로 안 맞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입니까? 그것 때문에 교회를 깨뜨리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면 무슨 수로 그것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원수가 되다시피 싸우던 사람들, 교회에서 쫓겨난 목사들이나 목사 쫓아낸 장로들, 모두 천국에 가서 만나겠지요? 거기서 서로 쑥스럽지 않겠어요? 그때 서로 용서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부끄럽지 않겠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가운데 바울파니 아볼로파니 하는 것 같은 파당과 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합시다. 마음이 안 맞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것 가지고 서로 분노하고 싸울 것이 아니라, 솔직히 꺼내놓고 얘기하고 토론해서 합일점을 찾아내야지요. 그런 다음에 각자 양보해서 협력하는 것, 우리가 할 수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셔서 서로 사랑하게 하시고,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게 하시고, 또한 하나 되게 하시는 영을 부어주셔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아름답게 세워나갈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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