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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구요? (고전 03: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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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우리는 집을 짓는 사람들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처음에는 바울이 집을 짓는 사람으로 나왔는데, 그 다음에는 모든 사람이 자기 집을 짓는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습니다. 지푸라기로 집을 짓는 사람도 있고 나뭇가지로 집을 짓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금이나 은, 혹은 보석으로 집을 짓기도 했지요. 각자가 짓는 집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우리가 거룩한 삶으로 아름다운 집을 지어야 한단 말이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우리가 성전이라고 바울이 말합니다. 우리 각자가 지푸라기 집이나 보석으로 꾸민 집을 짓는 줄 알았는데, 우리는 더 나아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집 중에서도 가장 귀한 집이라면 성전이 아니겠어요? 바울은 우리가 성전을 짓는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나온 우리가 짓는 집과 여기서 우리 자신이 성전이라는 것은 직접적인 연관이 있거나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논점이 발전하는 것처럼, 바울은 집 이야기를 하다가 성전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이지요.

어쨌든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 말은 유대적 사고방식에 의하면 매우 도발적인 것입니다. 가히 신성모독에 해당된다고 할 수도 있는 발언이지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어렵게 생각했는가 하면, 하나님이라는 말도 입에 올리지 못했어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에는 모음이 없어요. 그래서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 거룩하신 이름을 감히 우리 입으로 발음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또 서기관들은 성경을 필사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인데, 그렇게 성경을 베껴쓰다가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붓을 다시 빨고 썼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집인 성전도 당연히 그만큼 거룩하고 감히 우리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곳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면 유대인들은 기겁을 하겠지요?

자, 그럼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 대해서 좀 더 살펴봅시다. 성전의 개념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단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최초로 나타나는 제사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시려면 아무 때나 찾아오시면 됩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만나러 찾아오시곤 했습니다. 범죄하기 이전의 아담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그 이후의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아무 때나 하나님을 찾아갈 수가 없어요. 인간이 하나님과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은 제사입니다. 물론 가인의 제사처럼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면 하나님과의 접촉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는 거지요.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을 만나려는 아벨의 시도는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제단에서는 임시적이고 일시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질 뿐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개념과는 아직 거리가 멀지요.

좀 더 구체적으로 성전의 개념이 나타난 것은 벧엘에서입니다. 형 에서를 속이고 나서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길에 오른 야곱은 한 곳에 이르러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신 거예요. 땅에서 하늘까지 이어진 사닥다리가 있었고, 그 사닥다리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그 위에 하나님이 계셨는데, 하나님이 야곱을 축복하시고 늘 함께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야곱은 그곳이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지었는데, 벧엘이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지요. 그 후에 야곱은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벧엘로 돌아갑니다. 그것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뜻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이 구체적인 제도로 확립된 것은 애굽을 탈출한 후에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이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언약이 체결됩니다. 말하자면 계약이 이루어지는데, 어떤 계약인가 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그들의 신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 언약의 조건으로 주어진 것이 바로 율법이지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고, 그 대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신이라는 표시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주하기로 하십니다.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장소가 모세에게 명하셔서 짓게 하신 성막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 모세는 이 성막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이 성막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사회가 안정되니까 보다 항구적인 하나님의 집이 있어야겠다는 필요가 생겨납니다. 성막은 말하자면 텐트거든요. 광야에서 방랑할 때는 성막을 분해해서 쉽게 이동할 수 있어서 좋았는데, 정착하고 나서는 이동할 필요가 없으니까 텐트 대신 집을 지어야지요.

나라를 안정시킨 다윗은 화려한 궁궐에서 산다는 것이 죄송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직도 텐트에 계시니까요. 그래서 성전을 지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성전 건축은 뛰어난 건축가였던 솔로몬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 후 성전은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삶의 중심이 됩니다. 그런데 그 성전은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면서 파괴와 약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만에 돌아와서 다시 성전을 세웁니다. 이 두 번째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에 비해 초라했지만 거의 500년가량 존속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성전은 예수님 당시 헤롯왕에 의해 건축되었습니다. 헤롯이 하나님을 공경해서 성전을 건축했던 것은 아니지요. 헤롯이 로마의 후원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긴 했지만, 헤롯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거든요. 변방의 이두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의 반항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그 반항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헤롯이 성전을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성전도 로마가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무참히 파괴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다시 성전이 재건되지 않았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1년에 한 차례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대신해서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데, 피는 죽음을 의미하지요. 죄는 백성들이 지었으니까 당연히 백성들이 죽어야 하지만, 소가 대신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소의 피를 보시고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러니까 제사는 인간의 죄를 위해서 누군가가 대신해서 죽는다는 것을 내포하지요. 바로 그 제사가 행해지는 곳이 성전입니다. 그리고 그 제사를 통해서 인간은 다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성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신 후에 하신 말씀이 '이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겠다'(요 2:19)고 하셨지요. 사람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요한은 그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하면 예수께서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고 했어요. 46년이나 걸려서 지은 거대한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겠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정신나간 소리라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사실 예수님은 자기 육체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실제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육체가 성전이 되는 것입니까? 성전의 기능은 인간이 지은 죄를 대신해서 소나 양이 죽는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과 인간이 화해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일이 바로 그거잖아요?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섬김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0:28). 그러니까 성전에서 행해지던 제사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나게 될 일을 미리 그림자처럼 보여준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후 성전이 파괴되고 다시 재건되지 않은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으로, 또 거기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곳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는데,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그 기능과 의미가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것은 대단히 획기적인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양식에 한 부분으로 참여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할 때 개인들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고린도 교회를 집단적으로 가리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집단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이라면, 그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바울파니 아볼로파니 하면서 분열시키고 어지럽히는 사람들을 책망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성전을 이리저리 찢어놓으면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두겠냐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렇게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멸하신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고 우리의 교제를 성전 삼아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만큼 높여 주셨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책임은 무엇입니까?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전을 거룩하게 유지시켜야지요. 우리는 그냥 우리가 아니에요. 내 인생 내 멋대로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란 말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것이 되었어요. 그러니 내 멋대로 살 수가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대로라면 지푸라기 집이나 짓고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들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 삼으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모신 사람들, 하나님을 담은 사람들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흡족해하실 만큼 우리의 모습이, 우리의 이 모임이, 우리의 이 교회가 아름답고 거룩하게 되어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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