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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팔은 안으로 굽는다 (고전 04: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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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 사회에 수많은 관계들이 존재하지만, 혈연관계를 대체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도 있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특히 자식에 대한 부모의 정은 설명되기 어려운 매우 특별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인간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동물과 심지어는 식물에게까지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나의 개체가 태어나서 장성하기까지는 특별한 보호와 영양공급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특별한 보호 시스템이 제공되지 않으면 그 신생 개체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그 특별한 보호 시스템을 위해서는 막대한 희생과 헌신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그 보호 시스템이 아무런 무리 없이 작동될 수 있도록 하는 비결이 바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특별한 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에게는 특별한 역할과 책임이 있고 특별한 관계가 유지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를 교육시키는 데는 유치원 선생님이나 엄마나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또 학교의 선생님은 부모가 못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아무리 유치원 선생님을 따르고 좋아한다 해도 엄마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선생님의 역할이 커도 부모만큼 할 수는 없지요.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의 역할을 여러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그는 씨를 심는 사람, 집을 짓는 사람, 하나님의 동역자, 종, 일꾼 등으로 자신의 사역과 사명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와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의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내가 키웠다는 말은 하기 쉬워도 낳았다는 말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낳는다는 것은 어쩌면 자기 목숨까지도 걸어야 할 만큼의 위험과 고통을 감수하는 행위입니다.

낳았다는 것은 무한한 의미를 함축합니다. 낳았다는 것으로부터 희생과 헌신이 나올 수 있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특별한 관계가 성립될 수 있습니다. 선생은 가르치다가 안 되면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기가 낳은 자식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앞서 아볼로 얘기를 했습니다만, 아볼로 역시 고린도 교회에서 헌신적으로 가르쳤던 사람입니다. 아볼로를 최고로 생각하는 많은 추종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볼로에게 고린도로 다시 가서 분쟁과 다른 문제들을 바로잡아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아볼로는 그것을 거절하고 고린도교회와 아예 관계를 끊어버렸습니다.

아볼로가 고린도교회와 관계를 끊은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아볼로가 고린도에 다시 갔더라면 아볼로파가 득세하고 분쟁은 더 심해졌을지도 모릅니다. 또 아볼로가 조금만 불순한 생각을 했다면 아볼로파를 이용해서 자기 세력을 구축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그런 불순한 생각도 없었고, 고린도교회가 바울을 중심으로 다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예 관계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볼로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할 수 있습니다.

아볼로가 훌륭한 결정을 하기는 했지만 바울과의 차이가 여기 있습니다. 아볼로는 고린도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관계를 끊어야 했던 사람이고, 바울은 죽어도 고린도교회를 끝까지 붙잡고 죽어야 할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내 사랑하는 자녀라고 말합니다. 솔직히 고린도교회는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맨날 말썽이나 부리고 부모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식입니다. 말하자면 문제아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그들이 여전히 사랑하는 자녀들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낳은 자식이니까요.

혈연관계에 있어서 관계는 감정에 우선합니다. 다른 관계는 감정에서 관계가 발생해요.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 만나 뜻이 맞으면 친구라는 관계가 되고, 사랑을 하게 된 남녀는 부부의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라도 서로 뜻이 맞지 않게 되면 친구가 원수로 변할 수도 있고, 사랑이 식어진 부부는 이혼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감정 이전에 존재하는 관계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숙명적 관계입니다. 해체가 불가능한 관계입니다.

자식이 못났다고 내 자식 안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친구도 배반하고 부부도 갈라서지만 자식 못났다고 내다버리지 않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아무리 말썽이라지만, 바울은 그들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낳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사랑스러워서 자식을 삼은 것이 아니라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훨씬 예쁘고 똑똑한 남의 자식보다 못나고 덜 똑똑한 내 자식이 더 사랑스러운 비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문제 많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사랑하는 자녀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바울은 자신이 가르친 고린도 교회가 엉망이 된 것을 보고 실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깊은 책임감을 느끼거나 부끄럽게 생각될 수도 있겠지요. 자기는 최선을 다했는데 고린도 교인들이 따라오지 못했다고 그들을 비난하고 책임을 벗어버리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고린도 교회와 자신을 결코 분리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그들을 낳았다며 절대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를 확인합니다. 그러니까 설령 고린도 교인들이 더 나빠진다 하더라도 바울은 그들을 여전히 사랑할 수밖에 없고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영혼을 향해서 이런 마음을 품을 수는 없을까요? ‘저 친구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지 않고 엉망인데, 자기 인생 자기가 알아서 해야지 뭐...’ 이런 식으로 지나치는 수가 많지요. ‘저 친구 하는 꼬라지 보니까 상종을 못하겠네. 저래가지고 무슨 교인이라고...’ 특별한 관계가 아닌 이상 이것이 기본적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물론 우리가 다 바울처럼 다른 사람의 믿음의 부모 노릇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바울의 태도와 정신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일단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실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정신으로 우리가 서로를 격려하고 돕고 이끌어주는 것이 바로 교회 안에서 행해지고, 또 교회 밖으로 확장되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태도와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세요. 바울은 지금까지 고린도교회를 아주 심하게 책망했습니다. 또 필요하면 징계도 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책망과 징계는 그들을 부끄럽게 하고 그들의 잘못과 실수를 적발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들을 타이르고 훈계하는 것처럼 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주변 사람들의 실수나 잘못을 많이 접하고 삽니다. 그것이 실망스러울 때도 있고 우리를 분노하게 만들 때도 있습니다. 또 우리가 그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책망의 동기와 목적입니다. 다른 사람이 실수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을 무시하거나 그 사람의 약점을 잡은 것처럼 고소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우리 자녀들이 잘못했을 때는 그런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차이에요. 그 사람이 안쪽의 관계에 있는 사람인가 바깥쪽의 관계에 있는 사람인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의 정신을 우리 삶에 실험한다는 것은 팔이 굽어지지 않는 바깥쪽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안쪽의 관계로 옮겨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가족의 개념입니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다는 말을 들으시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그리고 둘러앉은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내 모친과 동생들을 보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 바로 내 모친과 동생들이다.”

바울이 제시하는 부모의 역할은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스스로를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교만해서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활쏘는 법을 가르쳐주듯이,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와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로만 전수되는 지식이 아니라 시범으로 보여야 할 삶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신뢰를 얻고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방법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삶으로 보여주는 일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모범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부모의 잘못된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그 부모의 행동을 답습하게 돼요. 물론 그것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는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는 수가 더 많습니다. 그것이 나쁘고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반복해서 목격하게 되면 학습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썽 많은 고린도교회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했던 것은 그 특별한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아무개는 신실하고 점잖고 재주도 많아서 내가 좋아한다는 것은 세상의 일반적인 방법입니다. 그 방법으로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새 계명을 절대로 실천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방법과 기준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무수히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낳았다는 특별한 관계로 말미암아 그 말썽 많은 고린도교회를 사랑하고 끝까지 품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유업을 함께 나눌 사람들 아닌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나와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우리의 모친과 형제, 자매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하고 위로하고 격려해야 하는 관계 속에 있습니다. 잘생기고 돈이 많고 인격이 훌륭해서 사랑하고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가까워야 할 필연적인 관계 속에 우리가 있음으로써 부요하거나 가난하거나 성품이 온유하거나 괴팍하거나 모범생이거나 문제아이거나 상관없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맺어주신 관계, 바울이 보여주고 있는 팔이 안으로 굽는 우리의 거룩한 공동체의 본질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먼저 우리 교회 안에서 아름답게 나타나고 나아가 온 세상에 증거되는 역사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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