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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기쁨 (고전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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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정에서 국민학교에 다니는 어린 딸아이의 생일을 맞아 아이의 친구들과 더불어 조촐한 생일잔치를 즐기게 하였다고 합니다. 케익에 촛불을 켜고 '생일 축하합니다'하고 노래를 막 부를 참인데, 모인 친구들이 먼저 부를 노래가 있다면서 가사를 고쳐서는 '왜 태어났니 영희야! 왜 태어났니 영희야, 이 험한 세상에 왜 태어났니 영희야!'하고 부르더라는 것입니다. 깜짝 놀란 어머니가 눈물이 글썽하여 아이들을 꾸짖고는 '생일 축하합니다'의 축가를 다시 부르게 했다고 합니다.

요즈음의 젊은이들 가운데는 '오늘이 내 생일이다'라고 말하게 되면 '그래?' 하면서 '생일 축하한다'라는 축하의 인사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왜 태어났니?'라고 말하는 축이 많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슬픈 일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이 험악해서가 아닙니다, 세상은 언제나 그래왔고 앞으로도 여전히 그러할 것입니다. 문제는 사랑이 식고 사랑이 없어져가기 때문이며, 사랑의 허위성 때문입니다. 사랑 아닌 것을 사랑으로 생각하며 스스로도 속고 있음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본질적 타락 때문입니다.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악을 행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라며 죄를 용납하고, 사랑이라는 구실을 앞세워 갖가지 불의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어떤 부모는 '내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리가 있겠습니까?'하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가출을 했다면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못하고 있음입니다. 내 사랑이 잘못되었고,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그럴듯한 명목으로 무던히도 남을 괴롭히고, 때로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이며, 그러고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 자체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한 문제의 해결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을 바로 알기 전에는 사랑을 받을 수도, 사랑을 할 수도 없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이란 쉽게 알 수 있는 문제이거나 운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생동안 배우면서 생각해야 할 소중한 보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사랑을 다 아는 것처럼, 사랑에 대해서는 졸업이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는 데에 무서운 함정이 있습니다.

사랑은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벅찬 감격이요 행복입니다. 여기에는 생명의 활력과 창조력이 함께 합니다. 사랑을 받거나 사랑을 베푸는 것 자체를 통해서도 엄청난 기쁨과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런 감격을 맛보지도 못하면서 어찌 감히 사랑을 안다고 하겠습니까? 사랑은 분명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이 눈물의 씨앗이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눈물을 생각하고 이별을 생각하니 도대체 사랑의 개념이 너무도 궁상맞지 않습니까? 이것도 사랑이라고 해야 한다면 이는 생각할수록 무가치한 일이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마음껏 원망하고 한탄하며 증오하면서도 사랑했기 때문이라느니 어떻다느니 하는 그런 맹랑하고 당찮은 넋두리에 더는 속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에도 슬픔의 여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 같은 것은 안 한다' 거나 '다시는 사랑하지도 받지도 않겠다'고 쉽게 말하는 젊은이들을 보게 되면 사랑의 개념이 얼마나 잘못되었으면 여기에 이르렀는가 싶어집니다. 그 결정적인 동기는 바로 사랑의 허위와 사랑의 변질, 그리고 사랑의 타락과 사랑의 착각에 있습니다.

저는 가끔 텔레비전을 보는 중에 개그맨들이 사람 웃기는 장면을 보면서 퍽 안쓰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기뻐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을 웃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싶어서 입니다. 웃지 않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웃기느라고 무던히 애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저 이래도 웃고 저래도 웃을 정도의 마음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럴 마음은 전혀 없이 잔뜩 찌푸리고만 있는 사람을 웃긴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유명한 희극배우 채플린은 일생동안 많은 사람을 웃기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말은 뜻밖이었습니다. '나는 숱한 사람을 웃겼다.

그러나 정작 나 자신은 마음으로부터 기뻐하면서 웃어본 적이 없다.'

이처럼 자기 마음에는 웃음이 없으면서 다른 사람을 웃겨야 하는 생활 또한 못할 짓입니다. 기쁨이 없는 사람이 웃겨야 하는 것도 어렵고 기쁨이 없는 사람을 웃겨야 하는 것도 참으로 어렵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노릇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쓴웃음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참사랑에는 큰 기쁨과 벅찬 행복이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기에 자신도 기쁘고, 사랑을 베풀 때에 다른 사람도 함께 기뻐지게 됩니다. 사랑이라 말하면서도 기쁘고 행복하지 않다면 그 사랑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유명한 심리학자 프롬(E. Fromm)은 그의 저서「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사랑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사랑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사랑은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사랑은 깊은 이해를 수반하는 것이다'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랑이라고 할 때에 이를 가만히 살펴보면 어느 구석에서도 슬픈 이야기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슬프겠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에는 근심이나 슬픔이 자리할 여지가 없습니다. 사랑에는 오직 기쁨만이 자리할 뿐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귀중한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저는 결혼식 주례를 할 때마다 그 주례에 사용한 성격책을 신랑 신부에게 선물로 주면서 이 말씀을 가보(家寶)로 여기며 행복하게 잘살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제 서명과 함께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라고 써줍니다.

사랑은 곧 기쁨입니다. 그러기에 악한 것을 생각하거나 기억하지 않습니다. 이 '악한'을 의미하는 헬라 원문 '토카콘'은 정관사를 동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건으로 나타나는 악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한다고 하는 말씀은, 지난날의 경험과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있었던 악한 일과 노엽고 섭섭했던 일들을 기억하거나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런 것들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악한 것들에 대해서는 완전히 건망증 환자가 됩니다. 만일 어느 순간에라도 섭섭했던 일이나 과거에 있었던 악한 일이 생각나거든 그 순간이 바로 사랑이 식어지는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의 눈에는 결코 상대방의 단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대신 장점만 보이기 때문에 그의 미래를 소망적으로 바라봅니다. 더는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않게 됩니다.

저는 가끔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말에서 크게 실수하는 젊은이들을 봅니다. '나는 아무개에게 실망했다'라고 하는 말이 그것인데, 이 '실망했다'라는 말은 완전히 헤어질 때에나 하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끝나는 상태에서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하고 앞으로도 지속하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함부로 그런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참으로 실망했다면 다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이는 저의 단점이나 악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좋은 점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악한 추억, 섭섭했던 경험으로부터 온전히 자유케 합니다. 나로 하여금 좋지 못한 기억에 얽

매이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합니다. 이에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하였습니다(벧전 4:8).

우리는 때때로 좋지 않았던 일들에 대한 기억을 없애보려고 여러 모로 애를 씁니다. 어떤 이는 술을 마셔보기도 하고 여행이나 스포츠, 오락 등으로 머리 속에 맴돌고 있는 그 원치 않는 기억을 지워버리고자 노력합니다. 그러한 노력은 잘못된 것입니다. 진정 과거의 허물을 잊기 원한다면 지금 사랑해야 합니다. 참 사랑의 능력만이 나로 하여금 그 악하고 부질없는 추억으로부터 해방시켜줍니다.

우리는 때때로 내 사랑하는 대상을 보면서 저가 오늘보다는 좀더 나은 사람으로, 그리고 더욱 아름다운 사람으로 나타나주기를 바라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는 달리 말하여 지금은 예전만큼 예쁘지 않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얼굴에 바를 것을 사다주기도 합니다마는 모두가 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그저 그대로 멈추고 이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진정한 사랑을 해볼 것입니다. 그러면 여전히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사람으로 내 앞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더는 그의 허물이나 실수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상대방이 달라지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내 편에서 뜨거운 사랑을 하십시오. 지난날 첫사랑을 할 때의 그 아름다운 모습이 새롭게 떠오를 때까지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언짢았던 일들이 다 지워질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탕자가 집으로 돌아오는 심정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는 과거 때문에 번민하고 걱정합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단 한마디도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오직 너는 내 아들이라는 것으로 오늘과 내일만을 바라보며 그 모습 그대로를 영접합니다. 이렇게 살아서 돌아온 것만 하여도 너무 귀하고 고마워서 그를 위한 잔치를 크게 베풉니다. 이것이 곧 사랑입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또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불의란 헬라 원문에서도 그러하듯이 '의롭지 못하다'라는 말입니다. 사랑은 의롭지 못한 악한 것들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는 곧 다른 사람의 실수를 나의 성공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며 다른 사람의 넘어짐이나 실패를 보면서 기뻐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정초의 며칠간을 가족끼리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내셨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대체로 우리에게는 이 즐긴다고 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 정확하게 서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이기만 하면 그저 화투판에 윷놀이가 벌어집니다. 굳이 그러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문제는 그 도박성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도박성에서 얻어지는 기쁨은 신선한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나는 땄으니 좋아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은 잃었으니, 그 마음을 헤아린다면 이는 결코 즐길 수 있는 성격의 놀이가 못됩니다. 불로소득을 좋아하며 때리는 기쁨, 빼앗는 기쁨, 속이는 기쁨 따위를 즐기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쁨이 아닙니다. 도박성 있는 즐거움은 기뻐할 것이 아닙니다. 결코 악한 방법으로는 기쁨을 찾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함께 기뻐한다'라는 말이 우리말로는 하나의 문장처럼 길게 풀이되어 있지만 헬라 원문에는 '숭카이레이'라고 하는 하나의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곧 숭카이레이가 '함께 기뻐한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혼자 기뻐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마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울리고는 내가 기뻐할 수 없는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히고 나 또한 행복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기쁨이란 더불어 기뻐하는 것입니다.

저는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술 먹는 장면을 볼 때마다 세상 인심이 저렇게만 된다면 야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 비싼 술을 마시면서도 그저 한잔만 더 하라며 안 먹겠다는 사람에게 강제로 먹이면서 마구 쏟아 붓습니다. 이러한 인심이 다른 것에서도 베풀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왜 유독 이 술만 가지고 그러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술좌석에서는 상대방의 기분이 좋아야 내 기분 또한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술은 마시지 않고 꿔다놓은 보리자루처럼 하고 앉아 있으면 내 기분이 영 좋지를 않습니다. 죄를 지어도 같이 지어야 하고 술을 마셔도 함께 마셔야 하겠기에 상대방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혼자서는 즐길 수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더불어 기뻐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기쁘게 하고야 내가 기쁜 것이며, 아내를, 남편을 기쁘게 하고야 내가 기쁘고, 자식을 즐겁게 하고야 내가 기쁜 것입니다. 만약 이와는 달리 상대방을 울려놓고도 내가 기뻐지리라는 생각을 한다면 어리석은 망상일 뿐입니다. 사랑은 함께 기뻐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과 함께 기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이 말씀이 뜻하는 바를 깊이 생각해봅시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고 하였습니다(롬 12:9).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 앞에서는 비밀이 있을 수 없고 또 거짓될 수 없는 것이 사랑의 생리요 본질입니다. 그러기에 비밀도 거짓도 없는 사실과 진리로 더불어 기뻐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쁨을 갖지 못한 이는 실로 크나큰 모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울한 모습으로 순종하는 자녀를 기쁘게 보시지 않습니다. 기쁨에 충만한 자녀를 보실 때에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가 기뻐하며 행복하기를 원하여 주신 것이지 어두운 얼굴로 괴로워하며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기도만 시작하면 울기부터 하는 교인들이 있는데, 바람직한 것이 못됩니다. 사람 눈에도 달갑지 않은 모습인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런 기도는 하나님께서도 원치 않으시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진정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보통 생각하는 대로 구제나 봉사, 기도를 많이 하는 것도 다 좋은 일이지만 저는 거기에 기준을 두고 싶지 않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란 항상 웃는 사람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일에도 감사하고 저런 일에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믿음의 사람을 원하시며, 그러한 믿음의 사람을 보고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울고불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명예훼손이라 하겠습니다. 왜 그렇게 얼굴을 펴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러고도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자부한다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그렇게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5장 11절 말씀에 보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예컨대 홀로된 어머니가 자녀들을 위하여 많은 수고를 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어머니가 밖에서 피곤한 일을 마치고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자녀들이 기뻐하며 명랑해야지, 그렇지 못하고 왜 우리는 아버지가 없어서 이 고생을 하나 하고 한탄하거나, 왜 우리는 싸구려 음식만 먹어야 하나, 어쩌자고 옷도 한벌 안사주느냐면서 찌푸린 얼굴로 대든다면 그 어머니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어머니의 마음은 옷이야 남루하고 시원찮더라도 내 자식들이 이 어머니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생각하면 참으로 간단한 이치이건만 우리는 왜 그러한 은혜에 살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랑이 슬픔이 되었다면 그 이유는 의롭지 못한 사랑이요 진리를 떠난 사랑이기 때문이며, 홀로 자기중심적인 이기적 사랑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사랑은 악으로부터 자유 합니다. 그리고 의의 길을 좇아 즐기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그러기에 참사랑은 영적인 침체상태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보다 예수님을 잘 믿어보겠다며 애쓰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표정에 그토록 어둡고 괴로운 침체상태가 나타나는 것입니까?

이는 곧 내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일어나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구속의 은혜를 재확인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된 은혜를 다시 한번 가슴에 가득 채웁시다. 그 무거웠던 침체로부터 벗어나 기쁨 안에서의 자유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사랑의 기쁨을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총 속에서 솟아나는 기쁨을 얻고 누려야 하며, 그럴 때에 나의 기쁨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기쁨을 베풀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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