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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삶의 목표 (빌 0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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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어느 시골노인이 서울 사는 딸네 집을 찾아왔습니다. 몇 년 사이에 어찌나 변했는지 이 집이 저 집 같고, 저 집이 이 집 같아서 노인은 당황해 했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친절한 젊은이가 노인에게 도와드릴 것이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노인은 딸네 집을 찾아왔는데 도무지 어느 집인지 모르겠다고 사정 이야기를 했습니다. 젊은이는 주소도 모른다는 노인의 말에 난처해져서 그럼 혹시 딸네 집에 다른 집과 달랐던 무슨 특징이 없었던가를 물었습니다. 노인은 한참 생각하더니 무릎을 탁 치며 '이제 됐다.' 싶은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있었지, 있었고말고. 내가 그때 기억해 두기를 잘했지. 우리 딸네 집 담장 위에 누런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네.'
노인은 보이는 것이 영원하리라는 생각으로 표적을 삼았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비 본질의 것들에 현혹되어 삶의 목표를 그것에 둘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천국, 사랑, 믿음, 소망 그러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지만 크리스천 삶의 목표들입니다.
우리가 잘못 된 삶의 목표, 헛된 꿈들은 결국 삶을 절망으로 이끕니다. 우리의 모든 수고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과 무관한 것일 때 다 헛되고 무익한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등산을 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가게 된 높은 산이었습니다. 산에서 야영을 하면서 산 정상을 정복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아들이 머리 위에 있는 태양을 바라보며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언제쯤 산 정상에 도착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는 지도와 나침반을 보며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그것보다는 앞을 잘 보고 걸어야 한다.'
올라가는 길 주위에는 빽빽하게 나무가 우거져 등산로 구분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아들의 얼굴은 불안으로 창백해지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아무 설명도 없이 나침반만 내려다보며 방향을 확인하는 아버지에게 화가 났습니다.
'이러다간 평생 이곳을 못 벗어날 거예요. 벌써 며칠이 지난 줄 아세요? 아버지, 좀 빨리 걸어야겠어요. 발걸음을 재촉하세요.'
그때 아버지는 오른팔을 뻗어 가리키며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이쪽이다. 우리는 다른 방향의 길을 걷고 있었던 거야.'
두 사람은 방향을 바꾸어 한참 걸은 후에야 목적지인 산 정상에 도착하고 무사히 하산을 했습니다. 하산한 후 아버지가 아들을 불렀습니다.
'얘야, 시간보다 더 소중한 건 방향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하마터면 우리는 산 속에서 헤맬 뻔했구나.'
아버지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나침반을 아들에게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자신의 손목에 찼던 시계를 풀어 아버지 앞에 건네며 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이건 제가 스스로 방향을 가늠할 수 있을 때까지만 보관해 주십시오'
우리가 삶의 목표와 방향도 없이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 결과는 허무할 뿐입니다.
한 추장이 늙어서 자기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세 아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습니다. 큰 나뭇가지에 독수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추장은 맏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저 앞에 무엇이 보이느냐?” “하늘이 보이고 나무가 보입니다.” 추장은 실망하여 둘째에게 물었습니다. “저 앞에 무엇이 보이느냐?” “나무가 보이고 나뭇가지에 앉은 독수리가 보입니다.” 추장은 역시 실망하고 막내에게 물었습니다. “저 앞에 무엇이 보이느냐?” “독수리가 보이는데 두 날개가 있고 그 날개들이 마주치는 곳에 독수리 가슴이 보입니다.” 추장은 기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그곳을 쏴라.” 막내아들의 화살이 독수리의 가슴을 명중시켰고 추장은 막내아들에게 자기의 자리를 물려주었습니다. 자기의 목표를 확실하게 보는 인간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늘을 보거나 나무를 보거나 막연하게 독수리를 보는 것만으로는 독수리를 잡을 수 없습니다. 분명한 꿈과 목표를 가졌을 때 비상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내일을 여는 나의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인간은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고 무엇인가를 위해서 죽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충성하고 헌신할 수 있는 대상이나 목표를 갖지 못하면 허무주의자가 되고 생의 행복감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나의 생명과 정열을 다 바칠 수 있는 목표나 신념을 가질 때 우리는 생의 충실감과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인간 심령 속에 부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목표나 방향이 없이 여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이 귀중한 생명이 삶의 목표로서의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만날 때 그것은 더욱 빛나고 힘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표와 푯대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 34절 등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이루는 것' 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고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저의 삶의 목표는 '많은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단12:3)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매일매일 기도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소년시절 고통받는 흑인들을 보고 일생의 목표로 '노예해방'을 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정치계에 투신하여 여러 번 실패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달성하여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간디도 어린 시절 고통받는 인도인들을 보고 '나는 커서 인도인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분투 노력하여 지금 인도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삶의 목표를 정하고 달려가야 합니다. 예를 들면 '나는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 '남을 구제하는 일'을 목표로 삼겠다. 남을 가르치는 일, 즉 교육, 아니면 사랑, 또는 '전도의 왕'이 되겠다. 평생을 남을 위해 기도하는 일에 누구보다 힘쓰겠다. 또는 찬송하는 일 등을 정하고 오직 그 일을 위해 전심으로 노력하고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달려갈 최종목표와 길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주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스프링 벅이라는 산양은 보통 5, 6마리에서 30여 마리의 작은 무리를 지어 살지만 어떤 날 갑자기 한 곳에 속속 모여 수 천 마리나 되는 큰 집단을 이룰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도자격의 큰 양이 앞장을 서서 천천히 걷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다른 양들은 몸을 맞대고 그 뒤를 따르며 도중에 있는 풀은 모조리 먹어치웁니다. 이기심이 많은 산양은 빨리 앞으로 파고 들어가 풀을 더 먹으려고는 하지만, 맹수의 습격이 두려워 결코 대열을 떠나 옆에 있는 풀을 먹으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제각기 자기를 보호하고, 게다가 풀을 듬뿍 먹으려고 밀어닥치니 얼마 후에는 친구들을 마구 떠다 밀면서 점점 빠르게 전진하게 됩니다. 뒤따르는 양들이 점점 빨라지기 때문에 인도자는 자연히 뛰게 되고, 인도자가 뛰니까 뒤에서도 늦을쎄라 더욱 뜁니다. 결국 모두가 전속력으로 뛰게 됩니다.
인도자들은 아마 친구들이 늘어났으므로 풀이 많은 새로운 거주지 데려갈 예정이었을는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그 목적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다만 뛰는 것 외에는 생각지 않고 그저 앞으로만 돌진합니다. 모래를 날리며 질주하는 양떼들은 어느 새 사막을 건너 해안에 이릅니다. 그러나 앞선 양은 멈출 수가 없습니다. 뒤에서 밀어닥치는 무서운 힘에 밀려, 냇물이 바다로 흘러내리듯 한 몫에 바다로 밀려들어갑니다. 얼마 후 바닷가엔 가련한 양들의 시체로 메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사야 53: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로마서 3:17-18)
이 양떼의 불가사이한 죽음의 행진은 예로부터 수수께끼입니다. 왜 그들은 이렇게 무리한 행진을 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 인생과 너무도 잘 닮았지 않습니까?
질주하고 있는 양들에게 '왜 달리느냐?'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면 아마 그들은 '모르겠다. 모두가 뛰니까 나도 뛰는 것이다' '잘못하면 낙오자가 되거나 위험한 바깥쪽으로 밀려나게 된다'고 대답하겠지요. 그들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가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않고 다만 누구보다도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려는데 필사적이었지만 그 길은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느 길을 가고 계십니까?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입니다.(잠언 14:12) 그러나 여기,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은 사랑으로 만들어진 길입니다. 이 길은 참되며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10:10)
예수님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입니다. 지금까지 가던 멸망의 길에서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십시오.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일을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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