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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혹하는 죄 (히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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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랍 상인이 추운 겨울 사막에서 천막을 쳐놓고 살을 에이는 찬바람을 피해 편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밖에는 그의 낙타가 떨고 서 있었습니다. 이 낙타가 내려진 천막문을 제치고 고개를 들이밀고서 주인에게 고개만 좀 넣고 있자고 청하였습니다. 주인은 못마땅했지만 이에 동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이 낙타가 한다는 소리가 '내 어깨가 몹시 춥군요. 제발 제 어깨와 앞발만 좀 들여놓게 해주세요. '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낙타의 어깨와 앞발을 들여놓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조금 있다가 이 낙타는 살며시 주인에게 접근하여 처량한 목소리로 자기의 육봉과 몸을 좀 들여 놔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할 수 없이 주인은 이에 동의하였습니다. 이제 낙타는 거의 다 들어와 있었습니다. 조금있다 이 낙타는 자기 뒷발을 들여놓자고 애걸하였습니다. 마지못해 주인이 이에 동의하여 뒷발을 다 들여놓자 이 조그만 천막 안에 들어선 낙타가 한다는 말이 '주인님, 우리 둘이 여기 있기에는 너무 좁군요. 주인께서 나가 주시는 게 어떨까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생활에 죄가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각성하라는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리 작은 유혹이라도 단호히 '안돼'라고 물리칠 수 있는 도덕적 용기가 필요합니다.

보르네오섬에는 '네펜세스'라는 아름다운 꽃이 있습니다. 모양도 아름답지만 그 향기는 단연 압도적입니다. 이 식물은 뿌리로 물을 흡수하지만 꽃잎으로는 벌레를 잡아먹습니다. 벌레나 곤충들은 화려한 자태와 감미로운 향기에 취해 꽃잎에 몰려듭니다. 그 순간 꽃잎은 문을 닫고 독한 소화액을 내뿜어 곤충을 녹여버립니다. 네펜세스는 독초(毒草)인 것입니다. '아름다움'과 '향기'의 유혹에 빠져 낭패를 당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유혹은 항상 감미롭습니다. 그러나 유혹을 물리친 후에 느끼는 쾌감과는 비할바가 아닙니다.

비슷한 예로 독사(毒蛇)중 가장 무서운 것이 '부시 매스터'라는 뱀입니다. 이 뱀에 물리면 천하장사도 10분이내에 숨을 거둡니다. 그러나 부시 매스터는 가장 아름다운 뱀입니다. 이 뱀이 햇빛을 받아 오색찬란한 자태를 반짝이며 숲 속을 행차할 때는 '숲 속의 귀족'처럼 보입니다. 쥐나 새들은 이 뱀의 아름다움에 취해 접근했다가 뱀의 먹이가 되고 맙니다. 유혹은 항상 아름답고 달콤합니다. 그러나 유혹의 본체는 항상 죽음과 절망일 뿐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것도 탐스런 선악과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들에게 던져주는 '에덴동산의 교훈'입니다.

성경에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잠1:10),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엡4:22),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잠11:27) 하였습니다.

죄는 죽음에 이르는 달콤함을 줍니다. 저는 죄를 생각할 때마다 에스키모족들이 늑대를 잡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그들은 늑대를 잡기 위해 짐승의 피를 마련합니다. 그 피를 밖에 내어놓아 날카로운 칼 한 자루를 그 속에 세워둡니다. 그리고 그 얼어 있는 핏덩이를 늑대들이 잘 다니는 길에 놓아둡니다. 그러면 늑대들이 지나가다가 피 냄새를 맡고 와서 혀로 핥기 시작합니다. 차가운 얼음에 혀의 감각이 마비된 줄도 모르고 핥습니다. 그런데 핥으면 핥을수록 점점 더 맛있는 피가 나옵니다. 이제는 차가운 피가 아니라 따뜻한 피가 나옵니다. 얼음 속에 숨겨져 있던 날카로운 칼에 자기의 혀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빨아먹습니다. 그러다가 자기의 몸 속에 있는 피를 다 빨아먹고 나면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맙니다.

죄는 그런 것입니다. 죄는 우리에게 죽음을 줍니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은혜를 상실합니다. 성령님은 떠나가시고 신앙의 광야 생활이 시작됩니다. 가정과 함께 인격과 육체가 파괴됩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죄는 항상 결단을 다음 날로 미루게 합니다. 도박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오늘 딱 한 번만 하고 손을 씻으리라. ' 죄는 우리에게 처음부터 평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늘만을 요구합니다. 그 오늘이 평생이 될 뿐입니다.

성경에 보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4:1-11) 마귀가 사람을 유혹할 때는 대개 다섯 종류의 말로 시작합니다.
첫째는, '누구나 다 하는 일이니까'하는 음성입니다. 이 누구나 다 하는 일이니까라는 유혹의 말속에는 나를 모든 사람 속에 용해시켜 버리는 마력이 있습니다. 이 마력에 걸려들면 이제까지 성실하고 착한 '나'라는 자아가 사멸되고 대중 속에 몰입되어 시류에 휩쓸려 살아가게 됩니다.

둘째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까' '이 정도쯤이야'하는 음성입니다. 주일을 범하는 것도 대수롭지 않다고 응원합니다. 양심을 속이는 데도 대수롭지 않다고 속삭입니다. 말하자면 별 것 아니니까 심각하게 생각하거나 신경 쓸 것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속담에 '바늘 도적이 소도적된다. '고 했으며 아무리 큰 고기도 조그마한 미끼 때문에 걸려 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래 전 제가 토요일 저녁에 교회에서 성가 연습을 마친 학생 세 명과 저녁식사를 같이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식당에 가다가 찻길을 만났는데. 횡단보도가 좀 멀리 있었습니다. 그 때 저하고 같이 있던 한 학생이 그랬습니다. '목사님. 먼데 돌아가지 말고. 그냥 찻길로 질러가요' 하면서 막 건너가려고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짧은 순간이었지만. 저는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학생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애들하고 같이 횡단보도가 아닌 찻길로 확 질러가도 괜찮은건가? 아니면 가지 말아야겠는가?

이까짓 찻길하나 무단횡단 하는 것쯤이야. 뭐 대수라고 이런 고민을 하나. 그냥 확 지나가면 되지. 세상 너무 어렵게 살지 말자. 하고 그냥 학생들하고 같이 횡단할까 하고 생각하다가 아니다. 작은 것 하나 제대로 지키지 않는 자가 어떻게 더 큰 하나님말씀을 전한단 말인가. 이러지 말자. 하고 생각하다가 결국 후자를 택해. 질러가려던 학생을 만류하고 같이 횡단보도까지 걸어와서 길을 건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 학생으로 인한 잠깐의 유혹이었지만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이 정도쯤이야. 하는 마음을 통해 유혹을 하는 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담배 피는 분들을 보세요. 그 어른들은 아마 학생 때나 군대에서 담배를 배웠을것입니다. 남들 피니까 호기심으로 이 정도쯤이야 하고 피웠겠죠. 그런데 그 이 정도쯤이야. 하고 한 대 핀 것을 시작으로 평생을 이주일씨는 폐암 걸려 돌아가시게 한 담배의 노예가 되어 매일 매일 몇 가치씩 몇 갑씩 피는 담배의 노예들이 되어있잖아요. 처음의 이 정도쯤이야 하는 유혹을 못 이겨 폈던 것이 나중에 몇 번씩 끊으려고 해도 끊을 수 없는 골초들도 만들잖아요. 병원가보면 담배로 인해서 병 걸려 죽게 될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펴야한다니. 처음의 그 유혹만 이겼더라면 담배를 안 피었을 건데 말입니다.

유혹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게 이 정도쯤이야. 로 다가와서 사람을 꺽어 놓고 좌절의 구렁텅이에 빠뜨립니다. 정말 유혹이란 것은 이 정도쯤이야. 하고 생각하게 해서 사람을 멸망까지 인도한다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예전에 빨간마후라라고 고등학생들끼리 음란비디오를 찍었던 아주 엽기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들이 원래부터 그러고 살았을까요. 그애들도 처음에는 평범한 학생들이었을거에요. 그런데. 손잡는 거야 괜찮겠지. 뽀뽀쯤이야 괜찮겠지. 하면서 점점 영역을 확장해가다가. 나중에는 벌거벗고 있는 것을 켐코더 무비카메라로 찍고 있어도. 이 정도쯤이야.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그 비디오가 세상에 돌고 돌아. 그 망신을 당하고 인생에 아주 큰 오점을 남기에 되었습니다. 이 정도쯤이야. 괜찮아 하고 유혹하는 사탄을 조심하십시오.

성경에도 보면 유혹을 못 이겨서 영원히 저주받는 영혼이 된 사람이 많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가롯유다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에게 영광스럽게도 사도로 임명받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12 명 뽑는 그 사도에 뽑힌다는 것이 얼마나 크고 영광스러운 것이겠습니까? 그것도 예수님께 직접 선발되었으니까요. 그렇다면 말씀배우고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 그것에만 힘쓰고 전력을 다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는 돈에 대한 욕심을 끝내 버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기로 했으면 돈 욕심은 버렸어야 했는데. 자기 생각을 절제하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뜻에 위배되는지 알면서도 이런 생각정도야 하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런 그에게 돈 십 원 한푼 못 쥐어주는 예수가 별 것 아닌 존재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오

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수많은 사람들을 먹일 때, 저 정도 능력이면 나도 이제 예수님의 능력으로 잘살겠다 싶었는데. 그때뿐 항상 돈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분이 예수십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많은 돈을 쥐어주지 못하는 예수님 정도는 별거 아닌 사람이라고 인식됐습니다. 그래서 그는 은30에 예수님을 배신하고 예수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넘깁니다. 은30이라면 고작 노예1명을 살수 있는 값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작은 자동차 한 대 뽑을 값이지요. 한 6-700만원정도요. 그는 예수를 팔아 넘기면서도 예수는 별것도 아닌 사람이야. 그러니 이런 사람 파는 것 정도야 별 것 아니지. 하는 마음으로 넘겼습니다. 그러나. 그 별 것 아니지 하는 마음이 그를 죄의 구렁텅이에 빠뜨렸고. 그는 비참히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항상 죄의 유혹은 별 것 아니다 하는 작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어서 큰 절망 큰 멸망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해서 죄의 유혹에 너무 약합니다. 시험 볼 때 컨닝이 주님이 원치 않는 것을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고. 주일날 지각하면 주님이 안 좋아할 것을 알면서도 다른데서 놀고 있다가 또 지각합니다. 친구하고 싸우고 왕따시키고 하는 것 안 좋은 것 알면서도 또 하는 게 우리입니다. 왜냐하면 그거 하는 편이 우리한테 더 편하고 유리하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컨닝하면 한 문제 맞잖아요. 주일날 예배시간 되도 게임이 안 끝났으면 늦더라도 게임 멋지게 마무리짓고 나오면 기분 상큼하잖아요. 아 열 받게 하는 친구, 재수 없는 친구한테 욕하고 왕따시키면 속 후련하잖아요.

그러나 이런 마음들은 유다 같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어리석은 마음들입니다. 가룟유다 같이 은30개 생길 때의 순간적 기쁨만 알고 그 뒤에 벌어질 고통스런 멸망은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잡혀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기도하라 그랬는데. 잠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잠만 자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예수님도 우리들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마음은 원이로되 너희 육신이 약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주님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내가 사람들과 지내면서 있었던 좋은 것들이 혹시 사탄의 유혹이 아니었는가를 알게 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또한 기도입니다. 이것이 아니고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데로 우리의 육신이 원래 약하기 때문에 결코 유혹에서 벗어나 주님 안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도 가롯유다 같이 유혹에 약한 제자였습니다. 베드로도 자기가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욕을 하면서 부인하는 죄를 범했었습니다. 예수님을 난 그런 사람 몰라요. 하고 부인했던 것은 가롯유다가 예수를 돈 받고 판것에 버금가는 죄입니다. 그런데 가롯유다는 저주받아 죽고. 베드로는 훗날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복음전파를 멈추지 않는 강한 사도로 변모됩니다. 둘 다 죄인인데 왜이리 서로 결과가 다르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가롯유다는 끝내 주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고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확실히 알고 확고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로 그 믿음이 베드로로 하여금 죽음이 너 예수 전파하면 죽인다 죽인다 하고 예수전파하는 것 때려치우면 그럭저럭 먹고살게 해줄게 하고 유혹해도 단호히 물리치고 주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파할 수 있게 했습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5:4-5)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자라면 어찌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유혹에 빠져들 수 있겠습니까 믿음을 가지고 있는 데 유혹에 빠질 순 없습니다. 유혹에 빠졌다면 내게 믿음이 있는가 하고 깊이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결코 세상의 수많은 유혹으로 여러분 자신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유혹에 넘어가는 길이 당장에는 좋고 편하고 즐겁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마음으로 본다면 유혹은 더 할 나위 없는 멸망의 깊은 함정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을 가지면 세상의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디 여러분들의 삶이 깊은 믿음을 소유하여 세상 유혹을 물리치고 주님의 축복 받는 귀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는, '서두르지 말고 내일하자'하는 음성입니다. 게으름과 함께 실수 할 수도 있고 짐짓 잘못했을 때도 마귀는 우리를 감싸며 '괜찮다. 너는 아직 젊으니까, 너는 신(神)이 아니잖으냐' 이렇게 합리화하며 속삭입니다. 그러나 회개의 좋은 기회는 언제나 기다려 주지 않고, 젊음을 망치게 합니다.

마틴 루터의 설교 중에 재미있는 예화가 있습니다. 사탄이 어느 날 자기 부하들을 데리고 이제 세상에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해서 파송하는 기간에 그들에게 이렇게 훈시를 했다고 합니다. 가서 어떻게 해야 많은 사람을 유혹해서 지옥으로 끌고 오겠느냐? 하니깐 한 사탄이 말하기를 '난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돌아가면서 얘기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거 오래 전부터 해먹은 건데 그거 그 방법으로는 안된다' 그러더래요. 또 한 사탄이 말하기를 '나는 돌아가면서 지옥이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죄를 많이 지을 거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탄이 빙그래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렇지 않아도 지옥을 안 믿어' 그러더랍니다. '그러면 고난을 주겠습니다. 고통을 많이 주어야 되겠습니다. ' '고통을 주면은 그 사람들 순교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당한다고 더 기뻐한다' 그래 안된다 이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 왕초 사탄이 딱 한 말이 '그냥 가서 이렇게 말해라. '서둘 것 없고 천천히 예수 믿으시오'. ' 천천히. 누구나 생각은 합니다. 그런데 천천히, 그러다가 세월 다 가는 거예요. 선한 일도 천천히, 뭐든지 좀 후에, 조금 더 있다가. 바로 이것이 예비되지 아니한 마음이요. 예비된 마음이라는 것은 들으면서 바로 받아들여요. 즉시 받아들이고 즉시 순종하는데 있는 거죠. 그에게만 구원의 역사가 있습니다.

넷째로, '이번 한 번 뿐이니까'하는 유혹의 음성입니다. '단 한 번의 거짓말인데 뭐 그리 괴로워하는가'하면서 악령은 우리 양심의 부패를 부채질합니다. 옛말에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습니다. 한 번의 실수가 법정으로 비화되고, 가정을 파괴시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다섯째는, '너무 하지 않니?'하는 음성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도 자기를 몰라주고 무시하는 것 같아 섭섭한 마음이 들게 하여 열심히 하고자 하는 마음을 식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근신하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 (벧전5:8)
이솝우화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창고에 꿀이 흘려져 있었습니다. 이 꿀 냄새를 맡고 파리들이 몰려와 핥아먹었습니다. 그런데 꿀맛이 어찌나 좋던지 파리들은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가 그만 날개며 발이 꿀이 묻게 되어 영영 헤어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물질에 정신이 팔려 영원한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가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은 자들만이 아니라 믿는 자들도 여기에 나오는 파리들처럼 세상의 쾌락과 물질에 빠져 그들의 인생을 망치는 자들이 많습니다 주님 오심이 가까운 이때에 우리자신들을 점검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의 유혹을 이기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리스 신화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옛날 뱃사람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적막한 섬'에서 들려오는 요정의 노래 소리였습니다. 선원들이 밤중에 배를 타고 이 섬을 지나면 사람의 간장을 녹일 듯한 요정의 노래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러면 선원들은 그 음악에 도취해 비틀거리며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아침이면 선원들은 모두 바다에 빠져죽고 빈배만 둥둥 떠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배는 단 한사람의 희생자도 없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선원들은 요정의 노래가 시작되면 그보다 훨씬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화를 면했습니다. 요정의 노래는 선원들의 장엄한 합창에 완전히 눌렸습니다. 선원들은 요정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렁찬 합창으로 요정의 노래를 제압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주는 기쁨과 감격은 세속의 섬에서 들려오는 요정의 노래를 제압합니다. 신앙은 죄의 유혹을 제압하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가까이 할수록 죄와 멀어집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4:7-8) 죄에 대하여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무감각합니다. 죄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잠재의식 때문에 일부러 기피하고 미화하려는 심리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분노, 조급함, 경제적인 고민, 악한 욕망, 증오 등 참으로 여러 가지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순간적으로 범죄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죄악된 생각이 밀려옵니다. 사람들은 처음 죄를 범할 때에는 부끄러움과 고민에 빠집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그 더러운 짓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러나 2-3일이 지나면 새로운 유혹 앞에 다시 굴복하고 맙니다.

남아프리카에는 눈으로 새를 유혹하는 뱀이 있다고 합니다. 새는 뱀의 날카로운 눈빛으로부터 빠져 나오려고 노력하지만, 저항력을 상실하고 두려움 없이 뱀에게로 다가가다가 뱀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고 먹혀버린다고 합니다. 죄는 바라보면 볼수록 아름답고 달콤하게 보입니다. 사람들은 한 평생 죄 때문에 고민합니다. 아무리 고민한들 죄는 도무지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죄로 인한 비참함을 극복하는 방법을 자신 속에서 찾는다면 이는 헛수고임을 무엇보다도 알아야 합니다.
 
16일 동안 구봉 광산의 지하 갱도에 갇혀 있던 양창선 씨가 스스로의 힘으로 나오려고 했지만 도무지 방법이 없었습니다. 구조대원의 힘이 아니고는 절대로 나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구조를 요청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에 대한 무력함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구원자가 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고백하며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사람들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기 위해 제물이 되셨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죄 해결 방법이 아니고는 사람은 결코 조의 구덩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당신도 예수님을 믿기만 한다면 당신의 모든 죄는 깨끗하게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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