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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둥 같은 일꾼이 되자! (골 1: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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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 같은 일꾼이 되자! (골 1:19-25)


하나님은 사명자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명자를 쓰십니다.  하나님은 사명자에게 비밀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명자를 아끼십니다.  하나님은 사명자를 재생산합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 앞에서의 사명자는 바로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부르실 때 그가 해야 하는 것은 오직 겸손과 순종입니다.  선지자가 교만하면 하나님께서는 가차없이 그를 내 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명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하나님께서는 그냥 버리셨습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미리암이 늦은 나이에 구스 여인을 취한 모세를 비방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구스는 아프리카의 에디오피아 등지에 널리 퍼져 있는 흑인이었습니다.  특별히 모세가 출애굽을 할 때 여러 잡족들이 따라 나왔는데 이 구스 여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구스 여인은 이방 여인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모세가 잘못했습니다.  때문에 어찌 보면 미리암의 행동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미리암이 대놓고 사람들 앞에서 모세가 잘못했다고 비방하면서 다녔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모세만 선지자가 아니라 자신도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0절에 보면,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리암도 분명히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과도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미리암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의 잘못을 수군거리고 다니면서 모세를 군중들로부터 철저하게 고립시키려고 했습니다.

어쩌면 미리암의 마음속에는 모세가 지도자로써 강력한 권위를 누리는 그 모습이 부러웠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질투했을 것입니다.  나도 선지자인데 모세만 백성들에게서 존경을 받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만 아니라 나에게도 말씀을 하셨는데 유독 모세만 지도자로써 강력한 권위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일을 계기로 모세를 백성들로부터 철저하게 격리시키려고 했습니다.

민수기 12장 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이 하는 말을 듣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미리암이 그렇게 비난하는 모세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미리암이 모세를 비난할 때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변호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인정하셨다는 말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다른 사람들이 그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꼴을 보지를 못합니다.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그를 따르는 꼴을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미리암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너만 선지자냐, 나도 선지자다."
"하나님께서 너에게만 말씀하셨느냐, 나에게도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 앞에서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특별히 아론과 미리암을 불러내시고 이들 두 사람이 모세를 비방한 사건에 대하여 진노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미리암으로 하여금 나병에 걸리게 하십니다.

저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미리암에게 왜 나병을 주셨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분명히 모세를 비방한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모세를 백성들로부터 격리시키려고 한 행동은 잘못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나병에 걸리게 하실 것까지는 없지 않겠습니까?  다리를 부러뜨리시던가, 아니면 방정맞은 입을 틀어막으시던가.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미리암을 징계하실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미리암에게 나병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 율법에 의하면 나병에 걸리게 되면 무조건 마을에서 쫓겨나서 백성들과 격리하게 됩니다.  나병에 걸리면 지금까지 관계를 가져왔던 모든 관계로부터 단절을 당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도 선지자라고 하면서 모세를 비방하면서 모세를 백성들로부터 격리시키려고 했던 미리암에게 그와 똑같은 고통을 겪게 하십니다.

성경에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라고 하면서 미리암의 이름이 앞에 나오는 것은 모세를 비방하는 일에 미리암이 주도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미리암이 적극적으로 돌아다니면서 백성들 사이에서 모세를 격리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교만해서 자기의 자리를 벗어나서 지도자를 공격하게 되면 백성들로부터 격리시켜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암에게 나병을 주신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미리암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한 것은 그 권위를 덧입게 하신 하나님께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미리암이 단순히 모세를 비방한 것뿐인데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라는 말인가?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사람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그 권위를 허락하시고 덧입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한 개인의 도전이 아닙니다.  모세의 권위는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의 안위와 관계된 권위였습니다.  때문에 모세의 권위가 무너지면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체 안위가 무너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중요하게 보셨습니다.  출애굽의 역사를 보면 끊임없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따로 불러 세우시고 내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도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를 땅이 삼키게 하든지, 염병이 돌게 하든지 해서 가차없이 버리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를 비난하고 백성들로부터 격리시키려고 했던 미리암이 나병에 걸려서 진 바깥으로 내쫓겨나야만 했습니다.  나병에 걸린 그가 홀로 진 밖에 있으면서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얼마나 고독했을까요?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되면 그 이후로 미리암의 존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민수기 20장에 가면, 미리암이 가데스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만 나옵니다.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선지자적 사명을 잊어버리고 모세를 비방했던 미리암은 쓸쓸하게 비석도 없이 인생을 마쳤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우리가 미리암과 같은 행동을 하면 우리도 미리암처럼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라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분명히 그 시대의 그 목적에 맞게 사명자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맞게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명자를 부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명자를 부르신 이유는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명자를 세우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명자들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길을 잃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목적을 상실한 영혼들이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살도록 세워주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명자가 해야 할 일은 지도자와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격리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사명자의 의무를 망각한 채 지도자를 비난하고, 성도들을 비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그를 공동체로부터 격리시키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명자로 살아감에 있어서 어떤 신앙적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가 된다고 하시면서 실족하지 않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명령을 따라 열심히 일한 제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

우리가 누가복음 17장의 본문을 읽어보면 주의 일을 함에 있어서 실족하는 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족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했을 때, 그것은 그가 한 일을 가지고 자기를 내세웠을 때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수고한 것을 내세울 때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실족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내가 남들보다 좀더 수고했다고 자기 자랑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했다고 해서 어떤 대가를 바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일을 가지고 장사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국 하나님의 사명자가 가져야 할 바른 신앙적 자세가 무엇입니까?  먼저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순종하는 모습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주의 일을 함에 있어서 어떤 대가를 바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귀하게 쓰임을 받았다면 그저 감사하면서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사랑 받는 사명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늘 사명자를 준비하십니다.  하나님은 늘 사명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늘 사명자를 교체하십니다.  하나님의 제일 무서운 심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명자의 교체입니다.  "너 끝이다!  너 나가라!  너의 시대가 끝났다!" 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분명히 그 시대의 그 목적에 맞게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이후에의 인생을 보증해 주시지 않습니다.  사울왕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 시대의 그 목적에 맞게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고 교만해졌던 사울왕을 하나님께서는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왕이 된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 결코 보증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혼돈의 시대에 정말로 마음을 찢고 들어야 할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인이 되지 말고, 사명자가 되십시오.  어린 교인이 되지 말고, 힘써서 주의 일을 감당하는 사명자가 되십시오.  오늘 이 시대에 교인은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서 찾으시고 교회가 필요한 것은 진실한 사명자입니다.

교회에 등록을 하고 적을 두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을 다 씁니까?  그들을 쓸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은 교인이 아니라 사명자입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선지자가 없는 시대는 문제가 있는 시대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진실한 사명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사명자가 없다는 것은 지금 그 사회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사명자가 없다는 것은 지금 그 교회가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인이 되지 말고 사명자가 되십시오.  이 시대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어 가는 진실한 사명자가 되십시오.  그 길만이 나와 내 가정이 사는 길입니다.  그 길만이 내 교회와 이 사회가 사는 길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명자 그 한 사람이 있음으로 인해서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는 살맛 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 때문에 내 집안이 살맛 나게 하십시오.  나 때문에 내가 속한 교회와 공동체가 살맛 나게 하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잘 믿으면 뭐합니까?  나 때문에 사람들이 맥이 빠지고, 나 때문에 교회와 공동체가 시들시들해지고 짜증이 난다면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나 때문에 내 집안 사람들이 살맛이 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나 때문에 공동체가 살맛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사명자의 소명 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을 보면 만날 때마다 좋아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만났는데 10년 후에 보니까 그때보다 훨씬 더 좋아졌습니다.  반면에 만나도 늘 그렇고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10년 전이나 5년 전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점점 나빠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10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더 나빠졌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점점 더 좋아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전혀 없습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과거보다 더 못한 신앙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나름대로의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라는 것이 알고 보면 마음의 문제입니다.  물질의 고통, 환경의 고통에 앞서서 그 고통의 근원은 언제나 자기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가 마음을 어떻게 표현했느냐 하는 겁니다.  그가 일어나는 사건을 마음으로 어떻게 반응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은 누구나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마음은 누구나 깨끗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늘 변합니다.  마음은 늘 다릅니다.  마음이 완전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옛부터 사람의 마음은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은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개구리가 어느 방향으로 뛰는지를 모르는 것처럼 도무지 알지 못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죽고 사는 권세가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힘들어도 마음이 살면 사는 길이 있습니다.  인생 사는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문제는 심보를 바꾸는 것입니다.  내 심보를 바꾸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집니다.  마음을 바꾸면 당장에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소망하는 모든 것이 마음의 소망을 따라 이루어지게 됩니다.

목회를 하면서 이런 사람, 저런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간혹 고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차이가 결국 어디서 났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저만치 가서 대단한 수준에까지 이르렀는데, 어떤 사람은 여전히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개척한지 벌써 10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10여년의 세월은 그렇게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이 세월 동안에 우리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부활의 길을 함께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차이가 납니다.  어떤 사람은 뜨거운 신앙으로 살아가기를 몸부림치면서 아름답고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미안한 이야기지만 전혀 답보의 상태입니다.  결국 사람의 차이가 어디서 났을까?  저의 대답은 마음의 선택이라는 겁니다.  결국 마음의 선택의 자유가, 마음의 선택의 힘이 오늘의 자신을 만드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 마음을 남이 선택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을 내 아내가 선택해 주는 것도 아니고, 남편이 선택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목사가 선택해 주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의 자녀가 선택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고난과 비극의 시작은 자기 자신의 마음의 선택을 잘못하는 데서 시작이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단순한 로봇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선택할 수 있는 창조적인 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최고의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목회자로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은혜만 받으면 놀라운 변화가 내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제가 알고 있는 삶, 지금 여러분이 알고 있는 세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그 마음보다도 더 아름답고 귀한 세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끝없이 준비하시는 은혜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생명을 걸고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세계에 들어가야 합니다.  쟁취해야 됩니다.

사람은 사회적 환경에서 오는 자극보다 자기 자신의 마음의 습관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 나를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는 이 마음의 습관으로부터 예수의 이름을 힘입고 벗어나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겁고 어두운 마음의 습관으로부터 자유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은혜의 세계 속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은 환경과의 싸움입니까?  어떤 사람과의 싸움입니까?  아니면 돈과의 싸움입니까?  아닙니다.  자기 내면과의 싸움입니다.  모든 고통의 원천은 바깥 세상이 아니라 결국은 자기 자신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알아 일체의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일체의 자족하는 비교의 삶의 경지를 알고 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가만히 보면, 참으로 웃기는 일들이 많습니다.  어리석은 일들도 많습니다.  매번 자기는 같은 반응, 같은 말버릇, 같은 태도, 같은 심보로 살면서 상대방만은 달라지기를 기다리는 심보를 우리는 저마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웃기는 겁니까?  자기는 똑같은 말버릇, 여전히 변하지 않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할 것은 다 합니다.  말의 일관성이 없습니다.  오늘은 이 말을 했다가 내일은 저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남만 달라지기를 기다리는 아주 웃기는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사전적인 의미를 찾아보니까,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을 가리켜서 '정신 나간 사람들' 이라고 합니다.  지금 이 땅에는 정신병동화 되면서 정신 나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영의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남에 대한 분노, 남에 대한 실망, 그것 이전에 진실하게 자신의 내면을 한 번 들여다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내 안에 숨겨져 있는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 속에 숨겨져 있는 삶의 좌절감, 삶의 무의미, 욕구불만, 내 안에 잃어버린 무언가 그것 때문에 남을 비판하게 됩니다.  남을 무너뜨리고 싶고, 남을 판단하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소위 '열등의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든 문제의 원인이 내 마음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상황은 급격히 달라질 것입니다.  천지가 새로워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많은 사람들은 내 아내가, 내 남편이, 어느 누군가 인간이 뛰어 넘을 수 없는 실현 불가능한 그런 기대를 가지고 문제를 뛰어 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웃기는 일입니다.  내 아내가 뛰어 넘을 수 없는 그런 실현 불가능한 고비를 넘어가기를 원합니다.  내 아들이, 내 남편이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얼마나 허황된 꿈입니까?  사실 인간은 보잘 것 없는 질그릇입니다.  인간은 약하고 복잡한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남편은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는 행동 하나에 여러분의 남편이 지옥에도 가고, 천국에도 가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아내가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표정 하나, 여러분의 험상궂은 말 한 마디에 아내가 무너지고 깨어지는 겁니다.  여기 서있는 오 목사도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내뱉는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저도 지옥의 끝자락에 갖다가 올 때가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반면에 여러분의 작은 관심 하나에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사람은 다 나약한 존재입니다.  저 사람은 아무리 돌을 던져도 안 깨어지겠지?  아닙니다.  다 하나님이 흙으로 만든 질그릇들입니다.  질그릇은 던지면 깨집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을 믿으시고 내 약한 그것에서 다시 강하여지는 능력이 온다고 하는 믿음을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스스로를 돌이켜 보십시오.  지난날의 청소년 시절, 여러분들이 방황할 때, 그 때 그 모습 가지고 사람될 만한 사람이 여기에 앉아 있는 분들 가운데 과연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그래도 사람이 되었지 않습니까?  그래도 이만큼 됐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또 다른 변화의 날을 바라보면서 주님 안에서 마음껏 꿈을 꾸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또 다른 변화를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붙들고 마음껏 자유하십시오.  주위의 사람들이 어떠하든지 또 다른 위대한 날들을 마음으로 그리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그럴 수 있는 것이 인간이고, 앞으로 저럴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이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깨달은 제 나름대로의 교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설교의 제목으로 "기둥 같은 일꾼이 되자"고 했습니다.  기둥이 무엇입니까?  새우리말큰사전에 보니까 '기둥'이란, 어떤 물건을 밑에서 위로 곧게 받치거나 버티는 나무를 말합니다.  그리고 기둥이란 한 집안이나 단체나 나라의 의지가 될만하거나 또는 중책을 맡을 만한 가장 중요한 사람을 비유할 때 쓰인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기둥은 뼈대와 같습니다.  건축물에 있어서 기둥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한 단체나 교회가 성장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기둥 같은 일꾼입니다.  서까래를 받쳐주는 것이 기둥입니다.  교회의 버팀목이 되는 것, 성도들을 받쳐주는 것, 이것이 기둥 같은 일꾼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기둥 같은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건강해야 합니다.

인간의 기초가 건강입니다.  인간의 첫 자산이 건강입니다.  건강은 빌려줄 수 없고 빌릴 수도 없습니다.  건강은 하나님에 대한, 사회에 대한, 그리고 가족에 대한 의무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리면 무용지물입니다.  제가 건강을 잃어보니까 무용지물입니다.

비범한 재능, 인격, 뛰어난 학문, 다 소용없습니다.  건강이 첫째입니다.  교회 일도 건강해야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건강을 잃어버렸다거나 몸이 피곤하면 모든 것이 짜증납니다.  몸이 건강해야 마음도 건강합니다.  오랜 병자를 보십시오.  그들은 병과 함께 마음도 병들어 갑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기둥 같은 일꾼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기둥 같은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일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있어야 사랑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일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과 사랑이라는 것의 근원은 등뼈와 같은 것입니다.  일이 있고 사랑이 있어야 등뼈가 바로 섭니다.  등뼈가 없으면 흐물흐물해 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일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그는 흐물흐물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내가 신앙을 좀더 뜨겁게, 내 생활에 활력이 넘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일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서 그 일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내 신앙이 성숙해져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정의를 내리시겠습니까?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리면 그리스도인이란, 섬기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섬기는 일이 기뻐지는 사람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를 섬기고, 성도를 섬기는 일이 기뻐지는 사람, 그가 바로 기둥 같은 일꾼입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이란, "모든 것들을 섬기는 종된 자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섬기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도둑이요, 섬기는 자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섬기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가장 행복한 그리스도인이란, 섬기면 섬길수록 기쁨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행복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25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여기에서 '직분'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온유한 뜻과 능하신 지혜에 의한 직분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온유하신 지혜, 능하신 뜻을 통하여 나를 하나님 교회의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인 동시에 일꾼된 사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도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다른 예외의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죽기 전에 세 가지를 후회한다고 합니다.  첫 번째가 '좀 더 참을 걸' 하면서 후회를 한다고 합니다.  사건이라는 것이 살아가다가 참지 못해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랬으면 그런 일이 없을 텐데….  두 번째는 '좀더 베풀 걸' 하면서 후회를 한다고 합니다.  천년만년 살 줄 알고, 끌어 모으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죽음을 눈앞에 두고 나니까 쌓아놓은 것이 죄스럽고 책임감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더 베풀 걸….  마지막으로 '좀 더 즐길 걸' 하고 후회를 한다고 합니다.  무엇을 더 즐긴다는 것입니까?  내가 내 나름대로 해야할 바를 바로 찾아서 참된 일이 내 삶을 마음껏 소모하도록 그 일로 즐길 걸….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언젠가 인생의 마지막을 맞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 지혜로운 일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현재 나를 위하여 쾌락을 추구하는 것보다 인생의 종점을 보면서 내 인생을 현재 종점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사람, 내 인생의 종점을 생각하며 오늘 나를 돌아볼 때, 내가 교회의 기둥 같은 일꾼이 되어서 교회를 섬기며 기뻐하는 것, 이것보다 더 멋진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우리 모두가 언양 영신 제단에서 기둥 같은 일꾼으로 쓰임 받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교회를 섬기면서 기뻐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언젠가 사랑하는 주님을 만났을 때 결코 부끄럽지 않는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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