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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들 (출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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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잊어버린 사람들 (출 16:1-8)


시작하는 말 

여러분, 지난 한 주간도 안녕하셨습니까? 장마가 시작되어서 비도 비지만 날씨가 몹시 후덥지근 합니다. 여름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교회에 모여 예배하는 교우들 모두에게 하나님이 내리시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부족한 종에게도, 말씀을 듣는 여러분에게도 성령의 감동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어떤 젊은 집사님 댁에서는 식사할 때 마다 5살배기 꼬마아이가 식사 감사기도를 늘 하였습니다. 이 꼬맹이가 기도 하는 것이 귀엽기도 하고 어찌 생각하면 어린아이의 기도니까 꼭 들어주실 것만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늘 꼬맹이가 식사 감사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그랬는데 어느날은 온 식구가 다 같이 외식을 하게 됐습니다. 집에서 못 보던 맛있는 음식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차려진 식탁을 척 보자마자 이 녀석이 허겁지겁 먹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먹어야지? 니가 기도해야 엄마 아빠도 먹지!”했더니 아주 점잖게 대답하는데“아빠, 하나님께 감사기도 안 해도 돼. 오늘은 아빠가 돈을 낼 거 아냐! 돈을 내고 먹는데 왜 감사기도 하느냐는 말이었습니다.”그 아버지가 이걸 설명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디까지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일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의 감사는 절대적 은혜에 대한 감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적 생각에  휘말려 들어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음식으로 말해도 참 좋은 냄새가 나면 감사 기도가 좀 길어지고 음식이 시원치 않으면 기도 해도 그다지 뜨겁게 하지 못하고 시원치 않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목사님인데도 식사기도를 잘 안합니다. 그래서 한 교인이 물었습니다.“목사님께서는 식사기도를 안하고 식사하실 때가 많습니다 그려.”“허, 그거요? ”‘이 메뉴는 많이 기도한 메뉴입니다. 그러니 또 할 필요가 없지요.’그랬다고 합니다. 감사는 절대적이어야 하는 데 자, 맛이 있다고 감사가 나오고 맛이 없다고, 그날따라 또 입맛이 없다고 감사기도를 안 해도 되겠습니까? 

앗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에게 제자가 물었습니다.“선생님, 어떻게 해야 겸손한 마음으로 늘 감사하며 살 수 있을까요?”성자는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하나님을 한 번 생각해 보아라. 그리고 십자가를 쳐다보아라. 그러면 감사하게 될 것이다.”우리의 신앙은 절대적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듯 나를 보호해주시고 사랑해 주시는구나! 근본적인 것을 생각하며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대 은혜라는 것입니다. 절대 감격, 절대 은혜를 감사하게 되면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의 이스라엘 백성을 반면 교사 삼아 절대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몸  말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1절에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 이월 십오일이라.’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제 이월 십오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2월 15일이라는 말도 아니고, 애굽을 나온 후 2개월 십오일이라는 말도 아니고, 애굽을 떠난 제 이월 곧 두 번째 달 십오일이라는 말입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on the fifteenth day of the second month after they had left Egypt. 애굽을 떠난지 한 달 보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셉이후로 애굽에서 살게 되었고, 세월이 지나면서 소수 민족으로 많은 어려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 어려움이 얼마나 심했으면‘애굽의 노예생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2장에 보면 사백 삼십년의 세월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생활 하다가 노예로 죽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고는 자유라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로 저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출애굽하게 됩니다. 그 출애굽의 엄청난 감격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면 그 감격 그대로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백골난망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작은 어려움 앞에서 절대적 은혜를 잊어버리고 원망하였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 많은 사람들 상당수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왜냐? 원망하다가 죽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딱 한마디로 요약합니다.‘광야에 엎드러져 죽었느니라.’이유는 원망 죄입니다. 원망… 우리는 이걸 알아야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짓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범하는 부도덕- 비윤리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망 죄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범하는 죄입니다. 이게 다른 것입니다. 애굽에서 지은 죄가 아닙니다. 구원받아 광야에 나와서 지은 죄입니다. 이런고로 우리 믿는 사람이 범하는 죄, 신학적으로 말하여 하나님을 믿는 사람, 은혜를 아는 사람,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결정적으로 범하는 죄가 원망 죄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원망하다가 광야에 엎드러져 죽었느니라. 그런고로 너희는 원망하지 마라.’그렇습니다. 원망한 데는 물론 이유가 있었지요. 출애굽해서 나가는 길에 적이 나타났습니다. 이 적에 맛 설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런가하면 홍해가 앞에 있다고 또 원망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로 나올 때 사실은 북쪽으로 가서 동쪽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동쪽으로 동쪽으로 홍해의 광야길로 인도하십니다. 

이렇게 가면 홍해하고 딱 맞딱 뜨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쪽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홍해로 말입니다. 그래 홍해가 딱 가로 놓이니까. 이 사람들이 원망을 합니다. 뒤에는 애굽군대가 따라오지, 앞에는 홍해가 있지, 좌우는 절벽이지…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와도 같습니다.‘이젠 죽었다.’모세를 향하여 원망합니다. 이 사람들은 원망을 하면서도 위트가 있어요. 애굽에 공동묘지가 없더냐, 왜 우리를 데려다가 여기서 죽이느냐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왜 이들을 이리로 인도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육지로 해서 쉽게 가나안으로 가게 되면 조금만 어려운 일을 당해도 되돌아가자 할 거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그걸 아시고, 돌아가지 못하게 하시고자 홍해를 건너가는 경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중삼중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봅니다. 홍해 가운데를 지나가는 통쾌함을 누리게 됩니다. 애굽군대가 빠져죽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온 백성이 일어서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런 큰 감격의 시간을 경험하게 하셨단 말입니다. 이제 홍해가 다시 합쳐지는 것을 보고 이제는 되돌아갈 생각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홍해의 광야길로 인도하셨다고 성경은 분명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정하신 코스요 하나님의 커리큘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믿고 따라가면 좋았을 걸, 그 사이를 못참아가지고 원망을 했습니다. 홍해 앞에서 저들이 원망을 합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하겠습니다. 홍해를 건넌 다음에 이제 보니 물이 없습니다. 먹을 물이 없다고 또 원망을 합니다. 그것까지도 뭐 목마르니까 그렇겠지, 이해가 됩니다. 또 양식이 없다고 원망을 해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십니다. 여기까지는 내가 쉽게 이해를 하겠는데, 그 다음 원망이 문제입니다. 고기가 없다고 원망을 합니다. 고기먹고 싶다고… 아, 이 피란민 주제에 고기까지… 안 그렇습니까? 살아남는 것만도 고맙지. 원망을 하되 또 한다는 소리가 애굽에서 노예생활이긴 했지마는 고기 가마에서 몰래 주인네 고기 꺼내먹는 재미가 있었는데, 하고 고기 생각이 난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좀 심하다 싶지 않습니까. 

그것만이 아닙니다. 한술 더 어이없는 원망도 있었습니다. 민수기 11장에 나옵니다. 마늘과 부추가 없다고 원망을 합니다. 마늘과 부추라… 나는 부추 먹을 때마다 이거 생각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부추 없다고 원망했다는데, 왜요? 마늘과 부추가 없으니 정력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원망도 가지가지입니다. 아니, 지금 피란민신세인데 정력 따지게 됐습니까. 그러나 같잖게도 마늘과 부추가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옆에 있었으면 그냥 한 대씩 쥐어박아버리겠는데… ‘뭐 이따위 인간들이 다 있나?’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원망을 한 이유가 뭡니까. 

그 깊은 곳에 있는 것은 다른게 아니라 은혜에 대한 건망증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10가지 재앙으로 구원하시는 모습을 보잖았습니까. 또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잖았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펄쩍 펄쩍 뛰지 않습니까. 그 모든 은혜에 대한 감격을 너무 쉽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조금 전에 자세하게 설명하였듯이 정확히 한달 보름밖에 안되었는데 말입니다. 그 사이게 이렇게 원망을 하게 됐습니다. 은혜를 잊어버린다는 것, 가장 무서운 죄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은혜를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사람에게나 하나님께나 최소한 은혜를 배반하는 자는 되지 않아야 될 것입니다.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원망하게 됐습니다. 

또 하나 과거를 끊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옛날생각 하는 거 참 조심해야겠습니다. 나이가 들면 더 그러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이들면 새로운 것, 새로운 뉴스, 정보에 대해서는 입력장치가 잘 작용이 안됩니다. 그리고 옛날 건 전부 되살아납니다. 그래 노인이 되면 옛날얘기만 합니다. 옛것에 대해서는 또 정신이 좋아서 점점 더 생각이 나나봅니다.  저희 아버지 장로님이 노인 요양병원에 계시지요. 벌써 반년이 넘었습니다. 별다른 합병증이나 고통없이 잘 지내고 계십니다. 그런데 연세가 있고, 오랫동안 그냥 누워 계시니까 30%쯤 침해가 오는 것 같습니다. 

멀쩡히 말씀하시다가도 3-40년 전의 얘기를 섞어서 하십니다. 그리고 10년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다리고 찾고 계십니다. 참 딱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렇게 사람에게는 옛것이 참 소중한 것인가 봅니다. 그런데 옛날생각 하는게 나쁜 것 아닙니다. 문제는 옛날로 돌아가자니까 문제지요.‘애굽으로 돌아가자’합니다. 노예생활 하던 것 잊어버립니다. 노예로 고기가마 곁에서 고기 훔쳐먹던 그 생각을 하고 오늘 자유인의 고통을 감수하지 못하고 있단 말입니다. 선택의 기준입니다. 

자유인으로 죽는 게 낫지 노예생활에서 배불리 먹는게 낫겠습니까? 노예로 배부르기 보다는 차라리 자유인으로 굶어죽자- 이런 선택 기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정으로 부자되기 보다는 그저 정직하게 가난을 택하자- 이게 바른 선택이 아니겠습니까. 요새도 보면 양심에 가책되는 일들을 많이 해놓고 말입니다. 좀더 출세하고 좀더 돈벌고 좀더… 그러다가 말년에 가서 가슴을 칩니다. 다 소용없습니다. 노예적인 부귀보다 자유인의 가난과 고통을 선택하는 바른 기준이 있어야만 원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귀중한 말씀을 줍니다. 원망의 속성을 말씀해줍니다. 8절 하반절을 보십시오.‘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니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저들이 모세를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라고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세를 원망하고 모세를 죽이겠다고 하고 왜 모세가 우리를 인도했느냐하고 원망하는데, 모세를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또 환경을 원망하는 것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라도 장마에 불편하고 덥더라도 너무 덥다고 호들갑 떨지 마십시오. 그것도 죄입니다. 여름에 덥지 그럼 추운가. 안그렇습니까? 그런가하면 좀 비가 많이 오면 비가 많이 온다고 신경질 내고 짜증내지 마시고 조심하십시오. 누구를 향해서 원망하는 것입니까.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은 일기에 대해서, 환경에 대해서, 정치에 대해서 그렇게 원망하지 마십시오. 이만하면 괜찮아요. 그렇치 않습니까? 

밥술 먹고 살면서 뭘 그러십니까. 하나 더 중요한게 있습니다. 원망은 버릇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품이 됩니다. 원망은 원망을 낳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자식이 말 안듣는다고 원망하면 자식은 부모를 향해서 왜 낳았냐고 원망 합니다. 저들도 할 말이 많지요. 자기 들도 살기 어려운 세상에 왜 나까지 낳아가지고 고생하느냐고, 고생시키느냐고… 따지자면 그쪽이 할 말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뭘 가지고 누굴 원망하겠다는 것입니까. 아이들 요새 똑똑합니다.“누가 태어나고 싶다고 했나. 자기들이 좋아서 낳아놓고 말이 많아.”안그렇습니까? 절대 원망하지 마십시오. 큰 코다칩니다. 원망은 이렇게 더 큰 원망을 낳습니다. 

영성가요 신학자인 헨리 나우언의‘안식의 여정’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합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 - ‘남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자 하느냐? 그렇다면 너는 고독한 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자기자신에 몰입하고 있느냐? 그렇다면 보장받을 수 없는 불행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불필요한 근심, 앞으로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을 두고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사느냐? 그렇다면 그것은 모든 악의 동기가 될 것이다.’깊이 생각해 볼만한 말입니다. 바른 생활의 비결은 오직 은혜에 대한 오직 감사입니다. 겸손한 마음에서 은혜를 알고 감사할 때에 감사하는 자는 마귀도 유혹하지 못합니다. 오직 자유인의 감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잊을 수 없는 절대적 은헤를 가득 안고서도 자그마한 어려움과 고통 앞에서 금새 남을 원망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들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돌아 보십시오. 우리에게도, 나에게도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가 셀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작은 시련 앞에서 쉽게 원망하거나‘돌아가고 싶다고’말하지 마십시오. 모세를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원망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광야에서 엎드려져 죽었습니다.’현실을 보더라도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내일을 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무리 하는 말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목마름이 있었고, 배고픔이 있었고, 피곤하고 답답함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럴 때 마다 그들이 하나님의 절대은혜를 기억했다면 원망하는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을, 열 가지 재앙으로 그들을 출애굽 시키시고, 홍해를 갈라서 그들을 안전하게 인도하신 사랑의 손길을 기억하고 믿었다면 그냥 묵묵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다릴 수 있었을 것을,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원망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서 절대은혜에 감사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에나 이스라엘 백설들이 출애굽할 때 언제는 자기들의 힘이나 계산된 계획으로 진행하였습니까? 지난 날 나의 생을 생각해봐도 계획된 내 계획이나 계산대로 살아왔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강한 손을 느끼지 않았습니까. 그 절대적 은혜로 살아왔음을 잊지 말고, 그 절대적 은혜를 감사합니다. 

오직 감사만이 원망을 이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속에 원망의 요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의 말이 입에 튀어 나오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망을 극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못 믿는 행위입니다. 이미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가나안을 향해 매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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