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인 왕 (삼하 1장)

  • 잡초 잡초
  • 866
  • 0

첨부 1


종인 왕 (삼하 1장) 
 
 
히브리 성경은 사무엘서가 상·하 두 권이 아닌 하나의 두루마리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사무엘하부터 다윗 왕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내용상 구별될 수 있는 지점이지만, 사무엘서 전체는 일관되게 ‘하나님께서 왕이심’을 증언합니다. 표면상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실상은 신정왕국의 통치를 대행하는 하나님의 종이었지요. 그는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가 주변의 열강들과는 달리 하나님 나라로서의 특성을 잘 드러내어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다윗이 이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 가는지 보겠습니다.

1절의 “사울의 죽은 후”라는 말은 드디어 쫓기는 삶이 끝나고 새 시대가 열렸음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사무엘서 기자는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도륙”하고 “시글락”에 머무른 사실을 구태여 언급합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 다윗이 함께 참여하지 않았으며, 사울의 죽음과 관계되지 않았다는 강력한 알리바이입니다. 그리고 이 알리바이는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으로 세움 받는 일에 매우 중요하지요. 또 한 가지 생각해볼 수 있는 점은 아말렉 진멸이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지시하셨던 뜻이었다는 점입니다(삼상 15:3). 사울의 불순종으로 성취되지 못했던 그 일을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이루셨지요.

종종 우리네 삶에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말렉의 침략을 허용하신 후 승리를 주신 일이 마치 ‘병 주고 약 주는’ 것처럼 해석될 때가 있지요. ‘왜 그런 일이 발생했을까? 왜 처음부터 막아주지 않으셨을까?’라는 의문으로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하나님의 지혜롭게 행하셨음을 감사하게 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 속에 지내기도 하지요. 그럴 때에 성도가 가져야 할 자세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9)는 말씀을 겸허히 수용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로우심을 의심치 않고 신뢰해야 할 것입니다.

시글락에 거한 지 “제삼일”에 사울의 진으로부터 한 사람이 이스라엘의 패배와 사울과 요나단의 전사 소식을 다윗에게 전했습니다(2). 자기의 공이 은근히 드러나도록 사실을 슬쩍 각색한 보고내용이지요. 해발 500미터 정도 되는 길보아 산에서 “병거와 기병”(6)을 운용하기란 어렵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사울을 “촉급히”(바짝) 따랐다면 최고의 전리품이 될 왕의 “면류관과 팔에 있는 고리”(10)를 놓치지 않았겠지요. 이방인의 손에 죽지 않으려고 자결했던 사울이 “아말렉 사람”(8)임을 확인한 후 도움을 청했다는 것도 모순입니다. 이처럼 몇 가지 의혹은 있지만 이스라엘의 패배와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했다는 사실만큼은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아말렉 소년이 면류관과 팔고리를 길보아 산에서 130km 정도 떨어진 시글락까지 가져왔을 때는 그만큼의 보상을 기대했겠지요. 차기 왕은 다윗이 될 것이라는 분석과 평생 다윗을 대적했던 사울의 죽음은 기쁜 소식이 될 것이라는 판단도 작용했겠지요. 시대의 흐름과 권력의 향방을 잘 파악해서 적당한 시기에 소속을 바꾸어가며 출세를 꿈꾸는 그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전사 소식을 접한 다윗의 첫 번째 반응은 아말렉 소년의 예상을 뛰어넘었습니다. 다윗은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당한 사람처럼 “자기 옷을 잡아 찢”으며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11-12)했지요. 그러자 다윗의 사람들도 따라했습니다.

흔히 좋은 기회를 ‘하나님의 뜻’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윗이 그일라 성에 갇혔을 때, 사울은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고 해석했지요(삼상 23:7). 반면 다윗의 사람들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상황을, 여호와께서 손에 붙이시겠다고 하신 “그 날”로 해석했습니다(삼상 24:4). 자기 마음에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 이루어질 상황을 하나님의 뜻으로 속단하기가 쉬움을 보여주지요. 다윗도 아말렉 소년이 가져온 왕관을 보면서 ‘이제 나를 왕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되었나보다’라고 해석하기 쉬웠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상황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예단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찾을 때, 하나님의 주권과 속성에 비추어 생각했습니다. 이것들과 충돌되는 일이면 아무리 좋은 기회와 환경이 주어져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할 줄 아는 다윗의 탁월함 여기에 있습니다. 기회나 환경이 마련되었다고 해서 쉽게 속단에 빠지지 않는 그를 보면, 왕좌에 집착하지 않았음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의 간절한 소원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일보다 ‘하나님의 종’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철저한 하나님의 종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왕이 되면, 사울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면서 실상은 자기 권위로 백성 위에 군림하는 모습이 됨을 알았나 봅니다.

원수일지라도 ‘죽음’ 자체는 기뻐할 요소가 전혀 아닙니다. 인간의 경험 중에 가장 큰 슬픔을 내 기쁨으로 삼는 일은 잔인하고 무정하여서 하나님의 종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태도지요. 성경은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사 그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잠 24:17-18)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지니라”(출 23:4-5)라고 가르칩니다.

사울의 죽음에 대해 울며 금식한 후 다윗이 보인 두 번째 반응은 아말렉 소년을 처벌한 일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14)라고 정죄하고 “저를 죽이라”(15)고 판결했지요. 아말렉 소년이 죽은 것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단순한 기회주의자였다면 용서할 수도 있었겠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권위를 멸시하는 자를 묵과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그를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를 멸시하는 죄에 해당하며, 그 죄에 대한 형벌은 사형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내렸지요. 장차 이스라엘 왕이 될 사람이 보여준 첫 판결이었습니다.

아말렉 소년이 죽자 다윗은 다시 한 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 함이니라”(16)고 했습니다. 아말렉 소년의 말이 사실이든 꾸며낸 말이든 그의 말에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존중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철학자 하이데크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는데, 말을 보면 그 속에 어떤 존재가 있는 지 알 수 있지요. 비록 꾸며낸 말일지라도 아말렉 소년의 말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상황이라면 분명히 사울을 죽였을 사람임을 알려줍니다. 또한 꾸며내 보고라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을 기만한 행위이므로 이 또한 여호와의 권위를 멸시한 죄에 해당합니다.

다윗은 평생 하나님의 권위를 최종 권위로 삼고 자신부터 복종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했기 때문에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들을 포기했었지요.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어렵게 돌아가며 모진 인고의 세월을 겪었습니다. 반면에 자신에게 큰 유익을 줄지라도 하나님의 권위를 멸시한 자는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스릴 나라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권위가 존중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다윗은 하나님 나라를 증시하는 신정왕국의 통치자로서 합당한 인물이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 나라를 증시할 기관은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최종 권위가 되는 것이 첫째 원칙이어야 하지요.

다윗의 세 번째 반응은 “활 노래”를 지어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게 한 일입니다(17). 12절에서 다윗이 울며 금식했었던 이유는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죽음 때문만이 아니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을 인하여”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여호와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블레셋 족속에게 패배를 당하므로 비웃음거리가 되고 수치를 당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고 다시는 퇴색되지 않고 늘 하나님 백성 중에 존재하도록 역사적 교훈을 노래에 담았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의 첫머리는 “이스라엘아 너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19)로 시작됩니다.

“영광”(ybiC.h;, 하체비)이라는 단어는 수리아 역본에서는 ‘가젤 영양’(gazelle)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어떻게 번역되었던 다윗의 관심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가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에게 패배한 것은 “이스라엘의 치욕”이라는데 초점이 있습니다(삼상 17:26). 두 번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될 일로 생각한 것이지요. 그만큼 다윗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다윗은 백성들이 사울의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 기간 중 이스라엘 백성이 누렸던 안정과 번영을 ‘감사’하게 합니다. 또한 일신의 평안보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왕좌에서 비켜섰던 요나단의 기이한 ‘사랑의 정신’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사랑도 기이하지만, 사울에 대한 다윗의 칭송 역시 기이합니다. 두 사람 모두 인간이 어떻게 그런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 기이함 때문에 활 노래는 다윗의 고단수 정치 쇼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맛본 사람들은 오늘날도 기이한 사랑과 기이한 용서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그분의 기이한 사랑이 가슴 먹먹하게 채워져서,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성품이 표출하지요. 인간이란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깊이 깨닫고서 원수를 용서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원수를 사랑하기까지 하는 일이 없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나라의 속성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는 그분의 종이 되는 일이 첫 번째 일입니다.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