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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기뻐하는 이유 (빌 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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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뻐하는 이유 (빌 1:12-18)


어느 목사님이, 설교 중에 그러시더라고요(지어낸 얘기). 길 가는 사람 100명을 붙잡고 “요즘 어떻게 사십니까?” 물으면, 1등이 “그럭저럭 삽니다.” 2등이 “마지못해 삽니다.” 3등이 “죽지 못해 산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中에서 몇 등 원하십니까? 1등하시겠습니까? 2등, 3등하시겠습니까? …. 그렇지 않으면 전혀 다른 등수를 원하시는지요? 

예전, 어느 기업광고카피에 “세상은 1등만 알아주지 2등은 기억해주지 않는다.” 혹, 1등의 의미가 다르다하여도, 1등만 좋아하는 삶은 문제가 많습니다. TV 드라마 가만 보십시오. 요즘 두드러진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누가 主演인지, 누가 助演인지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주연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조연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막상 드라마를 보면, 어떤 때는 主客이 顚倒 되어, 主演의 인기를 능가하는 助演들을 심심찮게 봅니다. 조연도 주연 못잖게 대단히 중요하단 얘기지요.

조연이 아무리 중요해도, 助演이 유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두 가집니다. 첫 번째는, 조연도 주연과 똑같이 最先을 다해야 한다는 겁니다. 일부러 조연하겠다는 사람이야 있겠습니까? 十中八九는, 멋진 스포트라이트 받는 주연하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 제자들도, 하늘나라에서 서로 좋은 자리 차지하겠다고 어머니까지 동원해서 로비하잖았습니까? 자기들끼리도 심하게 다투기도 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 보십시오. 한 달란트 받고, 실망해서 그 한 달란트, 그냥 땅에 묻어둬 버렸습니다(한 달란트 가치? 노동자 15년 치 연봉; 요즘 돈 가치로 4, 5억은 됩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을 얼마나 부러워했겠습니까? “왜, 하필 내가 한 달란트란 말야?” 그럼,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주연입니까? 아닙니다. 그도, 다섯 달란트 맡긴 했지만, 역시 조연에 불과합니다. 차이가 있었다면, 그는 자기가 맡은 달란트에, 최선을 다 했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助演은 어디까지나 조연다워야 한다는 겁니다. 드라마에서 아무리 助演이 인기가 높다 해도, 조연은 조연입니다. 助演이 인기 좀 있다고 대사에도 없는 말을 하거나, 나설 때도 아닌 자리에 마구 나선다면, 그 드라마가 진행 되겠습니까?(수많은 NG가 나지 않겠습니까?) 

세례요한(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 선지자) 보십시오. 예수님의 등장을 가리키면서, 예수님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마지막 코멘트하지 않습니까? “이는 나보다 능력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마3, 11; 막 1, 7; 눅 3, 16; 요 3, 27). 使徒 요한은, 또 한 가지 결정적인 세례 요한의 고백을 증언합니다. “그는 興하여야 하겠고 나는 衰하여야 하리라”(요 3, 30). 세례 요한은, 자기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정체성 혼돈이 없던 사람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점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라는, 助演正體性이 아주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기쁨의 이유가, 어딨습니까? 예수님을 넘어서려는 主演正體性에 있습니까? (말이야, 어찌 우리가 감히 예수님의 자리 넘본다고 할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But 실제로는 주연자리, 꽤 넘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告白되기를 所望합니다. 본문 18절 말씀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方道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사도 바울은, 그가 기뻐하는 理由, 근원이,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의 기쁨은 자기 榮達에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명예나, 자신의 존귀함, 육체적인 안일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이런 고백하고 있잖습니까?(빌 1, 19-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상당히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다칩시다. 우린 박해시대를 사는 것도 아닙니다. 富饒의 시대를 삽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요구한다면, 너무한 것 아닌가? 충분히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보다 더 부요하고, 더 편리한 삶을 산다 해도,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 中心的인 삶을 살지 않으면, 내 인생에 참 기쁨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우리나라, OECD자살률1위).

돈이 기쁨이라면, 돈 없으면 불행합니다. 名譽(인기)가 기쁨이라면, 명예를 잃어버리면 모든 것 잃어버렸다 생각합니다. 絶望합니다. 權力이 내 인생의 기쁨이라면, 권력 얻지 못하면 불행하잖겠습니까? 무엇이 참 기쁨입니까? 행복입니까? 우리가 四方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 낙심하지 아니하고,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亡하지 않는 理由가 뭡니까? ‘참 기쁨의 根源’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그 答을 줍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 시위대 안에 있는 監獄에 투옥되어 있습니다. 4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시민권자인 바울은,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재판받기 위해 상소했습니다. 그래서 罪囚의 몸으로, 罪囚의 身分으로 로마까지 왔습니다. 로마에 오기 전, 바울은 이미 가이사랴에서 2년 넘게 投獄生活했습니다. 그가 굳이 로마황제에게까지 상소한 이유는, 로마에도 복음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목적 때문에 바다의 폭풍도 넘었습니다(死線을 넘음). 

죄수의 身分으로 로마에 온 겁니다. 황제에게 상소했기 때문에, 로마정부 心臟部인 侍衛隊 안, 한 監獄에 투옥되었습니다. 그 소식이, 로마교회에 전해지자 로마교회 안에서, 두 부류로 반응하는 敎人들이 나타났습니다. 

첫 번째 부류의 敎人들은, 투옥된 사도 바울에게 妬忌하는 마음으로, 忿爭을 일으키려는 의도로, 나쁜 競爭心으로, 不純한 動機로 바울의 異邦人 使徒의 地位와 能力을 무력화시키려는 자들이 일어났습니다. 불순한 동기로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전파하면서 스스로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명분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었지만, 바울을 비하시켜 자기 이름, 명예, 지위를 높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경쟁심으로, 불순한 동기로, 바울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고,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두 번째 부류의 교인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투옥된 바울에 대하여 변함없는 好意를 가지고, 동역자의식을 가지고 더욱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이런 現狀은, 2천 년 전에만 있던 일이 아닙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인 빌립보 교회 안에도 있었고, 오늘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바울의 문제만이 아니지요. 우리자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현상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이런 현상이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反應하느냐?입니다. 내 삶의 중심가치가 어딨느냐?는 겁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이런 문제가 닥치면 福音的으로 應答합니다. 이유가 뭘까요? 인생이, 自己中心的이지 않고 그리스도 中心的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方道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8). 이 말은, 무슨 방도로 하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은 기쁨이고 기뻐할 일이지만, 분쟁이란 방법, 투기라는 방법, 괴로움을 더하게 하기 위해 순수하지 못한 방법까지도 기뻐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순순치 못한 방법은 분명히 잘못 된 것입니다. 이 둘은, 혼돈하면 안 됩니다(빌 2,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 전해질 무렵(1888년 6월), 서울 시내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초기 선교 역사에서, 기독교가 당한 첫 시련입니다. 소위, 영아소동嬰兒騷動(baby riot)입니다. 말 그대로, 아이들 때문에 일어난 騷動(폭동수준)입니다. 이런 괴상한 소문이 서울 시대 돌았습니다.

“西洋 사람들이 조선 아이들을 데려다 공짜로 먹이고 입히는데, 다 꿍꿍이 속이 있다.” “서양 사람들이 조선 아이들을 데리고 男色을 즐긴다더라.” “서양 사람들이 조선 아이들을 데려다 잘 먹인 다음 다른 나라에 奴隸로 판다더라.” “서양 사람들이 조선 아이 신체를 해부용으로 쓰고, 눈알은 사진기 렌즈로 쓴다더라”(사진기 모르던 時代니까, 그럴 만도 했겠지요). 

심지어 프랑스 공사관에서 요리사로 근무한 적이 있는 ‘오봉엽’이란 사람은 이런 말까지 하고 다녔습니다. “서양 사람이 조선 아이를 잡아, 연한 살은 칼로 썰어 먹고, 피를 잔에 받아 마시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다”며 돌아다녔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덜 익힌 피가 내비치는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자르고, 붉은 포도주 마시는 것을 보고, 人肉을 먹는다고 소문 퍼뜨린 겁니다. 그렇잖아도 선교사들을 ‘서양 오랑캐’(洋夷), ‘서양 귀신’(洋鬼)이라며, 不信과 恐怖의 대상으로 몰아붙였는데, ‘아이유괴범’ 혐의까지 덧씌웠으니, 백성들이 왜 흥분하지 않겠습니까?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고아원, 학교, 병원에 몰려가 “조선 아이 내놓으라” 시위했지요. 정동에 있던 배제학당과 이화학당에도 시위대가 몰렸습니다. 기숙사에서 지내며 공부하던 학생들은 부모의 손에 끌려갔습니다. 선교사 사택에 돌 던지는 건 예사고, 고용된 한국인들에게도 폭행을 일삼았습니다.

밑도 끝도 없는 ‘영아소동’ 헛소문의 배경이 누구였겠습니까? 그 배경은, 기독교를 내세운 진보적인 開化派 勢力 확산을 憂慮한 守舊派保守勢力의 음모였습니다. 말하자면 政治的인 사건이었던 거지요. ‘영아소동’을 겪은 후, 스크랜턴 선교사가 제출한 선교보고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는 가까스로 민중 시험기를 통과했습니다. 전에 우리가 정중하게 도움을 요청하면 비웃기만 하던 그들이 이제 우리를 全的으로 信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단지 한 마음으로 자신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였습니다.

[병원사역이라든지, 배재학당 이화학당의 학원선교사역, 얼마나 놀라운 역사적인 변화를 가져다준 사건입니까? 당시 우리나라는, 男女七世不同席이라는 사회 아닙니까? 그런 시대, 선교사님들이 고안해 냈던 것 중 하나가, 휘장 세례입니다. 1894년 평양에서 스크랜턴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전덕삼 부인의 증언 보십시오. 

“나는 세례가 엇더케 하는 것인지 모르거니와 우리나라 풍속에는 녀자는 모르는 남자와 대면치 못하는 법이 잇스니 엇지하여야 하리닛가 하고 무르니 그(스크랜턴)가 대답하기를 그러면 방 한가온데 휘쟝을 치고 머리 하나 내노흘 만한 구멍을 낸 후에, 그리로 머리만 내밀 것 갓흐면 물을 머리 우헤 언져 세례를 베풀겟다고 하엿다. 나는 그의 갈아쳐주는 대로 하야 나의 적은 딸과 함끠 쳐음으로 세례를 밧게 되엿다.” 전덕삼, “내 생활의 략력”,〈승리의 생활〉, 조선예수교서회, 1927, 9쪽. 

방 한 가운데 쳐진 휘장, 그것은 조선시대 남성과 여성을 가로막은 ‘남녀유별’ 문화의 상징적인 구조지요. 그런데 그 휘장 한가운데 구멍이 뚫린 겁니다. 비록 머리 하나 겨우 들어갈 만한 작은 구멍이지만, 뚫린 휘장 사이로, 西洋人 男性 牧師에 의해, 역사적인 첫 여성 세례가 이루어진 것입니다(요즘은, 女性按手時代). 구멍 뚫린 휘장이 갖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구멍 뚫린 휘장은, 오랜 역사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봉건적인 男尊女卑文化를 바꾸는 상징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여성들이 세례 받으면서 이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여인들 이름 없던 존재아닙니까? 남성은 兒名에다 ‘자’(字)와 ‘호’(號)까지 짓고, 벼슬하다 죽은 사람에겐 ‘시호’(諡號, 죽은 後 공덕을 기리며 붙여준 이름, 李舜臣에게 ‘忠武’라는 諡號내림)까지 붙여줍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이름이 없습니다. 어려서는 ‘아무개(남성) 딸’, 결혼해서는 ‘아무개(남성) 댁’ 혹은 친정․고향 따서 ‘안성댁’, ‘진주댁’ 불립니다. 아이 낳으면 ‘아무개(남성) 엄마’, 늙어서는 ‘아무개(남성) 할머니’로 불렸습니다(섭섭이, 간난이, 언년이 등). 그런 여성들에게 이름(세례명)이 주어졌습니다(우리나라 개화여성들 이름 보십시오. 세례명입니다; 여메례Mary 김세지Sadie 황애덕Esther 김마리아, 김활란Helen, 최나오미Nomi)]. 

복음이 한국사회에 가져다 준 변화의 능력이고 福입니다. 스크랜턴 선교사님의 다음 보고를 유의해보십시오. “이런 것을 볼 때, 우리 마음이 얼마나 기쁘고 또 기운이 나는지 모릅니다. 확신하는 바는, 우리가 한국을 그리스도께 이끌고 있다는 점입니다”(Annual Report of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889, pp. 293-94.) 

한국에 온 초기선교사들은, (온갖 어려움 중에도)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기뻐하고 또 기뻐하였던 바울과 같이, 우리나라 백성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와 같은 순전한 기쁨이, 한국교회를 윤택하게 하는 밑거름이었습니다. 

섭섭하십니까? 惑, 내 이름․명예가 없어진다 해도,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여김 받고,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 때문에 기뻐할 순 없겠습니까? 예수님께, 내 人生드라마의 主演자리를 내어드립시다. 주연의식, 자존심, 명예 내려놓으십시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삶을, 한 번 결단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아멘.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주님의 것 삼아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고백이, 입술의 고백이 아닌 삶의 고백, 내 인생의 고백 되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내가 높임 받고, 예수님 이름으로 나의 유익을 구하는 자 되지 않게 하옵소서.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주님 높이는 자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가 전파되기를 소원합니다. 그것이 내 기쁨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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